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9권 통일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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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 과학과 기술의 발달
  • 2) 땅의 과학과 기술
  • (1) 풍수지리와 지리학

(1) 풍수지리와 지리학

 한국역사상의 풍수지리설은 신라말의 道詵(827∼898)에서 비롯한다고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왕건의 고려건국을 예언하고 고려왕조의 융성을 위한 풍수지리상의 예언을 미리 해준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고려 태조가 그의<訓要十條>에서 도선의 권위를 이용하여 국토의 길흉에 대해 말한 이후 도선은 고려 전기 동안에 점점 위대한 풍수지리사상가로 높임을 받게 된다. 그 후에도 그의 秘記라 알려진 책들이 발견되어 더욱 그의 위광을 드높이게 된다.

 하지만 풍수지리가 꼭 도선에서 비롯한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통일 이전에도 이미 삼국시대 지식인들 사이에는 풍수지리적 사고가 드러나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세 나라를 건국하면서 도읍을 골랐다는 기록은 풍수지리적인 관점이 아주 초기부터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또 예를 들면 신라의 4대 임금 脫解王은 삼국시대 초기에 이미 풍수지리에 통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三國史記≫에 의하면 그는 학문에 전력하여 지리에 통하게 되었는데, 양산 아래 瓠公의 집터를 보니 吉地이므로 꼬임수를 써서 그곳을 빼앗아 살았다는 것이다.1166)≪三國史記≫권 1, 新羅本紀 1, 脫解尼師今. 그 자리가 뒤에 월성이 되고, 그 덕에 그는 뒤에 임금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음을 암시하는 기사인 것으로 보인다. 여하튼 삼국시대 초기부터 풍수지리사상이 발달하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물론 이 시기에 이미 중국에서 발달하고 있었던 풍수지리가 신라에 들어 왔던 것은 아닐지 모른다. 그래서 풍수지리설이 8세기에 중국에서 도입된다고 보고, 그 중요한 증거로 崔致遠의 崇福寺 비문을 드는 수도 있다.1167)李基白,<한국 風水地理說의 기원>(≪韓國史 市民講座≫14, 一潮閣, 1994), 7∼8쪽.

 그러나 풍수지리가 반드시 중국의 발전된 형태로 들어 왔을 때에만 인정될 이유는 없다. 소박한 형태나마 삼국시대 초기에 있던 相地사상은 모두 원초적인 풍수지리설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들이 신라 통일 이후에는 중국의 영향을 받아 보다 세련되는 과정을 거친 것으로 보인다. 그 때문에 도선이라는 신라 말기의 승려가 그 대표적 인물로 기록되어 전하고, 또 그가 중국을 다녀온 것처럼 전하는 전설도 생겼을 것이다. 물론 도선이 태어나기 전에 이미 죽었던 중국 당나라의 승려이며 과학자인 一行을 찾아가 풍수지리 등을 배우고 돌아왔다는 말은 더구나 그릇된 전설이다. 그러나 이런 전설은 통일신라 말기에서야 전통적인 지리사상이 중국의 것과 적응되어 가고 있었다는 사정을 전하는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통일신라 때에 풍수지리학은 상당한 기반을 얻고, 그 후 우리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고 할 수 있다.

 통일신라 시기에도 지도가 제작 사용되었을 것이나, 그 증거는 남아 있지 않다.≪삼국사기≫지리지는 고려 때인 仁宗 23년(1145) 편찬된 것인데, 한국 국토에 대해 상당히 자세한 정보를 남기고 있다. 통일신라기에 남아 있던 각종 地誌를 토대로 했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이들 당시의 지지 역시 남아 있는 것은 없다. 외국에 대한 지식도 어느 정도 가지기 시작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지만, 역시 자세한 내용을 알기는 어렵다. 다만 慧超의≪往五天竺國傳≫(727) 일부가 남아 있어서 신라의 승려가 8세기에 인도와 서남아시아 또는 중앙아시아 지역을 여행하여 그곳에 대한 지식을 얻고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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