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9권 통일신라
  • Ⅴ. 문화
  • 3. 과학과 기술의 발달
  • 3) 사람의 과학과 기술
  • (6) 선박 기술

(6) 선박 기술

 배를 만들고 또 이를 운행하여 황해와 남해를 넘나드는 일은 신라 사람들의 익숙한 분야가 되어 갔던 것으로 보인다. 진평왕 5년(583) 정월 신라는 船府署라는 이름의 관청을 세워 배를 만들고 이용하는 기술 관청을 두었던 것으로 밝혀져 있다. 여기에는 大監과 弟監 각 1명씩의 관리를 두고 선박 관계를 다뤘다는 것이다. 통일 후인 문무왕 18년(678)에 신라는 이 기관을 船府라 고쳐 불렀다. 여기에는 영 1명(大阿飡에서 角干), 경 2명, 대사 2명, 사지 1명, 사 8명 등 모두 14명의 관리를 두었다.1199)≪三國史記≫권 4, 新羅本紀 4, 지증마립간 6년 11월·권 38, 志 7, 職官 上.

 통일 시기에 이르러서도 신라는 아직 바다건너 먼 나라에 대해서는 별로 교류가 많지 못했고, 당연히 지식도 보잘 것이 없었다. 慧超의 인도항해는 주로 육로를 따라 갔던 것이고, 해로를 이용했다 해도 그가 신라 배를 이용했던 것은 아니었다. 또 황룡사9층탑은 각 층마다 외국을 제압하겠다는 뜻에서 9층을 세웠다고 되어 있다. 그 각 층은 일본·중국·吳越·托羅·鷹遊·말갈·丹國·女狄·예맥 등 9개 나라를 가리킨다.1200)≪三國遺事≫권 3, 塔像 4, 皇龍寺九層塔. 대개 바다 멀리 떨어진 곳은 없는 것 같아서 당시 외국에 대한 지식을 보여준다. 그리고 해양항해가 별로 없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9세기초의 張保皐사건은 이와는 대조적이다. 장보고는 중국해안에서 장교로 성공했던 신라인으로 흥덕왕 3년(828)에는 신라왕을 만나 해양을 정복할 것을 건의하여 淸海鎭을 세우고, 그 우두머리가 되어 활동했다. 莞島에 세운 청해진에서 그는 당시 황해와 남해를 주름잡으며 해적을 소탕하고, 삼국의 무역에서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당연히 당시로서는 가장 앞선 항해술과 선박기술을 가지고 있었다고 평가된다.1201)김재근,≪우리배의 역사≫(서울大 出版部, 1989), 147쪽. 그러나 구체적인 당시 선박의 모양이나 성능에 대해서는 아직 잘 연구되지 못한 상황이다.

<朴星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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