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9권 통일신라
  • Ⅴ. 문화
  • 4. 언어와 문학
  • 3) 한문학
  • (2) 한문학의 의의

(2) 한문학의 의의

 위에서 언급한 대로 이 시기 문학은 삼국시대 이래로 지속된 공용적 기능의 전통 일변도에서 탈피하여 개인의 서정을 노래하거나 허구적 세계를 창작하는 기반을 쌓았다는 데에 가장 큰 의의가 있을 것이다. 또한 그들이 이룩한 문학적 성취와 수준은 한자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중국에서도 높힘을 받을 만한 것이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이규보는 고려의 박인량과 함께 최치원·박인범을 문장으로 나라를 빛낸 사람이라고 극찬한 바 있다.

 가장 문제시되는 것은 이들 성취의 대부분이 승려들의 작품까지 포괄하여 해외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과, 이 시기 작가 대부분이 만당 문사들과 접촉하여 후대에 부정적으로 인식되는 그들의 문학 경향을 이식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전자의 경우 문학작품이 저작된 공간보다 작품 자체의 성격이 더 중요하고, 이러한 점에서 그들이 신라인이라는 자각 위에 작품활동을 했다는 점을 더 주목해야 할 것으로 본다. “해내인”(당인)과 해외인”(신라)의 거리를 인식한 것이나(최치원), “고국의 꽃다운 나무는 꿈 속의 봄”(최광유)이라든가, “천 가지 나그네 시름 이로 인해 일어나고”(박인범) 같은 구절은 외국에서의 과거합격이나 학문연마가 바로 이방인으로서의 자신들의 위상을 확인하는 계기가 된 것임을 말해준다.

 그러나 해외 유학파들이 당대 문학의 중심이 됨으로써 그들이 접촉한 문학적 경향이나 특성을 그대로 신라에 이식해왔다면 이것은 그 가치를 재고해야 할 만큼 중요한 것이다. 실제로 통일기 특히 9세기의 신라의 한문학은 만당풍의 영향을 받아 유미적이라고 단정하고, 고려 무신란 이전의 문학 역시 신라의 문풍을 이어 받아 화미하고 형식적인 만당풍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오래 전부터 비판되어왔다. 인종시대 고려를 방문했던 徐兢이 唐의 餘弊가 있다고 보고, 조선조 金宗直이 오로지 만당을 익혔다고 했으며, 현대의 문학사가들도 신라가 받은 만당풍의 영향으로 무신란 이전 고려의 문학을 유미적이고 형식주의적이라고 단정하고 있다. 현존하는 신라 한문학 작품이 대부분 만당을 직접 체험하고 그 시기 문사들과 교유했던 이들의 것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시각은 일견 타당한 것처럼 보인다. 더욱 당시 신라나 발해 문사들이 접촉했던 당의 인물들은 賈島·張喬·溫庭筠·羅隱·顧雲·皮日休·張籍·杜荀鶴·溫定筠 등과 같은 유명 문사들이었다. 특히 장교는 신라 문사뿐 아니라 관리 승려 등 신라인과의 교유가 폭넓게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문사뿐 아니라 도당유학승도 많아,≪전당시≫에 수록된 중국 문사 또는 승려들이 신라승에게 준 것은 12인 14수였다.1226)金保京,<『全唐詩』 所載 唐人贈新羅人詩 硏究>(梨花女大 碩士學位論文, 1992), 14쪽. 대체로 이들 시는 ‘送僧歸新羅’ 같은 시제로 승려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나 皮日休가 弘惠上人에게, 張喬가 僧 雅閣에게, 法照가 無著禪師에게 준 것처럼 그 이름이 명시된 시들도 있다.

 그러나 신라에 돌아와서 지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당에서의 저작도 정밀히 살펴보면 이들의 문학작품에 드러난 정신세계나 풍격이 당의 그것들과 상당한 차이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통일신라의 한문학이 내면적으로 스스로의 전통문화나 불교적 사유에 보다 밀접하게 바탕을 두고 있음이 드러난다.1227)호승희,≪신라 한시 연구-전개양상과 그 특성을 중심으로≫(梨花女大 博士學位論文, 1993), 232쪽. 작품에 표출된 정한 역시 그들이 국내외에서 겪었던 빈곤이나 외로움, 소외와 같은 절실한 현실문제에서 나온 것이어서 조탁과 윤색, 미려한 시구가 특성인 만당시와는 크게 다른 미감을 보여주고 있다.1228)이혜순,<賓貢諸子의 시에 관하여>(≪韓國漢文學硏究≫7, 1984), 28쪽. 산문의 문체에 있어서도 최승우와 최언위의 서신과 같은 만당 변려문의 흔적을 보여주는 경우도 있으나, 고려 태조시대까지 최언위가 전담했던 고승들의 비문은 소박하고 수사적 과장이 별로 드러나지 않는 문체로 이루어져, 그 이후 문사들의 화려한 미사로 가득찬 비문과 상당한 대조를 이룬다.1229)영향은 본래 쌍방적이기는 하나 당은 문화적으로 거대한 제국이었고, 신라 문사들이 직접 그 나라에 들어가 유명 문사들과 교유하면서 유학했으므로 그들이 당시 만당 시인들의 영향을 받았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함에도 신라 도당 문사들의 의식이나 작품세계에서 보이는 차이는 신라의 보수성에도 그 한 이유가 있었을 것으로 간주된다. 예로 일본 승려 圓仁의 기록에 의하면 신라 승려들이 한 곳에 모인 곳에는 신라 풍속을 유지하면서 불법을 닦았다고 한다. 그는 登州 文登縣 靑寧鄕 赤山村 赤山寺에서 신라인들이 講經禮懺을 신라 풍속대로 하고, 단 황혼과 寅朝 두 차례 禮懺 시에만 당풍대로 했으며, 그 나머지는 신라 언어로 했던 바 그 곳에 모인 승려나 속인·老少·尊卑자가 모두 신라인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開成 4년(839) 11월의 일이다(圓仁,≪入唐求法巡禮行記≫권 2, 謝海平 ;≪唐代詩人與在華外國人之文字交≫, 대만 : 문사철출판사, 1981, 134쪽에서 재인용).

 금석문에서 뿐만 아니라 통일신라의 이러한 문학적 특성은 빈공급제자들이 주도했을 고려 건국 초기의 문학에 그대로 이어졌을 것으로 보이지만, 그 후 과거제도의 성립으로 인한 장옥문학의 발생이라든지, 정치 외교적인 이유 때문에 오대의 귀화인을 많이 받아들이고 그들이 知貢擧를 자주 담당했으며, 외교문서가 빈번하게 저작되는 등의 여러 가지 원인에 의해 고려의 문학은 점차 화미한 문풍으로 전개되어 나간 것으로 파악된다.

<李慧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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