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9권 통일신라
  • Ⅴ. 문화
  • 4. 언어와 문학
  • 1) 이두와 언어
  • (3) 문법

(3) 문법

 고대국어의 문법을 보여주는 자료는 향찰과 이두가 주가 된다. 신라의 향가는 신라시대가 지난지 3세기 후인 13세기에 와서 비로소 문자화된 것이기 때문에 그 문법이 신라시대의 것을 그대로 나타내는 것이라는 보장이 없다. 이에 대한 연구가 좀더 이루어진 후에나 고대국어의 자료로 이용할 수 있으므로 여기서는 연대가 확실한 이두문을 중심으로 이 시대 언어의 모습을 살피기로 한다.1210)南豊鉉,<古代國語의 吏讀>(≪古文書硏究≫9·10, 韓國古文書學會, 1996), 참조.

 신라시대 국어의 語順은 현대국어와 같다.「주어+목적어+서술어」의 순서이고 수식어가 피수식어의 앞에 가는 어순이다. 이것은 한자를 우리말의 순서로 배열하는 이두문에서 확인된다.

 助詞는 다음과 같은 것이 쓰였다.

격조사 : 之/ㅅ 中/긔 以/로

보조조사 : 者/(/으)ㄴ 那(乃)/(이)나 /금

 ‘之/ㅅ’은 ‘經之 成內 法者/經의 이룬 法은(화엄경사경조성기)’에 쓰인 예가 하나 확인된다. 무정물체언의 속격으로 고려시대에는 叱자가 주로 쓰이고 之자가 쓰인 예는 2, 3예가 더 확인될 뿐이다.

 ‘中/긔’는 삼국시대의 이두에서부터 쓰여 오던 처격조사이다.<화엄경사경조성기>에 ‘楮根中/닥나무 뿌리에’, ‘然後中/然後에’, ‘以後中/以後에’ 등과 같이 나타난다. 고려시대에는 ‘良中/아긔(>아)’가 주로 쓰이고 구결에선 ‘衣/, 의’와 ‘衣中/의긔’도 쓰였다.

 ‘以/로’도 삼국시대부터 쓰여오던 조격조사이다. ‘法界一切衆生 皆成佛欲 爲賜以 成賜乎/법계일체중생이 皆成佛하게 하고자 하심으로 이루시었거니와(화엄경사경조성기)’, ‘娚姉妹 三人業以 成在之/娚姉妹 三人의 業으로 이루어 놓았다(갈항사석탑조성기)’와 같은 예가 나타나고 이 밖에도 그 용례가 많다. 조선조말까지의 이두에서도 사용빈도가 높은 조사이다.

 신라시대에는 주격 ‘亦/이’, 유정물체언의 속격 ‘衣/·의’, 대격 ‘乙/ㄹ’, 호격 ‘良/아·下/하’등이 나타나지 않는다. 이들은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기록에 나타나지만 그렇다고 고대국어에 없었다고 볼 수는 없다. 자료와 표기법상의 제약에 말미암아 나타나지 않은 것으로 믿어진다.

 ‘者/(/으)ㄴ’은 주제를 나타내는 보조조사이다. ‘成內 願旨者 皇龍寺緣起法師 爲內賜/이룬 願旨는 황룡사의 연기법사가 만드셨으니(화엄경사경조성기)’, ‘余 淳淨法者 上 同之/나머지의 순정법은 위와 같다(화엄경사경조성기)’, ‘娚者 零妙寺 言寂法師在旀/오라비는 영묘사의 언적법사이었으며(갈항사석탑조성기)’ 등 그 용례가 많다. 고려시대 이후의 차자표기에선 ‘隱/(, 으)ㄴ’이 주로 쓰였다.

 ‘那/(이)나’는 여러 체언을 열거하고 그 중의 하나가 선택됨을 나타낼 때 쓰이는 조사이다. 那의 약체자인 乃자도 8세기의 자료에 나타난다. ‘若 楮皮脫那 脫皮練那 紙作伯士那…走使人那 菩薩戒 授令旀/혹 楮皮脫이나 脫皮練이나 紙作伯士나…走使人이나 보살계를 받도록 시키며(화엄경사경조성기)’, ‘豆溫愛郞靈神那 二僧等那…一切 皆 三惡道業 滅/두온애랑의 영신이나 이승들이나…일체 모두 삼악도업을 멸하여서(영태2년명석조비로자나불조상기)’, ‘種種 施賜 人乃 見聞隨喜爲賜 人乃 皆 無上菩提 成內飛也/종종으로 布施하신 사람이나 견문수희하신 사람이나 모두 無上菩提를 이루는 것이다(규흥사종명)’와 같이 쓰였다.

 ‘/금’은 개별성을 나타내는 특수조사로 현대어의 ‘-씩’과 같은 기능을 한다. ‘經心內中 一收 舍利 入內如/경심안에 一收의 사리씩 넣는다(화엄경사경조성기)’, ‘切火 押梁 二郡 各人 起使內之/切火·押梁 두 군에서 가각 人씩 동원하여 부리었다(청제비정원명)’와 같이 쓰였다. 이 조사는 15세기에도 ‘-곰’으로 자주 쓰였다.

 終結語尾는 다음과 같은 것이 쓰였다.

之/다 如/다 也/다 矣/다 哉/

 ‘之/다’는 삼국시대부터 널리 쓰여 오던 평서법종결어미이다. ‘一部 周 了 成內之/한 부를 두루 마치어 이루었다(화엄경사경조성기)’, ‘竝 前內視令節 植內之/모두 전의 內視令 때에 심었다(신라장적)’ 등의 예가 있다. 이 차자는 고려초 10세기까지 쓰이고 그 이후는 ‘如/다’만이 쓰였다.

 ‘如/다’는 ‘之/다’와 같은 기능을 하는 평서법종결어미로 8세기의 이두에서부터 나타나 조선시대말까지 사용된 이두이다. ‘以後中 坐中 昇 經 寫在如/이후에 자리에 올라가 경을 베낀다(화엄경사경조성기)’, ‘觀音巖中 在內如/관음암에 두었다(영태2년명석조비로자나불조상기)’와 같이 쓰였다.

 ‘也/다’도 ‘之’나 ‘如’와 같은 기능을 하는 평서법종결어미이다. 한문을 釋讀할 때 ‘也’자가 우리말의 ‘-다’로 해석되므로 삼국시대부터 ‘之’가 쓰일 자리에 대신 쓰여 왔다. ‘皆 無上菩提 成內飛也/모두 無上菩提를 이루는 것이다(규흥사종명)’와 같이 쓰였다. ‘也’ 앞의 飛가 ‘’로 읽히는 차자이므로 也를 ‘-다’로 읽지 않을 수 없음을 보여 준다.

 ‘矣’는 후대의 이두에서는 ‘-’로 읽히는데 신라의 이두에선 평서법종결어미 ‘-다’로 읽었음이 분명한 자리에 쓰였다. ‘竅興寺 鐘 成內矣/규흥사의 종이 이루어졌다(규흥사종명)’의 矣는 토인 內자의 뒤에 쓰였으므로 우리말로 읽어야 하는데 다른 조성기에서 이 자리에는 ‘之’·‘也’가 오므로 그와 같은 ‘-다’로 읽어야 한다.

 ‘哉/’는 향가에선 ‘制’자로 쓰였고 고려시대 이후의 이두와 석독구결에선 齊자로 대체되었다. 願望의 뜻을 나타내는 종결어미이다. ‘後代 追愛人者 此善 助在哉/후대에 (고인을) 추모하여 사랑하는 사람은 이 善業을 도왔으면 한다(감산사불상조성기)’가 그 용례이다. 이두의 토로서는 가장 이른 것으로 이 이후에 여러 가지의 토가 확인된다. 다음에 보는 바와 같이 연결어미로도 쓰였다.

 연결어미는 다음과 같은 것이 쓰였다.

㫆/며 哉/ 者/(, 으)ㄴ /(아)금 但/이 欲/과 矣/

 ‘㫆/며’는 彌의 속자로 고대에는 그 음이 ‘며’였기 때문에 국어의 병렬연결어미 ‘-며’를 표기하는 데 사용되었다. ‘二 靑衣童子 灌頂針 捧㫆…四 伎樂人等 竝 伎樂爲㫆 又 一人 香水 行道中 散㫆/두 청의동자 관정침을 받들며…네 기악인들이 함께 기악하며 또 한 사람이 향수를 행도에 뿌리며(화엄경사경조성기)’과 같이 쓰이어 현대국어의 ‘-며’와 차이가 없다.

 ‘哉/’는 원망의 종결어미로도 쓰였으나 병렬의 연결어미로도 쓰였다. ‘若 大小便爲哉 若 臥宿哉 若 食喫哉 爲者/만약 대소변하거나 누워 자거나 먹고 마시거나 하면(화엄경사경조성기)’과 같이 쓰였다. 후대의 이두문에서는 이의 후대형인 齊가 종결어미와 연결어미에 모두 쓰였다.

 ‘者’는 주제의 보조조사로도 쓰이는데 앞의 예문 ‘若 臥宿哉 若 食喫哉 爲者’에서 보는 바와 같이 ‘爲者/’으로 쓰여 ‘하면’의 뜻을 나타낸다. 주제의 ‘者/ㄴ’이 조건의 뜻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 형태가 가정이나 조건을 나타내는 연결어미로도 쓰인 것이다. 고려시대의 석독구결에서도 ‘隱/(은)’이 이와 같은 기능을 나타내는 예가 있다.

 ‘/(아)금’은 고려시대 이후의 자료에선 ‘良/아금’·‘衣/의금’으로 쓰인다. 신라시대에도 ‘-아금’의 형태로 쓰였을 것인데 표기는 ‘’자로만 하였다. ‘하여서’·‘하여 가지고’의 뜻을 나타낸다. ‘諸 筆師等 各 香花 捧 右念行道爲 作 處 中 至者/여러 필사들이 각각 향화를 받들어서 우념행도하여 짓는 곳에 이르면(화엄경사경조성기)’, ‘自 毘盧遮那是等 覺 去世爲 誓內之/스스로 비로자나인 것을 깨닫고 去世하도록 誓願한다(영태2년명석조비로자나불조상기)’와 같이 쓰였다.

 ‘但’은 흔히 부사 ‘다만’으로 해석하는 것인데 문맥상 어미에 해당하는 예가 확인된다. ‘右 諸人等 若 大小便爲哉…若 食喫哉 爲者 香水 用 沐浴令只但 作作處中 進在之/위의 여러 사람들이 만약 대소변을 하거나…만약 먹고 마시거나 하면 향수를 써서 목욕시키어야만 만드는 곳에 나아간다(화엄경사경조성기)’에 쓰인 ‘令只但’의 但이 그것이다. 이 문맥에서는 但을 ‘다만’으로 해석하면 뜻이 통하지 않는다. 고려시대의 석독구결에선 ‘五欲…自樂 大名稱 求 不 但 永 衆生 苦 滅/오욕과 …自樂과 大名稱과 하는 것들을 구하지 않고 오직 길이 중생의 괴로움을 멸하며(신역화엄경 권 14, 12∼13)’과 같이 쓰이어 但자의 앞에 ‘/이’가 오는 예가 둘 나타난다. 이 ‘/이’는 한문의 但의 뜻에 해당하는 국어의 형태이다. 15세기 이후에는 이 형태가 없어졌지만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쓰이던 연결어미다.

 ‘欲/과’는 15세기의 ‘-고져’, 현대국어의 ‘-고자’에 해당하는 어미인데 화엄경사경에 어미로 쓰인 용례가 나타난다. ‘法界 一切 衆生 皆 成佛欲 爲賜以 成賜乎/법계의 일체 중생이 모두 成佛코자 하시므로 이루시었음(화엄경사경조성기)’이 그것이다. 이 欲의 훈이 고려시대의 석독구결에선 ‘(果)/과’로 나타난다. ‘菩提心 功德 顯示 (欲) 故/보리심의 공덕을 현시하시고자 하시므로(화엄경 권 14, 20∼24)’에 쓰인 ‘(欲)/과 실로’의 ‘/과’가 그것이다. 고려시대의 석독구결에선 흔히 나타나는 예이다.

 ‘矣’는 앞에서 종결어미로 쓰인 예를 보아 왔다. 고려시대의 이두와 구결에선 이 차자가 ‘’로 쓰인 예가 자주 나타나지만 신라시대의 이두에선 다음의 한 예에서 그 가능성을 볼 수 있을 뿐이다. ‘洑堤 傷故 所內使以 見令賜矣(청제비정원명)’의 ‘矣/’가 그것인데 종결어미와 거의 같아서 ‘-다’로 읽힐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動名詞語尾는 다음과 같다.

去/거 乎/온

 ‘去/거’는 다음과 같이 쓰인 예가 하나 발견될 뿐이다. ‘願旨是者 法界有情 皆 佛道中 到內去 誓內/원지인 것은 법계유정이 모두 불도에 이르기를 다짐한다(선림원종명)’. 여기 쓰인 ‘到內去 誓內’의 去는 동명사어미로밖에는 볼 수 없다. 고려시대 이후의 자료에서 이 去는 확인법의 선어말어미로 쓰였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자료에서도 ‘不喩去 有等以/안디거 잇로(아닌 것이 있으므로)’와 같이 동명사어미로 쓰인 예들이 있어 고대국어의 용법의 흔적을 볼 수 있다.

 ‘乎/온’은 ‘오’로도 읽히는데 신라시대의 것은 ‘온’으로 읽히는 예만 둘 확인된다. ‘-온’의 ‘-오-’는 이른바 의도법어미이고 ‘ㄴ’이 동명사어미이다. 앞에서 예로 든 ‘法界 一切 衆生 皆 成佛欲 爲賜以 成賜乎(화엄경사경조성기)’에 쓰인 ‘乎/온’의 ‘ㄴ’이 동명사어미로 문장을 종결시킨 경우에 쓰인 것이다. ‘紫草里 施賜乎 古鐘金/자초리께서 포시하신 옛종쇠(선림원종명)’에 쓰인 ‘乎’의 ‘ㄴ’은 명사의 수식에 쓰인 동명사어미이다. 이두에서는 동명사어미 ‘-ㄴ’을 따로 표기한 예를 보여주지 않는다. 다른 어미와 결합된 형태로 나타날 뿐이어서 문맥에 따라 이 형태를 재생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동명사어미 ‘-/ㄹ’이 아직 나타나지 않는 것도 이두표기의 특수성과 자료의 제약에 말미암는 것으로 생각된다.

 先語末語尾는 다음과 같은 것이 쓰였다.

飛/ 賜/

 ‘飛/’는 현재시제를 나타내는 선어말어미로 고려시대와 조선시대까지도 이두와 구결에서 자주 쓰인 것이다. 신라시대 이두에는 ‘過去爲飛賜 豆溫哀郞 願 爲/돌아가신 두온애랑의 원을 위하여(영태2년명석조비로자나불조상기)’과 ‘願爲內等者…皆 無上菩提 成內飛也/오직 원하는 것은 모두 무상보제를 이루는 것이다(규흥사종명)’의 두 예가 나타난다. 앞 예의 ‘爲飛賜/’에서는 ‘飛/’와 ‘賜/’의 배열순서가 15세기와는 달리 나타난다. 선어말어미의 배열순서가 시대에 따라 달라짐을 보여 주는 예이다.

 ‘賜/’는 주체존대의 선어말어미이다. ‘思仁大角干 爲賜/사인대각간이 삼으시어(무진사종명)’, ‘法界 一切 衆生 皆成佛欲 爲賜以 成賜乎(화엄경사경조성기)’, ‘乙未年 烟見賜 節/을미년에 烟을 보실 때에(신라장적)’, ‘過去爲飛賜 豆溫哀郞 願 爲(영태2년명석조비로자나불조상기)’, ‘所內使以 見令賜矣(청제비정원명)’ 등 그 용례가 자못 많다. 이 예들에서 賜는 어말어미와 같이 쓰인 예가 있으나 이는 표기법이 섬세하지 못한 데에 말미암은 것이다. 즉<무진사종명>의 ‘爲賜’는 부사형이므로 어말어미 ‘-아·어’를 보충하여 ‘아’로 읽어야 할 것이고<신라장적>의 ‘見賜’는 동명사어미 ‘-ㄴ’이나 ‘-ㄹ’을 보충하여 ‘보’이나 ‘보’로 읽어야 할 것이다. 이 밖의 예들도 문맥에 따라 어말어미의 보충이 있어야 할 것이다. ‘賜’의 어형은 후대의 ‘시’에 대응하지만 고대에도 ‘시’의 표기로 볼 수는 없다. 賜의 전통적인 한자음대로 ‘’이었던 것이다.

 어미의 위치에 자주 나타나는 것으로 ‘內’가 있다. 이 차자가 나타내는 형태와 기능은 분명치 않다. 그 쓰임을<화엄경사경조성기>에서 보면 선어말어미의 위치에 쓰인 것으로 ‘成內之/이루었다’, ‘爲內㫆/며’, ‘入內如/넣는다’의 예가 있고 어말어미의 위치에 쓰인 것으로는 ‘成內 願旨者/이룬 원지는’, ‘淳淨爲內 新淨衣/순정한 신정의’와 같이 관형형어미의 위치에 쓰인 것이 있다. 연결어미의 위치에 쓰인 것으로 ‘頂禮爲內…供養爲內 以後中/정례하고…공양한 이후에’와 같이 쓰인 예가 있다.<영태2년명석조비로자나불조상기>에서 보면 ‘石毘盧遮那佛 成內…觀音巖中 在內如/돌 비로자나불을 이루어…관음암에 둔다’는 부사형어미의 위치에 쓰였고 ‘遙聞內那 隨喜爲內那 影中 逕類那/멀리서 들은 이나 수희하는 이나 그림자 가운데를 지나가는 무리나’에서는 동명사어미의 위치에 쓰인 것이다. 이로 보면 이 內자는 고유어로 훈독되는 동사의 뒤에 온다는 특징 이외에는 그에 대응하는 어미를 추정할 수가 없다. 현재로서는 동사를 우리말로 해석하는 것을 보여주는 차자라고밖에는 달리 설명할 수가 없다.

 接尾辭는 다음과 같은 것이 쓰였다.

內/()+ 牙/엄 爲/ 令只/시기- 令/이 兮/히 于/오·우 知/디 里/리

 신라시조 赫居世는 弗矩內로도 표기된다. 같은 이름을 전자는 훈독자로 표기한 것이고 후자는 음가자로 표기한 차이일 뿐이다. 이 弗矩內는 ‘블그’를 표기한 것으로 이를 분석하면 ‘븕+은+’가 되고 여기서 명사파생 접미사 ‘-’가 추출됨은 앞에서도 말하였다. ‘弗矩內/블그’는 ‘밝은 존재’란 뜻으로 이는 ‘光明理世’의 사상을 나타낸다.

 ‘牙/엄’은 赤牙縣(殷正縣)에 쓰인 것으로 赤牙는 殷과 대응된다. 殷에 ‘검붉다’의 뜻이 있으므로 赤牙는 ‘븕엄’의 표기임을 알 수 있다. 이 역시 ‘밝다’의 뜻으로 ‘赤牙/븕엄’은 형용사어간 ‘븕-’에 명사파생접미사 ‘-엄’의 결합으로 파생된 명사이고 여기서 명사파생접미사 ‘-엄’을 얻을 수 있다.

 ‘爲/’는 한자어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발달한 접미사이다. ‘淳淨爲/淳淨-’, ‘供養爲/供養-’ 등 그 용례가 자못 많다. 본래 동사에서 문법화한 것인데 이미 이 시대에 접미사화가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令只/시기-’도 ‘爲/-’와 같은 과정으로 접미사화한 것이다. ‘沐浴令只/목욕시기-’, ‘庄嚴令只/장엄시기-’와 같이 쓰였다. 令자는 고려시대의 석독구결에서 사역형접미사 ‘-이-’를 표기하였다.<청제비정원명>의 ‘見令賜矣/보이샤’에서 이 접미사가 확인된다.

 부사파생 접미사로 ‘兮/히’와 ‘于/가’ 쓰였다. ‘追兮/좇히(정창원의 모전첩포기)’, ‘追于/조초(위와 같음)’로 보아 같은 기능을 하는 접미사이다.

 삼국시대의 金石文에는 인명에 ‘帝知(智)·第智·夫智·智’ 등을 접미시킨 예를 볼 수 있다. 이는 伊思夫智·居柒夫智가 笞宗·荒宗 등으로 표기되는 것을 보아 신분의 고귀함을 나타내는 접미사임을 알 수 있다. 이 접미사가 통일신라의 인명에는 쓰이지 않았다. 다만 ‘黃珍知 奈麻(화엄경사경조성기)’와 같이 ‘知/디’를 접미시킨 예가 나오는데 이는 ‘知·智’가 존귀함을 나타내던 관습에서 붙인 것이다.

 앞에서 여인들의 이름에 접미되는 ‘里/리’를 설명한 바 있다. 여성을 높이는 뜻에서 사용된 것으로 믿어진다.

 국어에는 모음의 대립에 의하여 어감의 차이를 나타내는 단어파생법이 있다. 이 문법은 고대국어에도 있었음을 추정케 한다. 앞에서 든 ‘弗矩內/블그’의 ‘븕-’이 ‘-’의 뜻을 나타내는 예가 이를 말해 준다. 신라 6部의 하나인 ‘習比’가 삼국시대의<迎日冷水里碑>에 ‘斯彼/비’로 나타나는 데서도 이 현상의 존재를 짐작할 수 있다.

 이상에서 조사와 어미, 그리고 조어법에 대한 설명을 하였다. 국어에는 실사와 문법형태의 중간에 드는 형태들이 있다. 고대국어에도 그러한 형태들이 적지 않게 확인되는데 이를 準文法形態라 한다. 이러한 형태로는 다음과 같은 것을 들 수 있다.

等/ 爲/- 是/이 在/겨 初/비릇 元/비릇 而/마리여

 의존명사 ‘等/’는 고려시대의 이두와 구결에서 자주 쓰였었다. 고대국어에선 ‘自 毘盧遮那是等(인 ) 覺 去世爲/제 스스로가 비로자나인 것을 깨닫고 去世하도록(영태2년명석조비로자나불조상기)’과 ‘願爲內等者/오직 원하는 것은(규흥사종명)’에 쓰인 ‘是等/인 ’과 ‘爲內等者/ ’의 용례가 있다. 이 의존명사는 고려시대의 석독구결과 이두문에 폭넓게 사용된 것으로 보아 신라시대에도 널리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爲/-’는 접미사로도 쓰이지만 본래 이는 조동사로 널리 쓰이던 데서 온 것이다. ‘皆 成佛欲 爲賜以/모두 성불코자 하심으로’, ‘若 臥宿哉 若食喫哉 爲者/만약 누워 자거나 먹고 마시거나 하면(화엄경사경조성기)’의 ‘爲/-’가 조동사로 쓰인 것이다.

 계사 ‘是/이-’의 용례들도 확인된다. ‘內物是在之/안의 물건이다(영태2년명석조비로자나불조상기)’, ‘願旨是者/願旨인 것은(선림원종명)’등에 쓰인 ‘是在/이겨-’와 ‘是者/인’에 쓰인 ‘是/이-’가 그것이다.

 ‘在/겨-’는 후대에는 그 기능을 ‘有/잇-’에 넘겨주고 없어진 단어이다. 15세기에는 존대법어미 ‘-시-’가 접미되어 화석화한 ‘겨시-’가 그 흔적만을 보여 주는 것이지만 고대에는 사용빈도가 매우 높은 단어이다. 이 단어는 ‘觀音巖中 在內如/관음암에 둔다(영태2년명석조비로자나불조상기)’와 같이 실사로도 쓰이지만 대개는 다른 동사의 어간과 결합하여 시간의 지속을 나타낸다. ‘願 助在 衆/願을 도운 衆(무진사종명)’, ‘作作處中 進在之/짓는 곳에 나간다(화엄경사경조성기)’의 ‘助在/돕견’, ‘進在/나겨-’ 등이 그것이다. ‘是/이’와 ‘在/겨’가 결합하여 ‘是在/이겨-’로 쓰이는 것은 앞의 예에서 보았는데 이 경우 ‘是’의 표기를 생략하고 ‘在’만을 쓰기도 한다. ‘娚者 零妙寺 言寂法師在㫆/오라비는 영묘사의 언적법사이며(갈항사석탑조성기)’의 ‘在㫆/겨며’는 ‘是在㫆/이겨며’에서 ‘是’의 표기가 생략된 것이다. 이러한 ‘是/이’의 생략은 고려시대의 이두나 구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인데 그 관습이 신라시대까지 소급됨을 보여 주는 예이다.

 ‘初’와 ‘元’은 ‘언제 시작하여(부터) 언제까지’라는 표현에서 ‘시작하여(부터)’의 뜻을 나타낸다. ‘甲午 八月一日 初 乙未載 二月十四日 一部 周了成內之/ 갑오년 8월 1일에 시작하여 을미년 2월 14일 일부를 두루 마치어 이루었다(화엄경사경조성기)’, ‘二月十二日 元 四月十三日 此間中 了治內之/2월 12일에 시작하여 4월 13일 이 사이에 마치어 수리하였다(청제비정원명)’와 같이 쓰였다. 어느 기간의 시작을 나타낸다는 특수성이 준문법형태로 발달하는 계기가 되었다. 후대의 이두에서는 ‘元叱’·‘始叱’로 표기하고 ‘비릇’으로 읽고 있다. 동사 ‘비릇-’에서 부사로 파생되었다가 ‘부터’의 뜻을 나타내는 준문법형태로 발달하여 조선조말까지 사용되었다.

 ‘而’는 후대의 이두에서 ‘而亦/마리여’로 표기하고 역접의 뜻을 나타내는 접속사와 ‘而叱/말잇’으로 표기하고 ‘하면’의 뜻을 나타내는 접속사로 쓰인 이두이다. 고대국어에서는 ‘前內視令節 植內是而 死白栢子木十三/전의 內視令 때에 심었었지만 죽은 것으로 보고하옵는 잣나무는 13주임(신라장적)’과 같이 쓰인 예들이 있다. ‘是而’는 ‘-인 마리여’로 읽히는데 현대어로는 ‘-인 것이지만’의 뜻으로 풀이된다.

 이상 신라시대의 문법에 대하여 이두문에 나타난 것을 중심으로 설명하였다. 이는 한정된 자료에 바탕을 둔 것이어서 고대국어의 전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은 못되지만 현재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망라된 셈이다. 앞으로 보다 많은 자료가 나와서 이를 보완하게 되기를 바란다.

<南豊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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