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9권 통일신라
  • Ⅴ. 문화
  • 3. 과학과 기술의 발달
  • 2) 땅의 과학과 기술
  • (2) 농업기술과 생물 지식

(2) 농업기술과 생물 지식

 역사와 함께 통일신라 시기에는 이미 많은 농업발달과 함께 그에 따르는 생물 지식도 상당 수준으로 올라 갔을 것을 예상할 수 있다. 삼국시대에 벼농사는 이미 발달되어 있었고, 저수지를 대규모로 만들어 관개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알려져 있다. 우리 나라에서 만들어 사용하게 된 논을 나타내는 한자畓이란 글자는 진흥왕 7년(551) 세워진 眞興王巡狩碑에 처음 나타난다. 벼 농사가 상당히 수준에 올라 있었다는 사실을 방증해 준다. 嘉禾나 瑞芝의 기록 역시 비슷한 역사적 사실을 보여주며, 이는 아울러 당시의 식물 지식 일부를 나타낸다. 또 智證王 3년(502) 3월 신라에서는 처음으로 소를 써서 밭을 갈았다고 되어 있다.1168)≪三國史記≫권 4, 新羅本紀 4, 지증마립간 3년. 가축의 종류와 이용은 그 밖에도 여러 가지가 남아 있고, 蝗蟲이나 그 밖의 여러 가지 동물에 대한 기록들도 당시의 동물 지식을 보여준다.

 예를 들면 聖德王 22년(723)에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果下馬·牛黃·인삼 그리고 몇 가지 비단과 수달피를 진상했다.1169)≪三國史記≫권 8, 新羅本紀 8, 성덕왕 22년. 신라에서 만든 비단을 중국에 보낸 것을 보아서도 신라가 양잠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고, 이는 또한 누에라는 곤충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또 낙타·앵무·공작도 수입된 일이 있다.1170)李德鳳,<韓國生物學史>(≪韓國文化史大系≫3, 高麗大, 1968), 316쪽. 雁鴨池와 臨海殿에는 수많은 기화요초가 있었을 것도 분명하다. 백제에도 정원을 만들어 기화요초를 길렀다는 기록이 있고, 백제가 일본에 정원기술을 전해 준 것이 일본기록에 보인다.1171)≪三國史記≫권 25, 百濟本紀 3, 辰斯王 7년·권 26, 百濟本紀 4, 동성왕 22년. 대궐 동쪽에 臨流閣 짓고 못을 파고 진귀한 새를 기름, 일본에 정원기술을 전해준 기록은≪日本書紀≫권 22, 推古 20년조.

 8세기의 당나라 책≪본초습유≫에는 “신라인은 허리에 새끼줄을 매고 바닷속에 잠수하여 깊은 바다 속의 대엽조를 채취한다”고 쓰여 있다. 바다에서 물고기만을 잡은 것이 아니라 해초류도 식품으로 쓰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다만 이런 기록은 통일 이전에 이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1172)朴九秉,<韓國漁業技術史>(≪韓國文化史大系≫3), 92∼92쪽.
韓致奫,≪海東繹史≫권 26, 物産志에서 인용함.
또 643년에는 백제의 태자가 일본에서 벌통 4개를 산에 놓아 벌을 기르다가 실패했다는 기록이 보인다.1173)≪日本書紀≫권 24, 皇極 2년. 비슷한 시기이니 만큼 신라에서도 통일시대쯤에는 양봉기술도 시작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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