• 신편 한국사
  • 고대
  • 09권 통일신라
  • Ⅴ. 문화
  • 2. 불교철학의 확립
  • 1) 교학의 발달
  • (1) 유식사상

가. 원측의 유식학

 圓測(613∼696)1039)宋 復,<大周西明寺故大德圓測法師佛舍利塔銘>(≪日本續藏經≫권 150), 91쪽.
崔致遠,<故飜經證義大德圓測和尙諱日文>(≪智異山華嚴寺事蹟≫, 29∼30장).
은 신라의 왕손으로 3세의 어린 나이에 출가하였다. 법휘는 文雅인데 자인 원측으로 불렸다. 입당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15세 때에 처음 法常·僧辯(섭론)에게 청강하였다 하니 이때쯤 중국에 간 것으로 보인다. 당 태종이 득도를 허락하고 장안의 元法寺에 머물게 할 만큼 신라왕실의 지원을 받아 중국에서도 상당한 후원이 있었던 듯하다.

 원측은 중국에서 수학하면서 다양한 불교학을 익혀 비담·성실·구사·婆娑 등에 두루 통달하였고, 梵語 등 6개 국어에 능통하였다. 善德女王 14년(645)에 玄奘이 새로운 經論을 가지고 인도에서 귀국하여≪瑜伽論≫(630년 역)·≪成唯識論≫(659년 역) 등을 번역 소개하자 원측은 빠르게 이 사상을 이해하였다. 武烈王 5년(658)에 西明寺가 낙성되자 원측은 大德으로 초빙되어 이곳에서 지내며≪成唯識論疏≫를 비롯한 많은 논서를 지어 현장의 新譯佛敎를 널리 펴는데 이바지하였다. 한때 終南山 雲際寺에 물러나와 지내고 이후 더욱 한적한 곳에서 8년 동안 한거하기도 하였으나 다시 서명사에 돌아와≪성유식론≫을 강의하였다. 그리고 인도에서 地婆訶羅가≪密嚴經≫·≪顯識論≫을 가져와 번역하는데(685∼688) 대덕 5인 중의 證義로 참가하였다.

 신라에서는 神文王이 여러 차례 원측의 귀국을 요청하였으나 則天武后는 이를 허락하지 않아 신라에 돌아오지 못하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洛陽에서 실차난타가 새로이 들여온≪화엄경≫(新譯) 번역(695∼699)에 참여한 원측은 이를 모두 마치기 전에 佛授記寺에서 84세로 입적하였다.

 그의 생애를 살펴볼 때 원측은 먼저 眞諦의 舊唯識을 깊이 이해하는 교학 기반을 다졌으나 현장이 호법계통의 新唯識을 갖고 귀국하자 곧 이를 수용하여 크게 선양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원측이 진제계 구유식의 문제점을 누구보다 명확히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1040)高翊晋,≪韓國古代佛敎思想史≫(東國大 出版部, 1989), 140∼152쪽.

 원측의 유식사상의 특징은 위와 같은 그의 생애에서 드러난 사상 경향에서 비롯된다. 유식에서는 인식의 출발점인 마음에 대해 치밀하게 분석하여 8가지로 분류한 識說과 존재의 형태를 고찰한 三性說이 중심사상을 이룬다. 원측은 이 중에서 먼저 진제의 식설에 대해 비판하였다.

 식설은 구유식 중에서도 地論과 섭론계통에서 서로 다르게 이해하였다. 지론에서는 마음을 法性心(眞如心)과 相應心(意識)의 둘로 나누고 이 진여심이 純淨無垢의 眞識인 阿賴耶識이라는 심식설을 전개하였다. 慧遠(523∼592)은 이를 바탕으로 기본 감각기관인 眼·耳·鼻·舌·身의 감각 작용인 前5識(識)과, 이를 총괄하는 의식 작용인 제6意識(意), 의식의 심층에 있는 自我인 제7阿陀那識(心), 이 근저에서 모든 행위를 발생하게 하는 근원적인 존재인 제8阿賴耶識(眞如)이라는 8식설의 체계를 세웠다. 지론종 내에서도 勒那摩提―慧光―法上―慧遠으로 이어지는 南道派에서는 아뢰야를 순정무구의 眞識으로 파악한 데 비해, 菩提流支―道寵―僧休로 이어지는 北道派에서는 아뢰야를 染汚生滅의 妄識으로 파악하였다.

 그런데 진제(499∼569)가 정립한 攝論에서는 6식까지는 지론과 같이 이해하나 제7아타나식은 번뇌장일 뿐이며 제8阿梨耶識(지론의 阿賴耶識과 표기가 다름)은 진여와 果報와 染汚의 세 가지 성질이 있는 眞妄和合識이라고 파악하였다. 그리고 다시 그 위에 眞如淨識으로 제9阿摩羅識을 설정하였다.

 이와 같은 진제의 식설에 대해 원측은 아타나의 명칭이≪解深密經≫에는 제8식의 다른 이름으로 나오기 때문에 잘못된 것이며, 역시≪해심밀경≫에 의하면 식을 전환하여 지혜를 얻는다고 하였으므로 제7식이 오직 번뇌장이라는 것도 잘못된 것이라고 논박하였다. 그리고 제9아마라식이 反照自體라고 하나 경전의 전거가 없으므로 인정할 수 없고, 이 9식無垢識은 아뢰야식의 청정분일 따름이라고 비판하였다. 이는 신유식의 8식설에 따라 진제의 구유식 식설을 비판한 것이었다.

 원측은 일체 제법을 파악하기 위해 시설한 三性三無性說에서도 진제설을 비판하였다. 진제는 三性을 다른 것에 의해 생기는 依他起性을 중심으로 이해하여 의타기성 위에서 마음에 의해 잘못 상정된 遍計所執性에 집착하지 않으면 그것이 곧 있는 그대로의 실재를 근원적으로 완성하는 圓成實性이라 하였다. 이 삼성을 차례로 전부 부정한 것이 三無性이다. 원측은 삼성 중에서 진제가 집착하는 작용으로서의 의타기성과 집착하는 대상으로서의 변계소집성을 모두 부정한 데 대해 의타기성을 부정하는 것은 모든 존재의 근거를 박탈하는 것이 되어 올바른 진리마저 부정하게 되므로 이는 잘못이라고 비판하였다.

 원측은 이 밖에 여러 이론을 전개하면서 진제의 학설을 많이 인용하였다. 그러나 신구유식의 견해가 차이가 나는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구유식설을 예리하게 비판하였다. 이는 원측의 지향점이 현장에 의해 새로이 소개되어 당시 당의 불교계를 풍미해가던 신유식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원측은 현장에서 규기로 이어지는 당의 법상종 유식사상과는 달리 中觀과 唯識의 대립에 대한 의식에서는 유식 일변도의 이해가 아닌 포용적인 관점을 보였다. 원측이 소개하는 바에 따르면 彌勒은 眞俗을 설하여 아울러 존재케 하고 龍樹는 空有를 설하여 둘다 버렸는데 여기에서 유식과 중관이 비롯된다고 한다. 중관의 淸辨(500∼570)이 체계적으로 유식을 논박하고 나서자 유식은 安慧―진제로 이어지는 無相唯識에서는 중관과 상통하는 일면을 보였으나, 護法―현장으로 이어지는 有相唯識에서는 의타기성과 원성실성의 有를 강력히 주장하여 공유 대립의 형세를 드러냈다.

 청변은 歷法遣相觀空門을 세워 일체법은 모두 공이라 하고, 호법은 在識遮境辨空觀門을 세워 일체법은 유무에 통한다고 한다. 청변은 世俗諦에 의하면 空·不空이 있지만 勝義諦에 의하면 공 아닌 법은 없으므로 공에 집착하면 惡取空이 된다 하고, 호법은 변계소집성은 無요, 의타기성과 원성실성은 有인데 일체제법을 덮어놓고 없다고 하니 악취공이라 한다.

 이러한 중관과 유식은 상대방을 포용하지 못하고 자신의 논리만을 강조한다. 이에 원측은 空觀을 통해 이 둘을 화해하고자 하여 다음과 같은 견해를 내세웠다. “청변은 공을 취하고 유를 부정하여 유에 대한 집착을 제거하고, 호법은 유를 세워 공을 부정하여 공에 대한 집착을 제거하였다. 그러므로 공은 유가 곧 공이라는 이치에 어긋나지 않고 유는 공이 곧 색이라는 교설에 어긋나지 않는다. 공이면서 유라는 사실을 이해하면 두 가지 진리를 이루며, 공도 아니고 유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 中道를 터득한 것이다.”1041)圓測,≪般若心經贊≫(≪韓國佛敎全書≫1, 3쪽上).
――,≪解深密經疏≫(≪韓國佛敎全書≫1, 123쪽中).
이처럼 원측은 청변과 호법을 모두 동등하게 인정하고 있다. 불법의 큰 뜻은 바로 이와 같은 것임을 강조하며, 그러기에 “내가 낫다는 논에 집착하는 것이야말로 불법에 심히 어긋난다”고 학파간의 대립적 입장을 경계하는 것이 원측의 관점이었다.

 원측은 아뢰야식의 변화를 중심으로 현상 세계의 변화를 설명하는 데 역점을 두는 당의 법상교학에 비해, 신유식의 식설과 함께 구유식과 같이 현상세계의 이론적 설명과 깨달음으로의 실천적 전환을 포괄하는 삼성설을 중심으로 유식사상을 체계화하였다. 그리고 구체적인 내용에서는 진제의 구유식을 비판하고 현장의 신유식을 지지하는 독특하면서도 일관된 체계가 원측 유식사상의 특징이었다.

 이처럼 원측의 사상에는 유식과 중관 그리고 구유식과 신유식의 두 학파의 대립적인 입장을 폭넓게 포용 이해하여 극복하려는 화해의 뜻이 잘 나타나 있다. 이는 원측이 모든 교설을 목적에 이르게 하는 도구인 方便으로 보고 이론 자체의 논리적 체계성보다는 그 쓰임에 주목했던 인식과도 상통하는 것이다. 규기처럼 유식만을 선양하지 않았기 때문에 원측의 유식사상은 중국 법상종에서는 제대로 계승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원측이 보였던 포용적인 태도는 당시 불교사상계의 가장 중요한 중관과 유식의 지양이라는 과제를 풀 수 있는 중요한 인식이었다. 이러한 독자의 포용적인 사상체계에 원측이 차지하는 사상사적인 의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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