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9권 통일신라
  • Ⅴ. 문화
  • 2. 불교철학의 확립
  • 1) 교학의 발달
  • (4) 계율학

(4) 계율학

 계율이란 수행자 개인이 선행을 하겠다는 자율적 의지인 戒와 교단통제를 위한 승가규범으로 타율적 강제적인 律을 합쳐 말한 것이다. 戒·定·慧 삼학의 하나로 초기불교 이래 크게 중시해온 계율은 승려와 불교도들의 일상생활과 밀착되어 변화해왔다. 신라에서는 삼국기에≪四分律≫에 대한 저술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지고 慈藏을 비롯한 律師들이 불교수용 이후 교단 체제형성에 가장 절실히 요구되었던 계율을 중심으로 신라 불교교단을 이끌었다. 신라가 중대에 들어서면 계율에 대한 관심이 원효를 계기로 사분률 위주에서 梵網戒 중심으로 바뀌고 계율연구도 율사들이 아니라 유식학승들이 주도하였다.

 원효는≪범망경≫에 대한 본격적인 검토를 통해 菩薩戒를 신라사회에 수용 정착시켰다.≪梵網經菩薩戒本私記≫에서 원효는 특정 경론에 의거하지 않고 ≪범망경≫을 주석하여 이미 유행하던 소승계와 새로이 수용된 범망계와의 관계를 해명하였다. 그리고≪菩薩戒本持犯要記≫에서는 범망계를 중심으로 玄奘에 의해 새롭게 주목받은 瑜伽戒와의 조화를 도모하였는데, 여기서 원효는 중죄의 규정을 완화하고 犯戒의 동기를 중시하여 정신성을 강조하면서 이타행과 중생제도를 강조하였다. 이는 자신의 무애행과 중생제도 활동과 연관을 가지는 새로운 포괄적 계율관이었다.

 원측의 제자로 중국에서 활동했던 勝莊은≪梵網經述記≫를 지어 유가계를 기준으로 범망계를 포섭하려는 의도를 보여 원효와는 전혀 다른 계율 이해 태도를 보였다. 승장은 사회적인 문제에 관해 드러난 견해가 없는 것과 더불어 다른 승려들과 구별되는 인식을 보여준다.

 義寂의≪菩薩戒本疏≫와 太賢의≪梵網經古迹記≫역시 승장과 같이 유가계의 입장에서 유가계를 바탕으로 범망계를 주석하였으나, 유가계에 범망계를 포섭하려는 의도가 없었던 것이나 오성각별설을 비판하고 모든 중생이 성불할 수 있다고 본 것은 승장과 다른 점이다.1101)崔源植, 앞의 책, 91·141쪽. 의적은 재가신자들에게 관심을 갖고 이들의 위상을 높게 평가하였는데, 이는 통일 이후 증가한 서민 신자들의 성장을 반영한 것이었다. 동시에 의적은 노비와 주인은 지위가 서로 섞일 수 없다고 신분의 구별을 엄격히 하기도 하여 신라 신분제사회의 한계를 반영하고 있다. 태현은 현실 문제에 대해 소극적인 대신 왕권 수용에 대한 인식이나 孝恩 등을 강조하였다.

 계율의 구체적인 해석에서 원효를 비롯한 계율 논사들은 중생에게 무궁한 이익을 가져오게 하는 慈悲殺生은 오히려 복을 짓는 일이라는 殺生觀을 보였으며, 자신을 높이고 남을 헐뜯지 말라는 自讚毁他계의 경우에도 행동 기준을 마음가짐의 중요성에 두어 평가하였다.1102)安啓賢,<新羅佛敎>(≪한국사≫3, 국사편찬위원회, 1976;≪韓國佛敎史硏究≫, 同和出版公社, 1982, 95∼96쪽). 이 밖에 玄一이나 端目의 범망계에 대한 주석이 있으며, 보살계 이외에 원효나 도륜·경흥·혜경 등이≪四分律羯磨記≫를 비롯한 사분률 관계 저술을 남겼다.

 이처럼 신라에서 크게 중시된 보살계사상은 왕권을 안정시키고 통치를 정당화하는데 기여하는 한편으로 지배자의 전횡을 삼가하게 하고 善政을 유도하는 일면도 가질 수 있었고, 평등사상을 통하여 서민들에게 정신적 위안을 줄 수 있었을 것이다. 한편 보살계를 설하는≪범망경≫은 중국의 효사상까지 수용하여 성립한 경으로써 孝順을 강조하고 망자에 대한 追福을 역설하고 있으므로 이의 유행은 유교와 불교간의 갈등을 완화해주는 역할도 하였을 것이다.1103)崔源植, 앞의 책, 153∼160쪽.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