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9권 통일신라
  • Ⅴ. 문화
  • 3. 과학과 기술의 발달
  • 3) 사람의 과학과 기술
  • (5) 탑과 건축

(5) 탑과 건축

 통일신라 시기의 기술적 성과 가운데 비교적 많이 남아 전해지는 것은 탑과 사찰 등 건축물이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황룡사 구층탑은 당시 가장 큰 탑으로 지어졌던 것을 알 수 있다. 1976년부터 발굴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이 절은 2만 평의 부지 한가운데 상당히 높은 9층탑을 세웠었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그 탑을 세웠던 주춧돌 84개와 한가운데 심초석이 발견되어 있다. 이 주춧돌은 가로 세로 각각 8개씩인데, 한 개의 크기가 1m쯤으로 되어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 9층탑은 통일 직전인 선덕여왕 12년∼14년(643∼645)에 세워졌다고 밝혀져 있다. 그 높이는 상륜부가 42자, 탑신 부분이 183자로서 모두 225자가 되므로 80m나 되는 아주 높은 탑이었음을 알 수 있다.1195)鄭永鎬,<皇龍寺九層塔>(≪민족문화대백과사전≫ 25,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460쪽. 그러나 당시 척도가 어떤 것이었던지에 따라 이 높이는 사실은 80m보다는 훨씬 작은 정도로 보는 것이 옳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느 경우거나 당시로서는 높은 건조물이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이 탑을 짓는 데에는 당시 신라 기술로는 부족했던 것 같다. 신라는 이를 위해 백제에서 기술자 阿非知를 초청했고, 그가 200명의 기술 일꾼을 데리고 와서 건축했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1196)≪三國遺事≫권 3, 塔像 4, 皇龍寺九層塔. 지금도 서 있는 불국사의 석가탑과 다보탑 역시 중요한 유물이지만, 기술적인 면에서는 황룡사 구층탑이 더 세우기 어려운 건조물이었을 것이다. 또 첨성대 역시 천문학적인 의미에서만이 아니라 건축물로서도 중요한 이 시기의 업적에 속할 만하다.

 여기서 당시의 걸작 건조물의 하나로 역시 지금까지 남아 있는 石窟庵을 생각해 보자. 토함산 석굴암은 경덕왕 10년(751) 불국사를 지은 金大城이 불국사와 함께 건축한 인공 석굴사원이라 기록은 전한다.1197)≪三國遺事≫권 5, 孝善 9, 大城孝二世父母. 8세기 신라의 높은 수학 내지 기하학적인 수준을 바탕으로 건조된 업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석굴암을 비롯한 여러 탑 등의 수학적 배경은 처음에 미술사 학자들의 주목을 받았던 것이 뒤에 과학사적인 평가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1198)洪以燮,≪朝鮮科學史≫, 83∼84쪽.
全相運, 앞의 책, 243∼247쪽
김용운·김용국, 앞의 책, 61∼72쪽.
南天祐,≪遺物의 再發見≫(正音社, 1987), 109∼184쪽.
하지만 이런 평가에는 상당히 주관적 해석도 있어서 조심스런 면이 없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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