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9권 통일신라
  • Ⅴ. 문화
  • 4. 언어와 문학
  • 2) 향가

2) 향가

 6세기 이전 한반도 동단에 자리한 신라는 아직 고유한 문자를 가지지 못하였던 관계로 한자의 음과 훈과 뜻을 차용하여 자기 나라 말을 기록할 수 있는 수단을 고안하여 사용하였다. 이와 같은 표기법을「鄕札」이라고 불렀는데, 이로써 신라는 자기 나라 말로 된 노래를 문자로 표기하여 후대에 남길 수 있었다. 향찰로 표기한 자국의 말로 된 노래를「鄕歌」라고 불렀다. 향가라는 말은 외래의 노래, 특히 漢·唐의 가요와 범패류의 불교가요에 대한 신라 자국의 노래를 가리켜 이르던 정감어린 명칭이었다. 향가에 대한 신라사람의 인식은 유다른 바 있었으니, “신라사람이 향가를 숭상한 지는 오래었다. 대개 시송의 종류인가. 그리하여 왕왕 천지귀신을 감동케 하는 것이 한두 편에 그치지 않았다.”1211)≪三國遺事≫권 5, 感通 7, 月明師 兜率歌.고 하였다. 향가는 중국의 시송에 견줄 만큼 국민적 숭앙을 받으면서 널리 제작되고 애송된 신라의 가요였다. 國仙에 딸린 郎徒僧은 범패는 못해도 향가만은 지어 부를 수 있었고, 佛齋에서도 향가가 범패를 대신하여 쓰였다. 향가는 당초 외래가요에 대한 국어로 된 노래를 가리켜 말한 것이었으나, 그것이 흔히 향찰로 기록되었으므로 향찰표기의 신라가요를 향가라고 부르고 있다. 15세기 중엽에 이르러 조선의 世宗이 향찰표기의 불편을 지양하고자 새로이「正音」이라는 국문자를 제작·반포하여 널리 쓰이게 되면서 향찰은 점차로 자취를 감추었고, 향가도 정음표기의 이른바 국문가요로 바뀌어 갔던 것으로 보인다.

 현전하는 향가는 총 25수로서 신라향가 14수는≪三國遺事≫, 고려향가 11수는≪均如傳≫에 각각 수록되어 있다. 신라 眞聖女王 2년(888)에 왕명으로 향가집≪三代目≫이 大矩와 魏弘에 의하여 수집되었던 사실이 전하나, 지금 그 책이 전하지 않는 관계로 그 내용이나 규모를 전혀 알 수 없다.≪삼대목≫이 신라 말기의 가요집성이라는 점에서 신라 전대에 걸친 향가가 고루 망라된 꽤 방대한 가집이 아니었던가 한다. 향가와 관련하여<詞腦歌>·<詩腦歌>·<兜率歌>등의 명칭이 문헌에 보이고 있는데 이에 관한 가요의 성격은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향가의 하부쟝르인 것만은 확실하다.<사뇌가>혹은<시뇌가>는 당초 음악과 무용의 요소를 가진 놀이에서 가창된 노래를 일렀던 듯하며, 가사가 깨끗하고, 글귀가 아름다워「사뇌」라 명명했다고 밝히고 있다.<도솔가>에 관하여는 1세기초 신라 儒理王 5년(A.D. 28)에 제작된 사실이 기록에 보이며, 이를「歌樂의 처음」이라 하고,「嗟辭」를 가진 詞腦格이 있다고 하였는데, 이로 미루어 최초의 國定歌謠인 듯하며, 후대의 향가-<사뇌가>와 어떤 연계를 갖는 초기의 가요였던 것으로 보인다.

 향가의 장르적 성격은 매우 다양하다. 집단적인 민요, 개인적인 서정가요, 변괴나 역신을 물리친 주가, 특정 인물을 예찬하거나, 사모하는 찬가와 추모가, 불교가요(공덕·수행·의식·기원·교리 등), 治國의 도리를 밝힌 獻歌 등 여러 가지다.

 향가의 작자도 그 구성이 다양하다. 위로는 왕으로부터 아래로 재상·신하·관원·국선도·일반 사녀·무명의 평민·승려·수행자·부녀·불교신도 등 신라사회의 각계각층을 폭넓게 망라하고 있다. 그리하여 향가를「국민문학」이라 일컫는 이도 있다.1212)趙潤濟,≪國文學槪說≫(東國文化社, 1955), 88쪽. 향가의 형식을 4구체·8구체·10구체의 세 종류로 구분하고 있으나, 원전의 구절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가사가 전하지 않는 月明師(景德王 때 승려)의<散花歌>는 10구 이상의 장편이 확실하므로 향가를 위의 세 종류로 분류한 것은 정설일 수 없는 가설이다. 향가의 형식에 대하여≪균여전≫은 崔行歸의 譯詩 서문에서「三句六名」을 말하였는데, 그 확실한 내용은 알 수 없고, 다만 10구체 향가의 3단락 구성을 시사한 것으로 추측될 뿐이다. 이와 같은 3단락 구성은 후대의 한국가요, 특히 시조의 3장 구성과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현전하는 신라향가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나온 작품(薯童謠·彗星歌·風謠)이 대략 6세기 말엽에서 7세기 전반에 걸쳐 있고, 그 나머지 작품들은 삼국통일 이후의 통일신라 작품이다. 향가는 평속한 노래이면서도, 남녀상열류의 세속적 인간 감정을 노래한 고려 속요와는 달리 숭고한 이상이나 동경, 지순한 종교적 신심이나 간절한 희원, 순후한 인간 감정을 노래하였고, 일부에 呪歌的인 작품도 있다. 기교보다는 솔직 담백한 서정, 진실하고 질박한 서사가 돋보인며, 당초 회의, 침울, 절망과 같은 정서와는 거리가 있고, 공격적이거나 격정적인 면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현전하는 신라 향가 14수 각편을 통해 신라인의 가요 발상의 실상을 살펴보기로 한다.

 <서동요>:≪삼국유사≫의 武王조는<서동요>의 작자에 대하여 백제 제30대 武王이 잠저시대에 신라 진평왕의 공주 善花를 취하기 위해 거짓 풍문을 퍼뜨리는 수단으로 이 노래를 제작하여 유포시켰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이 대목에 나오는 무왕은 역사적 인물인 백제의 무왕과는 관계가 없는 설화적 인물이다. 따라서<서동요>의 작자를 백제 무왕으로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마땅히 薯童이라 해야 할 것이다. 이 노래의 배경기사는 설화 문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많은 설화 모티프를 포함하고 있다. 비범한 인물의 이상 탄생 모티프가 여기서는 서동의 龍子로서의 출생으로 나타나 있다. 미천한 인물이 자기 능력(꾀, 용기 등)으로 고귀한 신분의 여성과 결혼하고, 또 출세하여 신분상승한다는 설화유형이 서동에서 재현되고 있다. 그의<서동요>제작과 유포는 그의 능력을 시사하는 사실이 되며, 동시에 이 설화에서 중요한 전환적 계기가 되고 있다. 그리고 智者의 도움으로 숨겨진 보물을 얻는다는 모티프도 서동이 공주의 조언으로 황금의 실체를 알아서 득재하게 되는 데서 나타나고 있다. 신통력으로 무겁고 많은 물건을 먼 곳까지 나르고, 산을 헐어서 호수를 메우는 등 힘센 거인(怪力의 소지자)의 모티프가 여기서는 知命이라는 승려의 형상으로 불교화되어 나타나고 있다. 이 밖에도 노래의 주력 모티프를 볼 수 있다.<서동요>가 비록 허위의 사실을 조작한 노래였음에도 불구하고, 무심한 아이들의 입으로 불려지는 가운데 노래의 내용이 현실화되었고, 또 피해자인 공주까지도 “동요의 영험을 믿게 되었다”고 한 데서 노래에 대한 신라사람의 의식이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해독된<서동요>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선화공주님은 남 그으기 얼어두고/서동 방을 밤에 마를 안고 가다(≪三國遺事≫권 2, 紀異 2, 武王)

 위의 표면적 문맥으로 보면 작자 자신의 서정적 자아가 전혀 드러나지 않은 객관적 서술을 하고 있다. 그러나 배경설화를 통하여 내면의 문맥을 해독하게 될 때 미천한 무명소년의 무분별에 가까운 야망과 좌절 모르는 집념의 역동적 표현을 역력히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가장 냉정한 표정 뒤에 감추어진 뜨거운 열정을 감지하게 된다.1213)황패강,<‘서동요’ 연구>(≪新羅文化≫3·4합집, 東國大, 1987), 16쪽.

 <혜성가>:신라 眞平王(579-632) 때 融天師가 지은 노래다. 제작의 전후 사정을 설명하는 기사는 다분히 설화적이어서 그 역사적 엄정성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 듯하나, 신라 때 있었던 왜군의 침입, 혜성의 출현 등 일련의 역사적 사실과 그에 대처하는 신라인의 의식을 반영하면서 동시에 이와 같은 사태가 계기가 되어 제작된<혜성가>의 존재를 알려 주고 있다. 작자 융천은 화랑도와 관련있는 郎徒僧으로 密敎(純密)계의 영력있는 實修僧이었던 듯하다. 그는<혜성가>를 지어 부름으로써 침입했던 왜군을 물러나게 하고, 不祥의 상징으로 인식되었던 혜성을 물리쳤다.<혜성가>가 이런 신통한 영력을 발휘한 데는 그나름의 주술적 원리가 작용하였음을 인정하게 된다. 그의 향가는 사실을 시화하는 과정에서 轉移의 수법을 씀으로써 현실타개의 주술적 효과를 거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노래에서 두 가지 현실적 난제를 제기하였는데, 첫째가 왜군의 내침이요, 둘째가 혜성의 출현이다. 그는 엄연한 왜군 침입을「건달파성을 바라고 온 비침략적인 것」으로, 흉조가 분명한 혜성의 출현을「길 쓸 별」로 넌지시 전이하여 표현했고, 후구에서 “왜군이 바다에 떠서 돌아가고”, “무슨 혜성일까보냐” 하는 단호한 부정으로 결말을 지음으로써 현실 전환의 결정적 계기를 잡았다. 향가가 흔히 천지귀신을 감동케 하였다고 한 노래에 대한 신라인의 인식에는「노래된 것」은 그대로 현실화된다는 믿음이 보인다. 왜군의 내침을 “건달파성을 바라고 왔다”고 노래함으로써 그것은「내침」이 아닌, 건달파성의 환상에 이끌려 온 왜군이 되어 버리고, 엄연한 혜성을「길 쓸 별」이라 노래함으로써 그것은 혜성일 수 없게 되고, 따라서「길 쓸 별」이 되어 버리는 것이었다. 이것이 본가의 시적 메카니즘으로 실현된 가요의 주술적 원리다. 다시 후구에서 왜군이 “바다에 떠서 가버리고 있다”고 노래함으로써 왜군의 해상 철수는 현실화되고, “그게 무슨 혯기잇고”라고 노래함으로써 더 이상「혯기」는 있을 수 없다. 결국 현실의 혜성은 완전히 부정되고 말았고, 따라서 혜성은 자취를 감춰 버렸다. 작자가 왜군의 내침에 하필「건달파성」을 이끌어 온 데는 그나름의 특별한 의미가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건달파성」은 사람의 눈에「있는 것」으로 보이되 실은 없는 幻化의 성이다. 왜군이 한낱 환화에 지나지 않는 건달파성을 바라고 왔다고 함으로써 그들이 한낱 허상을 좇는 愚癡의 무리에 지나지 않으며, 그들의「내침」자체 허상에의 미련한 집착일 뿐이라는 은연한 비아냥을 담고 있다고 하겠다.1214)黃浿江,<‘彗星歌’硏究>(≪中齋張忠植博士華甲紀念論叢≫, 1992), 64쪽.

 <風謠>: 불교 입국의 성세이던 신라 선덕여왕(632-647) 치세에 靈廟寺 장륙삼존불 조성의 佛事와 관련하여 불려진<풍요>는 경주의 사녀들이 泥土供養1215)金東旭은 ‘泥土施主’로 보았다(金東旭,≪國文學槪說≫, 普成文化社, 1992, 44쪽).하러 가면서 부른 공덕가다. 이 노래는 이 불사가 끝난 뒤에도 경주지방에서 계속 구전되었던 듯 고려 때 맞절구질하는 주민들 사이에서 이 노래가 유행하였다.1216)≪三國遺事≫권 4, 義解 5, 良志使錫. 한 시대의 민요라 할<풍요>가 허구많은 주제를 두고, 하필 불공덕을 노래했다는 점에서 그 시대, 그 나라의 불교적 분위기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풍요>는 그 가요의 성격상 특정한 작자를 생각할 수 없는 노래이나, 영감을 받아 장륙상 소성에 종사한 良志에게 영적으로 동화된 사녀들이 聖像 조성에 이토공양을 하면서 그 영적 체험을 歌化한 것으로 단순한 노동요1217)朴魯埻,≪新羅歌謠의 硏究≫(悅話堂, 1982), 111∼114쪽.는 아니다.1218)黃浿江,<‘風謠’에 대한 一考察>(≪新羅文學의 新硏究≫, 新羅文化宣揚會, 1986), 85∼102쪽.

 <願往生歌>:미타정토 왕생을 원구하며 세속의 욕망을 단절하고 수행에 전념한 廣德이 자신의 왕생 희구를 읊은 노래다. 수십억불토를 격해 있는 무량수불의 願力은 멀리 穢土衆生에까지도 미친다. 광덕은 서방으로부터의 서원에 응답하고 나선 行者다. 무량수불과 광덕은 달로 말미암아 서로의 메시지와 응답을 교신하며, 이로써 淨穢가 하나 되며, 迷悟一如의 새 경지가 열린다. 노래에서 “나를 버려두고는 (무량수불 당신의) 誓願이 성취되지 않는다”고 하였는데,「나를 왕생시켜 달라」는 소원 표출 이상의,「당신(무량수불)의 正覺을 위해서 나의 成道는 절대적 조건이다. 따라서 나를 성도시켜 주지 아니하고 어찌하겠는가」하여 상대방에게 하는, 어느 의미의 강박적(?) 투정처럼도 되며, 동시에 자기 수행에 대한 절대적인 자신을 표현했다고도 하겠다. 자기 成道에 대한 확신이다. 그는 무량수불의 메시지에 무조건의 신뢰와 철저한 자기 헌신으로 응답하면서 동시에 무량수불의 결단을 촉구하는 물음을 발하고 있다. 문무왕(661∼681) 때의 수행자 광덕은 위의 역동적 시 구조로써 ‘원왕생’(≪三國遺事≫권 5, 感通 7, 廣德 嚴莊)을 노래하였다.1219)黃浿江,<‘願往生歌’ 硏究>(≪三國遺事의 문예적 가치해명≫, 새문社, 1982), 85∼104쪽.

 <慕竹旨郞歌>:삼국통일의 공신이며, 4대 총재를 지낸 金竹旨는 孝昭王(692∼702) 때 현직에서 물러나 郎徒를 거느리고 國仙道를 행하고 있었는데, 낭도 得烏가 富山城 창직으로 불려가자 찾아가 위로하고, 갖은 어려움에도 휴가를 받아서 함께 돌아온 일이 있었다. 득오는 죽지 사후 그가 자신에게 베풀어 준 은혜를 회고하면서 끝없이 경모하는 심정을 본가에 담았다.1220)黃浿江,<慕竹旨郞歌 硏究>(≪語文硏究≫21, 語文學會, 1991), 61∼75쪽.

간 봄 그리워 함에/더 못 살으사, 울어 설워하나이다/(부산성에 매였을 제) 애달음 나타내신/모습이 해 거듭하는 즈음에 덧없이 가시더이다/눈 돌이켜 되돌아볼새/맞보기 어찌 기약하리이까/낭이여, 그리는 마음에/가올 길/陋巷에 잘 밤 (또 다시) 있사오리이까(≪三國遺事≫권 2, 紀異 2, 孝昭王代 竹旨郞).

 <獻花歌>:聖德王 때(702∼737) 純貞公의 夫人 水路에게 어떤 村老가 꽃을 꺾어 바치며 드린 자작의 노래로, 사심없는 지순무구한 호의를 담은 3구절의 서정가요다.

진달래 (핀) 바위 가에 잡고 있는 어미소 놓아 두고/나를 아니 부끄러워 하시오면/꽃을 꺾어 드리오리다(≪三國遺事≫권 2, 紀異 2, 水路夫人).

 <怨歌>:孝成王과 景德王 2대 왕조에서 요직을 맡아 국정에 참여한 信忠이 당초 효성왕(737∼742) 즉위초 왕이 潛邸 때 궁뜰의 잣나무를 두고 한 언약을 이행치 아니하자 원망하는 노래를 지어 잣나무에 붙였다. 이로 말미암아 잣나무는 노랗게 말랐다. 그제야 왕이 깨닫고, 그를 등용하니 잣나무는 원상을 돌이켰다고 한다. 이 노래가 향가「원가」다. 나무와 신성왕의 상징성, 노래의 주력 등을 신봉했던 신라인의 의식을 엿보게 하는 노래다(≪三國遺事≫권 5, 避隱 8, 信忠掛冠).

 <兜率歌>:景德王 19년(760) 4월 日怪가 나타나고, 왜군의 침입이 있었다. 이에 왕명을 받고 月明師가 散花功德을 행하며, 본가를 지어 불렀더니, 마침내 일괴가 사라지고, 왜군이 물러갔다. 그는 이 노래에서 兜率天의 미륵보살을 맞아 신라를 미륵下生의 불국토화함으로써 일체의 재앙이 범접 못한다는, 불교적 확신을 노래했다(≪三國遺事≫권 5, 感通 7, 月明師 兜率歌).

 <祭亡妹歌>:경덕왕(742∼765) 때 월명사가 죽은 누이동생을 위해 재를 올리며 이 노래를 부르자 광풍이 일어 지전을 날려 서쪽에 사라지게 했다고 한다. ‘천지 귀신을 감동케 한다’는 신라향가의 계열에 속하는 노래다. 가을에 떨어지는 낙엽에 의탁하여 인간 존재의 허무를 노래하였다. 그러나 이 노래는 인간 존재의 허무를 노래하는 것으로 마치지 아니하고, 허무를 지양한, 승화된 정신세계를 그렸다. 그럼으로써 궁극적인 인간의 운명을 희망적으로 제시하고 있다(≪三國遺事≫권 5, 感通 7, 月明師 兜率歌).

 <讚耆婆郞歌>:경덕왕 때 유행한 忠談師의 향가 작품으로, 왕이 ‘그 뜻이 심히 높다(其意甚高)’고 평했듯이 화랑 기파랑의 인격을 그지없이 고상하게 형상화하였는데, 물에 비친 달에 비유하고, 변함없는 절의를 서리 모르는 잣나무에 빗대어 노래하였다. 아름다운 서정, 생동감 넘치는 형상화는 문학적으로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三國遺事≫권 2, 紀異 2, 景德王 忠談師 表訓大德).

 <安民歌>:경덕왕 24년(765)의 어느 3월 3일 榮僧을 기다리던 왕에게 인도되어 온 충담이 왕의 요청을 받고, 治道의 도리를 노래로 지어서 바친 것이 본가이다. 왕은 이를 가납하여 그를 王師로 봉하였으나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노래의 내용은 君·臣·民 3자의 관계를 父·母·子에 대비하여 이들이 마땅히 지켜야 할 본분이 무엇인가를 노래하였다(≪三國遺事≫권 2, 紀異 1, 景德王 忠談師 表訓大德).

 <禱千手大悲歌>:경덕왕 때 여인 希明은 아들이 다섯살에 실명하자 아들의 눈을 뜨게 하고자 분황사 벽화의 천수대비상 앞에서 아이로 하여금 본가를 불러 빌게 하여 눈밝음을 얻었다. 분황사의 벽화 천수대비상은 아마도 7세기 전반에 率居가 그린 ‘神畵’-‘관음상’으로 그 영험이 널리 신봉되어 왔던 듯하다. 千手千眼의 利他의 보살에게 당신의 천개 눈에서 하나만이라도 베풀어주십사 간절히 비는 내용으로 된 본가는 과연 관음으로 하여금 자비심을 발하게 하였던 것이다(≪三國遺事≫권 3, 塔像 4, 芬皇寺千手大悲 盲兒得眼).

 <遇賊歌>:元聖王(785∼798) 때 90세에 다달은 永才는 세속의 인연을 끊고 남악에 은거하러 가던 길에서 도둑들을 만나 위급한 지경에 이르렀으나 태연히 이들을 대하고, 또 노래를 지어 감화하니 도둑들이 흉기를 버리고, 머리를 깎고, 그를 따라 입산하여 다시는 세상을 밟지 않았다. 도둑들을 감화하여 回心케 한 노래가 본가다(≪三國遺事≫권 5, 避隱 8, 永才遇賊).

 <處容歌>:憲康王(875∼886)이 開雲浦에서 짙은 운무를 만나 길을 잃었을 때 ‘동해용을 위해 勝事를 하여 풀어야 한다’는 日官의 말에 따라 근경에 불사를 세우도록 영을 내렸다. 그러자 운무는 씻은 듯이 개었고, 동해용이 일곱 아들을 거느리고 나와 임금의 덕을 찬양하여 춤과 음악을 바쳤다. 용의 아들 하나가 왕을 따라 서울에 들어와 왕정을 보좌하니, 이름을 處容이라고 하였다. 왕은 미녀로서 아내를 삼아주고, 級干의 직을 주었다. 처용의 아내를 흠모한 疫神이 사람으로 변하여 밤에 몰래 처용의 아내와 동침하고 있었다. 마침 집에 돌아온 처용이 잠자리에서 두 사람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그는 노래부르고 춤추며 물러났다. 이처럼 노여움을 보이지 않은 처용의 태도에 감동한 역신은 진심으로 사과하고, 앞으로는 처용의 화상을 보아도 그곳을 멀리 하겠노라고 맹서하였다. 이때 처용이 부른 노래가<처용가>다.

서울 밝은 달에/밤들이 노닐다가/들어사 자리를 보니/가랄(다리)이 넷이러라/둘은 내해였고, 둘은 뉘해언고/본대 내해이다만/앗음을 어찌하리꼬(≪三國遺事≫권 2, 紀異 2, 處容郞 望海寺)

 이 노래의 해석을 두고 여러 가지 논의가 있다. 노골적인 성관계를 그렸다고 하여 그 卑俗性을 문제삼아 서민문학에 귀속시키는 논의도 있고, 처용의 歌舞自退를 불교적 忍辱行으로, “앗음을 어찌하리꼬”를 諦念으로, 처용을 아랍상인으로, 혹은 지방호족의 출신으로 해석하는 논의도 있다. 그러나 노래에 관하여는 아래와 같은 해석이 가능하다. 달로 상징된 천상적 이미지와 간음으로 나타난 지상적 현실 사이에 聖과 俗으로 대비될 엄청난 거리가 설정되었다. 처용과 역신 양자의 대립을 해소할 계기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이로써 긴장이 야기되고, 긴장이 극도로 고조된 끝에 일대전환을 맞는데, 바로 처용의 가무자퇴로써 일체의 갈등이 승화될 계기를 맞게 된 것이다. 처용처는 고상과 비속의 두 가치의 중간에서 어느 편이든 될 수 있는 방황하는 인간적 존재다. 당초 천상적 존재(처용)와 맺어져 있던 처용처는 사탄적인 역신의 유혹에 빠져, 고상한 가치와 맺어졌던 자신을 아낌없이 비속하고 저열한 가치(역신)에게 내맡긴 꼴이 되었다. 그러나 타락이 결과할 파멸의 결정적 순간에서 고상한 가치로 말미암아 구원 즉 영혼의 구제를 받는다. 최후의 순간 처용의 노래(가무)가 그녀의 영혼을 구하였다. 처용의 가무는 역신으로 하여금 처용처에 대한 일체의 邪意를 포기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인간 전체에 대하여도 그의 사력 행사의 포기를 선언하게 하였다. 이때 처용이 부른 노래가<처용가>다.1221)黃浿江,<處容歌 硏究의 史的 反省과 一試考>(≪鄕歌麗謠硏究≫, 二友出版社, 1985), 153쪽.

<黃浿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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