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9권 통일신라
  • Ⅴ. 문화
  • 2. 불교철학의 확립
  • 2) 불교신앙의 일반화
  • (3) 미륵신앙

(3) 미륵신앙

 미륵신앙에는 먼 훗날 이 땅이 거의 낙토가 되어 미륵불이 세상에 내려와 중생들을 설법하여 구제할 때 참가하기를 희구하는 下生신앙과 현재 도솔천에 머무르고 있는 미륵을 믿어 그의 정토인 도솔천에 태어나기를 바라는 上生신앙의 두 가지가 있다.

 그런데 유식사상을 확립한 인도의 無着의 서원에 따라 도솔천에 머무르는 미륵이≪유가사지론≫등 유식 5부 대론을 설하였다고 하였기 때문에 인도와 중국의 유식학파나 법상종에서는 미륵신앙을 중심 신앙으로 삼아왔다. 이는 신라 법상종에서도 마찬가지여서 미륵신앙은 법상종에서 두드러진 신앙 사례를 보였다. 중고기의 미륵신앙이 미래불로서의 미륵에 대한 신앙이었던 데 비해 중대의 미륵신앙은 도솔정토에 상생하고자 하는 상생신앙이 주 내용을 이루었다.1117)金南允,<新羅 彌勒信仰의 전개와 성격>(≪역사연구≫2, 역사학연구소, 1993), 21∼25쪽.

 상생신앙은 미륵의 相好를 만들거나 미륵의 名號를 부르는 염불 그리고 오계와 팔계 구족계 十善法을 갖추어 지키는 것을 그 내용으로 한다. 비록 번뇌는 완전히 끊지 못해 해탈에 이르지는 못하였다 해도 지극한 마음을 가지면 신통을 얻고 미륵의 형상을 염불 칭명하면 도솔천에 상생할 수 있으며, 계를 범하거나 악행을 저질렀더라도 미륵의 명호를 듣고 참회하면 청정해질 수 있다고 한다. 미타신앙에 비해 자력적인 미륵상생신앙을 갖기 위해서는 승려라든가 귀족 이상의 수행능력이 있는 경우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미륵상생신앙을 믿고 그렇지 못한 기층민들은 미타신앙을 신봉하는 추세를 보였을 것이다. 그로 인해 법상종 사원에서는 미륵과 미타 두 가지 신앙을 함께 수용하여 미륵은 금당에 주존으로 봉안하고 강당에 미타를 봉안하는 양립적인 신앙구조를 보이게 된다.

 法相宗에서는 무착이 도솔천에 상주하는 미륵보살의 가르침에 의해 도솔천에 상천하여 친견하고 대승교의를 받아≪유가사지론≫등을 역출하였다고 하여,≪유가사지론≫을 소의로 하는 유식논사들은 도솔천에 상생하여 미륵보살을 친견하겠다는 미륵상생 신앙을 추구하게 된다.

 미륵삼부경으로 불리는≪上生經≫·≪成佛經≫·≪下生經≫의 경전에 대해 원측·원효·경흥·의적·태현 등이 주석을 베풀어, 중대 미륵신앙은 이들 미륵정토교학에 입각한 실천 수행이 주 내용을 이루었다. 미륵정토에 대한 견해는 신문왕대에 國老로 활동한 경흥에게서 볼 수 있는데, 경흥은 원효의 미타정토 우월론에 대해 미륵정토도 그에 못지 않음을 강조하였다.1118)安啓賢,<新羅僧 憬興의 彌勒淨土往生思想>(≪震檀學報≫25·26·27합집, 1964; 앞의 책, 1987).

 구체적으로 미륵이 하생하여 龍華三會 설법으로 구제하는 대상을 원효는 소승 阿羅漢이라 하였는데 경흥은 대소승 제자로 확대 해석하였다. 또 원효가≪상생경≫이 대승이고≪하생경≫과≪성불경≫은 소승으로 본 데 비해 경흥은 미륵삼부경이 모두 대소승에 해당한다고 보아 미륵신앙의 대상을 넓혀 놓았다. 대신에 미타신앙에 대해서는 원효가 모든 중생의 성불을 인정하여 범부를 위한 견해를 분명히 한 데 비해 경흥은 定性이승의 성불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원효가 미타의 극락이 미륵의 도솔천보다 왕생하기 쉽고 더 뛰어나다고 하였는데 경흥은 미륵신앙도 그에 못지 않다고 주장하였다.1119)安啓賢,<元曉의 彌陀淨土往生思想>·<元曉의 彌勒淨土往生思想>·<憬興의 彌陀淨土往生思想>·<憬興의 彌勒淨土往生思想>(위의 책).

 신라의 미륵신앙 사례는 여러 가지 양상을 보였다. 太賢은 남산 茸長寺에 머무르며 항상 석조미륵장육상을 돌며 예배하였다. 경덕왕을 위해 안민가를 지어 왕과 신·민의 신분질서를 강조한 忠談은 남산 三花嶺의 미륵세존에게 매년 重三·重九日에 차를 공양하였다. 이들은 도솔정토의 미륵에 대한 신앙을 보여준 것이다.

 金志誠은 돌아간 부모를 위하여 甘山寺에 미륵보살상(719)과 아미타불상(720)을 조성하였다. 김지성이 생전에 조성한 감산사 미륵상은 돌아간 부모 외에 국왕과 개원 이찬 및 형제·자매·처·승려 등 생존자들이 공양자의 주류를 이루고 있으나, 사후에 조성한 아미타불은 국왕과 개원 이찬 그리고 후처 이외에는 망부모·망제·망매·전처 등 사망자들이 중심을 이루어 대조를 보인다. 이는 미륵상생신앙이 미타신앙에 비해 현세적인 것으로 수용되었던 것을 말해준다.

 白月山에는 努肹夫得과 怛怛朴朴 두 수도자가 있었는데 성덕왕 8년(709)에 現身 成道하여 경덕왕 16년(757)에 남사를 창건하고 23년에 미륵과 미타상을 조성하였다. 月明은 죽은 누이를 위해 향가를 지어 미타정토에 왕생할 것을 기원하였는데, 경덕왕 19년에 해가 둘로 나타나자 兜率歌를 지어 도솔천의 미륵보살에게 기원하여 이변을 해결하였다.1120)金煐泰,<新羅 白月山 二聖 說話의 硏究>(≪趙明基博士華甲記念 佛敎史學論叢≫, 1965;앞의 책, 1987, 530∼531쪽).

 김지성과 백월산의 두 수도자 및 월명의 신앙은 모두 미륵과 미타가 연관된 신앙 내용을 보여주며 시기적으로 경덕왕 일대에 집중된 것이 특이하다. 이로 보면 중대 법상종계 미륵상생신앙은 미타신앙과 깊이 연관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1121)金惠婉,<新羅中代의 彌勒信仰>(≪溪村閔丙河敎授停年紀念 史學論叢≫, 1988), 37∼38쪽.

 백월산 남사의 관음이 부득이 현신성도하고 미륵정토로 왕생하는데 선도적 역할을 맡는 것은 미륵상생신앙과 관음신앙이 연결된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眞表가≪占察經≫에 의거하여 말법중생이 여러 장애에 부딛혀 決定信을 얻지 못하고 수학에 전념하지 못할 때 宿世의 선악과 현재의 苦樂 吉凶을 점찰하여 마음을 깨우치고 의심나는 것을 결정할 수 있게 한다고 선도하였던 占察信仰은 미륵상생신앙과 지장신앙이 연결된 것을 보여준다. 말법시대에 모든 중생을 구제하는 서원을 세운 지장보살은 無佛의 시대에 석가와 미륵을 이어주는 의미를 지니므로 쉽게 법상종에 수용될 수 있었을 것이다. 진표는 이 지장보살의 교화를 받는 방편으로 점찰계행에 의한 참회법을 내세우고 이것이 도솔천에 왕생하는 지름길이라고 여겨 점찰신앙을 선도하였다.

 경덕왕대에 집중적으로 보이는 미륵상생신앙은 강력한 중대 왕권의 몰락과 함께 쇠퇴하고 말았다. 다만 진표가 주도하던 미륵상생신앙만이 점찰법을 근간으로 지방 사회에서 명맥을 계승해가 고려로 연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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