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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역법과 연호

 시계가 하루 동안의 시각을 재는 것과 달리 날자 가는 것을 재는 장치로는 달력이 있고, 또 더 길게는 해수가 바뀌면 그 순서를 어떻게 따지는가 하는 문제가 있다. 이렇게 긴 시간을 재거나 나타내는 방법으로는 물론 曆法과 年號의 문제가 있다.

 삼국통일 이전에 어떤 역법으로 날짜 가는 것을 따지고 있었던가는 역시 분명히 밝혀져 있지 않다. 예를 들면 삼국시대의 역사를 밝혀주는 가장 중요한 역사책≪삼국사기≫에는 수많은 기록이 남아 있지만, 이들 연대기적 기록은 거의가 날자는 밝히지 않은 채 어느 해 봄, 또는 여름 등 계절만 밝혔거나, 또는 그 사건이 일어났던 달만이 밝혀져 있다. 날자가 밝혀진 경우란 대개 일식이 일어난 경우뿐이다. 일식은 원래 초하루에 일어나게 되어 있으니까 당연한 일이라면 당연하다. 이런 사정으로 볼 때 특히 6세기초까지의 신라는 아직 역법을 제대로 사용할 줄 몰랐던 것으로 보인다.

 일식기사를 제외하면≪삼국사기≫에서 날자가 밝혀진 첫 기사는 逸聖王 10년(143) 6월 乙丑일에 熒惑이 鎭星을 범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1154)≪三國史記≫권 1, 新羅本紀 1, 일성 10년 6월 을축. 또 한 가지 아주 예외적으로 날자가 밝혀진 초기기록으로는 신라 沾解王의 죽음에 관한 기록으로 정확한 날자까지 밝혀져 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삼국사기≫에 의하면 그는 재위 15년(261) 12월 28일 暴死했다.1155)≪三國史記≫권 2, 新羅本紀 2, 첨해니사금 15년 12월 28일. 그 후에는 慈悲王이 재위 22년(479) 2월 3일에 죽었다고 날자를 밝혀 놓은 기록이 남아 있다. 그 후에도 眞智王 4년(578)과 善德王 16년(647)에도 왕의 죽은 날짜가 각기 7월 17일과 정월 8일이라 밝혀져 있지만, 이 몇 가지 경우 이외에는 모두 어느 달에 죽었다고만 기록되어 남아 있다.

 당시 사람들도 이미 날자를 따져가며 살았을 것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어떤 계산법에 의해 날자를 따졌던가가 분명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앞으로 일식기록과 그 밖에 남아 있는 몇 가지 날짜 밝혀진 경우를 당시 중국의 역법과 대비하여 연구하면 혹시 당시 중국의 어느 역법을 기준으로 사용했던가를 짐작할 수는 있을 것으로 보인다. 정식으로 역법이 들어온 기록은 통일 직후인 문무왕 14년(674)에 보인다. 당나라에 갔던 대나마 德福이 역술을 배우고 귀국했으며, 이 때 새 역법을 썼다는 기록이 그것이다.1156)≪三國史記≫권 7, 新羅本紀 7, 문무왕 14년 정월.

 좀 더 긴 시간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어떤 방식으로든지 연호를 쓰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가장 간단한 방식은 당시 임금의 통치가 올해 몇년 째인가를 따지는 정도로 충분했을지 모른다. 그런 방식이 좀더 세련되어 중국에서는 연호라는 것이 발달했고, 삼국도 이를 흉내내어 고구려·백제·신라가 각기 고유 연호를 사용한 흔적이 남아 있다. 특히 신라는 통일 직전 한참동안 고유 연호시대를 가지고 있다.1157)朴星來,<高麗初의 曆과 年號>(≪韓國學報≫10, 1978), 135∼155쪽. 法興王 23년(536)에 정식으로 建元하고 건원을 연호로 쓰기 시작하여 진덕여왕 때까지 開國·大昌·鴻濟·建福·建興·仁平·太和 등의 여러 연호를 썼던 것이다. 그러다가 신라사신이 중국에 가서 당태종과의 담판 끝에 고유 연호를 포기하고 중국의 正朔을 받아 쓰기 시작한 것이 眞德王 4년(650)부터의 일이라 밝혀져 있다.1158)≪三國史記≫권 5, 新羅本紀 5, 진덕왕 4년.

 통일 이전에는 역법에 혼란이 있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에는 중국에서 정삭을 받아 와 그대로 실시하여 그 후 줄곳 중국역법을 그대로 준용했던 것을 짐작하게 한다. 그 정도는 孝昭王(695) 새해의 시작을 子月로 바꿨다가 5년 뒤인 효소왕 9년에는 다시 寅月로 돌아갔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중국에서 당시 정권을 잡았던 則天武后의 역법을 따라 고쳤던 것으로 밝혀져 있다.1159)≪三國史記≫권 8, 新羅本紀 8, 효소왕 4년·9년.

 지금은 사라진 신라말의≪新羅年代曆≫이란 자료에 대해서 역법인 것으로 해석하고 있기도 하지만.1160)≪新羅年代曆≫이란 자료에 대해서는 중국과학사의 대가 조셉 니덤이 역법인 것으로 해석하고 있는데, 그것은 원래 이를 소개한 트롤로프의 논문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역서가 아닌 것 같다(Joseph Needham, Science & Civilization in China, Vol III, 19, p.683. M. N Trollope, Korean Books and their Authors, Transactions of the Royal Asiatic Society, Korea Branch, 21, 1932, pp.1∼59). 이는 역서가 아닌 것 같다.≪삼국사기≫와≪增補文獻備考≫에 모두 역사책인 것처럼 기록된 것을 보더라도 이것이 역법이 아닌 것을 알 수가 있다.1161)≪新羅年代曆≫에 대해≪增補文獻備考≫권 244, 藝文考 3에는 이 책을 역사서 가운데 분류해 놓고, 지은이만 崔致遠으로 밝혀 두고, 그 책 내용이나 구성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고 쓰여 있다. 그러나≪三國史記≫권 4, 新羅本紀 4, 지증왕조에는 최치원의≪帝王年代曆≫이 신라 임금을 모두 무슨 왕이라 부르고, 거서간등의 칭호를 말하지 않았다고 지적하고 있다. 金富軾은 이런 태도는 이 표현이 비속하여 쓰지 않았으나, 신라역사를 쓰면서 신라 방언을 그대로 남기는 것이 좋다고 주장하며 居西干·次次雄·尼師今·麻立干 등의 임금 칭호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이 시기 동안에는 아직 통일신라는 독자적인 역 계산 수준에 이르지는 못했을 것으로 보인다. 중국에서 얻어 온 역을 해마다 적당히 바꿔 사용하면서 중국의 것을 계속해 참고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일본의 기록에 의하면 신라 통일 직전인 推古天皇 10년(602)에 백제의 승려 觀勒은 曆本과 천문지리서, 그리고 遁甲方術書를 가지고 일본에 건너갔다. 그리고 智通 4년(690) 11월 갑술(11일)에는 칙명을 받들어 일본은 元嘉曆과 儀鳳曆을 시행하였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중국역법을 그대로 사용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라나 일본이나 역법을 독자적 수준으로까지 끌어올리지는 못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1162)≪日本書紀≫권 22, 推古 10년 10월·권 30, 智通 4년 11월 갑술(11일). 원가력은 424∼453년, 그리고 의봉력은 676∼678년 사이 중국에서 사용된 역법으로 의봉력은 인덕력(664∼665)과 같다고 밝혀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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