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9권 통일신라
  • Ⅴ. 문화
  • 3. 과학과 기술의 발달
  • 1) 하늘의 과학
  • (2) 천문도의 도입과 천문기관의 발달

(2) 천문도의 도입과 천문기관의 발달

 이 땅에 최초로 天文圖가 전해진 것은 효소왕 원년(692) 중국에서 돌아온 道證에 의해서였다.1143)≪三國史記≫권 8, 新羅本紀 8, 효소왕 원년 8월. 당나라에서 돌아온 도증은 천문도를 가져다가 임금에게 바쳤다고만 되어 있어서, 그 이상의 내용을 알 수는 없다. 하지만 고구려의 角抵塚이나 舞踊塚 벽화에서 볼 수 있는 몇 개 되지 않는 별들을 그려 놓은 경우와는 달리 이 천문도는 보다 본격적인 천문도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도증이 중국에서 귀국할 때 가져왔다고 기록된 이 ‘천문도’는 간단한 ‘그림’을 말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당시 이미 중국에서는 본격적인 천문도가 제작되어 퍼지고 있었기 때문에 도증이 가져온 천문도란 바로 이런 것을 가리킨 것이라 할 수 있다.

 조선초에 조선학자들에 의해 제작된 천문도<天象列次分野之圖>는 돌에 새겨진 것이 지금까지 남아 있고, 그 후에도 여러 차례 수많은 그림으로 복사되어 국내에 퍼졌음이 확인되어 있다. 그런데 바로 이 천문도에는 1,467개의 별들이 그려져 있고, 이름도 기록되어 있는데, 그 설명문 가운데에는 고구려 때에 이런 천문도가 이미 있었음이 밝혀져 있다. 그것이 전란중에 대동강에 빠져 없어지고, 그 탁본을 보관했던 사람이 이를 태조에게 바쳐 그것을 기초로 연구를 계속해서<천상열차분야지도>을 제작했다고 쓰여 있는 것이다. 조선초 학자 權近의 跋文에 보이는 이런 내용을 그대로 믿을 수 있다면, 고구려에도 이미 1,400여 개의 별을 표시한 천문도가 있었음을 뜻한다. 그보다는 늦은 시기의 통일신라가 당에서 얻어 온 천문도 역시 그런 수준의 것이었을 것은 확실하게 되는 셈이다.

 당시 천문기록들에 보이는 28수와 행성들의 이름 등등은 당시 천문학 지식이 중국에서 확립된 그것을 상당히 소화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런 높은 수준의 천문학 지식을 바탕으로 신라에는 본격적인 천문 담당기관도 태어났다. 문헌에 드러난 것으로는 성덕왕 17년(718) 6월에 처음 물시계(漏刻)를 만들었고, 역시 같은 시기에 漏刻典이란 관청을 둔 것으로 되어 있다. 여기에는 博士가 6명, 史가 1명 배치되었다. 또 천문박사라는 자리가 있었는데, 뒤에는 그 이름을 司天博士로 고친 일도 있다고≪삼국사기≫에는 적혀 있다. 또 같은 책의 다른 곳에는 경덕왕 8년(749)에 천문박사 1명과 누각박사 6명을 두었다는 기록도 보인다.1144)≪三國史記≫권 8, 新羅本紀 8, 성덕왕 17년 6월·권 9, 新羅本紀 9, 경덕왕 8년 3월·권 38, 志 7, 職官 上, 漏刻典·권 39 志 8, 職官 中, 天文博士. 그런가 하면 같은≪삼국사기≫다른 곳에는 金庾信의 후손인 金巖이 중국에 유학하여 당시의 첨단학문을 배우고 귀국하여 司天大博士가 되었다는 기록도 보인다.1145)≪三國史記≫권 43, 列傳 3, 金庾信 下. 이것이 사천박사를 가리킨 것인지, 또는 다른 더 높은 존칭으로 만든 새 칭호인지는 알 길이 없다. 이 기록은 약간의 잘못이 들어 있는 채 후세에 전해져 오늘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일본(757년) 신라(749년)
천문박사 2 1 1
曆 박 사 1 1 0
누각박사 6 2 6
음양박사 2 1 0
박사총수 11 5 7

<표>신라·당·일본의 박사수

 거의 같은 시기에 중국과 일본에도 천문관서가 있었는데, 이들 두 나라의 경우 각각의 천문관청에 소속된 박사의 숫자는 우리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1146)당나라와 일본의 경우는 中山茂,≪日本の天文學≫(岩波新書, 1972) 8∼9쪽. 이 자료에 의하면 일본의 경우는 이 기관 이름이 陰陽寮, 중국 당대의 기구는 太史局과 太卜署로 되어 있고, 일본의 4개 분야 박사 수는<표>와 같지만, 당대의 천문박사와 역박사의 숫자는 분명하지는 않다. 그러나<표>보다는 더 많아 보이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당대 중국의 경우 누각박사가 6명, 복박사가 2명으로는 밝혀져 있지만, 이 분야 역시 그 수준의 전문가 수가 더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표>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당시 천문기관의 박사 총수는 당 나라가 11명, 일본이 5명, 신라가 7명으로 대체로 이상한 구석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일본에 있는 역박사와 음양박사가 신라에는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은 이상하고, 일본에는 단 2명뿐인 누각박사가 신라에는 6명이나 된다고 기록한 것도 잘못된 것으로 보인다. 신라의 박사 총수 7명은 그대로 맞는다고 치더라도, 적어도 역박사와 음양박사가 1명씩은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위<표>에서 신라의 경우 1-0-6-0이라고 되어 있는 박사의 숫자는 1/2-1-3/4-1/2 정도로 되어 있었다고 생각된다. 또 신라의 천문기관이 漏刻典이란 이름으로 8세기초에서야 처음 문을 열었다는≪삼국사기≫기록 또한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분명히 삼국에는 모두 천문역산과 시계를 담당하는 관리가 통일 이전부터 있었고, 그 기관이 성덕왕 17년(718)에 누각전이란 이름으로 다시 구성되었다고 할 수가 있다.

 여하튼 통일신라 때에는 천문관련 기구가 정식으로 누각전이란 이름을 가지고 활동하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중국의 당대에 그것이 太史局과 太卜署의 두 기관으로 나뉘어 운영된 것과 일본이 천문기관으로 陰陽寮란 이름의 것을 가지고 있었던 것과는 대조가 된다.1147)음양료에 대해서는 中山茂, 위의 책, 6∼16쪽. 통일신라의 천문기관으로 누각전만이 있었던가 또는 다른 기관도 있었던가는 확인할 길이 없다. 일본의 경우는 당시의 이 관청의 구성이 비교적 잘 알려져 있어서 중국과는 다른 이름으로 비슷한 일을 담당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신라의 경우에는 누각전이란 이름은 너무 분명하게 물시계만을 담당하는 기관처럼 보이기 때문에, 그 밖의 중요한 천문 관련 업무를 담당한 기관이 없었을까 의아스럽게 만드는 것이 사실이다. 게다가 누각전의 업무에 관한 기록도 전혀 없기 때문에 앞으로도 이 의문은 풀리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첨성대는 그 모양을 불교의 성산인 수미산에서 따왔을 것으로 본다.≪일본서기≫에 의하면 일본에서는 須彌山像을 推古天皇 20년(612)·齊明天皇 3년(657)·5년, 그리고 제명천황 6년 5월에도 만들었다는 여러 차례의 기록이 보인다. 그리고 이렇게 수미산의 모양을 상상해 세우던 산 모양을 기초로 天武天皇 4년(676)에는 일본에도 占星臺란 것을 만들었다고 되어 있다. 일본의 점성대가 천문·시계 등의 담당기관의 발전과 함께 세워진 것처럼 신라의 첨성대도 신라의 천문기관의 일부로 시작되어 통일 이후 첨성대를 중심으로 신라의 천문역산 및 시간측정 등의 활동이 전개되었을 것으로 보인다.1148)첨성대가 그 모양을 불교의 성산인 수미산에서 따왔을 것이라는 주장은 이미 李龍範이 제기한 일이 있다(李龍範,≪韓國科學思想史硏究≫, 東國大出版部, 1993, 1∼69쪽). 필자는 그의 주장에 동조하면서 다만 첨성대의 역활은 종교적인 것만은 아니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朴星來,≪韓國科學史≫, 한국방송사업단, 1982, 52∼53쪽). 일본에서의 수미산상 건설과 점성대 건설에 대해서는≪日本書紀≫권 29, 天武 4년 정월 庚戌(5일)에 처음으로 占星臺를 세웠다는 기록이 보이고, 그에 앞서 위와 같이 여러 차례 須彌山像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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