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9권 통일신라
  • Ⅴ. 문화
  • 2. 불교철학의 확립
  • 2) 불교신앙의 일반화
  • (1) 미타신앙

(1) 미타신앙

 신라 중대의 가장 보편적인 신앙은 彌陀信仰이었다. 미타신앙은 아미타불의 중생 구제 본원력에 의해 사람들이 아미타불을 지성으로 염송하면 사후 극락세계에 왕생하게 된다는 내세신앙이다. 신라의 미타신앙은 국가를 위한 전쟁에 동원되었지만, 절을 짓거나 탑을 세우는 것과 같은 공덕을 쌓을 수 없었던 중고기의 일반민들에게 강한 호소력을 지니게 되었다.1104)金英美,<신라통일기 불교계의 동향과 추이>(≪역사와 현실≫14, 1994), 19쪽. 이러한 사회 분위기가 기층민들과 직접 어울리며 포교하던 일련의 교화승들의 활동에 따라 통일기에 점차 기반을 다져나가도록 하였다.1105)金煐泰,<新羅佛敎 大衆化의 歷史와 그 思想 硏究>(≪佛敎學報≫6, 1968;≪新羅佛敎硏究≫, 民族文化社, 1987, 116∼122쪽).

 惠宿은 화랑 好世郞의 낭도였는데 호세랑이 은퇴하자 그도 은거하였다. 그런데 혜숙은 국선 瞿旵公이 사냥하여 고기를 잡아먹기 좋아하는 것을 비판하였다. 이는 기층민의 요구에 부응하여, 지배층과 결합된 기존 교단에 비판적인 기층사회의 의식을 반영한 것이었다. 혜숙은 사람들의 재를 지내주기도 하고 惠宿寺에서 지내며 공간을 뛰어 넘는 여러 가지 이적을 보였다.

 惠空은 天眞公의 집에서 고용살이를 하던 사람의 아들로 어렸을 때부터 신기한 행적을 보여서 천진공이 자신을 인도해 달라고 청할 정도였다. 늘 술에 취하여 삼태기를 지고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춤을 추었으므로 負簣화상이라고 불렀다. 그가 머무르던 夫蓋寺 우물에 들어가서 몇달 씩이나 있다 나오는데 옷이 조금도 물에 젖지 않았다. 만년에 恒沙寺(吾魚寺)에서 지냈는데 원효가 글을 쓰다가 의심이 나면 혜공에게 가서 묻곤 하였다. 이 밖에도 생사를 넘나드는 여러 가지 이적을 보이는가 하면 미리 비법을 알려주어 영묘사 화재시에 금당 등을 구하기도 하였다. 당대 불교의 지도적인 인물인 明朗이 금강사를 지어 낙성연을 베푸는 데도 특별히 요청하자 겨우 참석하기도 하였다.1106)李基白,<新羅 淨土信仰의 起源>(≪學術院論文集≫인문사회과학편 19, 1980;≪新羅思想史硏究≫, 一潮閣, 1986, 132∼138쪽).

 大安은 저자에서 생활하면서 궁중에 초청하거나 호화로운 생활을 외면하며 기층민과 어울려 지냈으나≪금강삼매경≫과 같은 새로운 경전이 도입될 때 오직 그만이 흐트러진 내용의 편차를 알 만큼 사상적인 깊이를 갖추고 있었다. 이러한 교화승들의 다양한 활동은 기층민에게 점차 가까이 다가서는 불교가 기반을 닦아갔던 것을 알게 한다.

 이러한 경향을 계승하여 치밀한 교학 이론을 바탕으로 정토신앙을 대중신앙으로 확립한 것은 원효였다. 원효는 범부도 왕생할 수 있다는 교학을 마련하고 나서 스스로 파계한 뒤 속인의 옷을 입고 배우들이 춤추고 노는 괴기한 박을 도구로 만들어 무애가를 세상에 유포시키고 천촌만락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사람들과 어울려 지냈다. 이에 따라 나뭇군 장삿군들도 불타의 이름을 알고 南無의 칭호를 부르게 되었으니 이는 모두 그의 공이었다.1107)≪三國遺事≫권 4, 義解 5, 二惠同塵.
≪宋高僧傳≫권 4, 唐新羅國黃龍寺元曉傳.
≪三國遺事≫권 4 義解 5, 元曉不羈.

 원효 이후 신라 정토 교학은 많은 주석서가 저술되어 왕성한 형세를 보였다. 미타신앙을 이루는 경전은≪無量壽經≫·≪觀無量壽經≫·≪阿彌陀經≫의 미타삼부경인데 이에 대해 신라 승려들의 다음과 같은 주석서가 이루어졌다.

미타경전 주석서

慈藏 아미타경소 圓測 무량수경소·아미타경소 元曉 무량수경종요(○)·무량수경요간·무량수경사기·무량수경소·아미타경소(○)·유심안락도(○)·미타증성게(○) 義相 아미타경의기 法位 무량수경의소(○) 憬興 무량수경연의술문찬(○)·아미타경약기·관무량수경소·무량수경소 靈因 무량수경소 道證 서방극락요찬 玄一 무량수경기(◇)·관무량수경기·아미타경소·수원왕생경기 義寂 무량수경술의기(○)·관무량수경강요·관무량수경소·무량수경소 道倫 아미타경소 太賢 무량수경고적기·관무량수경고적기·아미타경고적기·칭찬정토경고적기·정토총요간 (≪韓國佛敎撰述文獻總錄≫, 동국대 출판부, 1976, 7∼96쪽을 토대로 함. ○는 현존, ◇는 부분 현존)

 현재 남아 있는 저술로 볼 때 원효에서 시작하여 법위·현일·의적으로 이어지는 정토교학은 慧遠의 학설을 계승 발전시킨 추세를 보이고 있다. 이는 현장의 견해를 계승하여 이를 비판한 경흥·원측 등의 유식계 정토교학과 대비되며 신라 정토교학의 주류를 이루었다.

 원효는 모든 사람의 성불 가능성을 확대하는 불성론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중생이 미혹하여 자신의 성불 가능성을 믿지 않으므로 불보살의 도움을 빌어야 한다고 하였다. 정토에 왕생하는 正因으로서의 發菩提心이 중요하지만 助因으로서 공덕과 염불을 들어 아미타불에 대한 믿음과 아미타불의 본원력에 의해 왕생하여 성불할 수 있음을 제시한 것이다.1108)金英美, 앞의 책, 94∼103·282∼293쪽.

 위의 표의 저술에 보이는 신라 정토교학의 주된 관심은≪무량수경≫의 分科, 48원의 願名, 왕생방법으로서의 十念의 내용, 왕생 인연의 제한, 미타와 미륵정토의 우열 문제 등이었다.1109)安啓賢,<新羅淨土敎學의 諸問題>(≪崇山朴吉眞博士華甲紀念 韓國佛敎思想史≫, 1975;≪新羅淨土思想史硏究≫, 玄音社, 1987, 332∼366쪽).

 먼저≪무량수경≫의 分科에 대해 의적은 혜원의 견해를 그대로 따르고 있는데 비해 경흥은 序正宗分 구분에서에 차이를 보이고, 법위와 현일은 十科로 구분하여 서로 다른 관점을 보였다.

 아미타불이 부처가 되기 전인 法藏比丘 때 세운 중생 극락왕생의 本願인 48원에 대해서는 이를 묶어 분류하는 데 차이가 있으며 특히 18·19·20원을 중요시하는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각 원에 願名을 붙이는 것도 신라에서 시도한 특징이다.

 十念이란≪무량수경≫의 제18원과 上輩門에서 乃至十念을 설하고,≪관무량수경≫의 하품하생자의 왕생에 具足十念을 설한 데에 근거를 두고 있는데 그 구체적인 내용은 경전에서 말하고 있지 않다. 이에 따라 그 십념의 내용을 살펴보는 것이 교학상의 큰 비중을 차지하는 논쟁점이었다.

 원효는≪무량수경≫의 십념을 隱密(미륵소문경)과 顯了의 둘로 나누었다. 현료의 십념은 누구나 실천하기 쉬운 것으로서 소리내어 나무아미타불을 지성스럽게 계속 칭불하는 것이며, 은밀의 십념은≪彌勒發問經≫에서 설하는 것처럼 보살 十地의 초지인 환희지 이상의 보살이 아니면 실천하기가 매우 어려운 열 가지의 것을 말한다. 원효는≪관무량수경≫의 십념은 稱念인 현료의 십념이고≪무량수경≫의 십념은 현료의 십념과 함께 은밀의 십념도 갖춘 것이라고 보았다.

 법위는 원효의 분류를 계승하여≪彌勒所問經≫에 의한 십법과 口稱에 의한 일법의 두 가지 십념으로 나누고≪무량수경≫의 것은 십법의,≪관무량수경≫의 것은 일법의 십념이라고 보아 두 십념을 서로 별개의 것으로 파악하였다. 이에 대해 경흥은≪무량수경≫의 십념도≪관무량수경≫의 십념처럼 구칭의 십념이라고 하여 새로운 견해를 폈다. 이에 다시 의적은 기왕의 견해를 절충시켜 一聲稱佛하는 시간을 일념으로 보고 십념은 오로지 이 일념을 10회 반복하는 것으로 해석하며, 이 칭불에≪미륵발문경≫의 십념도 자연히 갖추어지게 된다는 견해를 제시하였다.

 이처럼 십념론을 전개하는데 미륵경전과 관련지은 것은 신라 정토교학에서만 보이는 한 특색이다. 이는 미타상과 미륵상을 나란히 신앙하던 것과 짝하는 신라 정토신앙의 특징인 것이다. 그리고 십념을 칭명으로 이해한 것은 지식 기반이 없는 범부의 왕생 가능성을 강조한 것으로 중생의 평등성을 의식한 것이었고, 이러한 인식이 기층민들이 적극적으로 미타신앙을 수용할 수 있도록 하였던 것이다.

 왕생인연 논란은 聲聞과 五逆 그리고 정법을 비방한 자의 왕생을 허용하는가 그렇지 않은가의 문제이다. 원효는 극락정토에 갈 수 있는 자격을 十住의 처음인 初發心住의 경지에 들어선 중생이 갈 수 있는 것으로 보고 不定性二乘은 수행에 따라 정성이승으로 굳어질 수도 있으나 정성보살로 될 수도 있는 유동적인 존재여서 왕생의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定性성문과 定性연각의 定性二乘만이 왕생할 수 없다고 보았다. 원효는 여기서 나아가 정성이승도 불의 본원력에 의해 왕생할 수 있다고 하여 왕생의 길을 터놓았다.

 이에 비해 경흥은 정성이승의 열반을 부정하여 중생이 선천적으로 갖춘 자질에 따라 정성보살·정성연각·정성성문·부정종성·무종성의 오성은 성불할 수 없다는 유식가의 전통적인 五性各別說을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왕생할 수 있는 正定聚에 대해서도 원효와 경흥은 초발심주로 보았으나 현일은 이보다 더 낮추어 十信으로 보아, 중국의 혜원이 十行으로 본 것보다 훨씬 낮은 단계로 설정함으로써 왕생자의 문을 크게 열어놓았다.

 가장 극심한 잘못인 五逆을 범한 자나 正法을 비방한 악인이 왕생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관한 문제는 경전에서도≪무량수경≫은 왕생을 거부하였으나≪관무량수경≫은 왕생할 수 있다고 하고 있어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이에 대해 원효나 현일·의적은 모두 참회에 중점을 두어 참회할 줄 알면 왕생할 수 있다고 보았다.

 다음에 미타정토와 미륵정토의 우열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었다. 원효는 미타정토인 극락이 우월하다는 것을 14가지에 걸쳐 설명하고, 극락정토에 왕생하기가 쉽다는 것을 7가지로 설명하였다. 이에 대해 경흥은 미륵정토인 도솔천도 극락처럼 일념 내지 십념의 칭불로 왕생할 수 있으며 미륵도 미타의 48본원처럼 十善의 본원이 있다고 하여 미륵정토가 미타정토에 못지 않음을 강조하였다.1110)安啓賢, 앞의 책(1987), 364∼366쪽.

 이와 같은 왕성한 교학을 바탕으로 미타신앙은 평민·노비로부터 귀족에 이르기까지 신라사회 전반에 걸쳐 폭넓게 전개되었다.≪삼국유사≫에 보이는 신앙사례를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신앙 형태 신앙 주체 신앙자 신분 연 대
미타 廣德·嚴莊 왕생 기층민 문무왕
布川山 五比丘 왕생 승려 경덕왕
郁面婢 念佛 왕생 노비/진골 경덕왕
避里寺 念佛師 염불 승려 성덕왕
包山 二聖 왕생 (기층민) 미상
미타/관음 浮石寺/洛山 觀音 귀족(義相) 문무왕
仁容寺 관음도량→미타도량 진골(金仁問) 문무왕/효소왕
미타/미륵 甘山寺 미타/미륵 조상 6두품(金志誠) 성덕왕
白月山 二聖 성도 (기층민) 성덕왕∼경덕왕
月明師 祭亡妹歌 승려(國仙徒) 경덕왕
사방불 掘佛寺 四方佛 (국왕) 경덕왕

<표 2>≪삼국유사≫소재 신라 미타신앙 사례

 여기서 보는 것처럼 계층의 구분없이 전 사회에 고루 수용된 미타신앙은 국민의 일체감 조성에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 통일기의 신라사회는 전쟁을 치르고 난 뒤 그 과정에서 애쓰거나 희생된 사람들을 위로하고 새롭게 확보한 영토에 터잡아온 고구려·백제 양국의 기층민들도 포용해야 하는 큰 과제를 안고 있던 시기였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를 엮어갈 수 있는 신앙으로서 미타신앙은 더없이 적절한 것이었다. 이를 통해 얻어진 일체감은 지역간의 화해에도 중요하였지만 부석사에서 활동한 의상 제자들의 다양한 신분에서 보는 것처럼 계층간의 화해에도 의미있는 역할을 담당할 수 있었다.

 그런데 신라 중대사회의 미타신앙은 염세적인 데서 오는 내세적 경향보다 현실긍정적인 풍조가 두드러진다. 신앙내용이 사후의 극락왕생보다 현실에 극락정토를 구현하겠다는 방향으로 전개된 것이다. 극락세계의 현실화에 대한 소망은 경덕왕대에는 미타가 신라땅에서 현신 성불하였다는 신앙내용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현실긍정적인 미타신앙에 대해 국가는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다. 민생안정을 통한 왕권의 강화는 유학의 민본이념과 아미타불의 서원에 바탕한 중생구제 신앙과 잘 어울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미타신앙으로 얻어진 국민적 일체감은 사회안정에 큰 힘이 되었고 이는 강력한 왕권의 안정적인 유지에 중요한 바탕을 이루는 것이었다.1111)文明大,<景德王代의 阿彌陀造像 問題>(≪李弘稙博士回甲紀念 韓國史學論叢≫, 1969), 684∼686쪽.
金英美,<統一新羅時代 阿彌陀信仰의 歷史的 性格>(≪韓國史硏究≫50·51합집, 1985), 70∼71쪽.

 미타신앙은 중대 전 기간 동안 왕생의 難易 논쟁 등을 통해 신앙의 우위를 지켜오다가 중대말인 경덕왕대 후반기에 이르면 백월산 신앙사례나 진표의 활동에서 보듯이 미륵신앙에 위축되는 양상을 드러낸다.

 한편 일찍이 불교 수용단계부터 유행하던 藥師신앙은 중대에 들어 주술을 이용한 治病 신앙으로 유행하여 수많은 약사불상이 제작되었다. 이는 약사신앙이 사후 극락왕생의 미타신앙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질병 기근 등의 현세의 고난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생명까지 연장해 준다는 현세이익적 성격을 가진 점에서 정토신앙을 보완해준다고 인식되었기 때문이었다.1112)金惠婉,<新羅의 藥師信仰>(≪千寬宇先生還曆紀念 韓國史學論叢≫, 1985), 328∼3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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