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9권 통일신라
  • Ⅴ. 문화
  • 5. 예술
  • 1) 회화

1) 회화

 통일신라의 미술이 국제적 감각과 독자적 창의성을 함께 구현한 지극히 수준높은 것이었음은 당시에 창출된 많은 문화재들을 통하여 분명하게 확인된다. 회화의 경우에도 예외가 아니었음이 현존하는 당시 유일의 그림인 국보 제196호<大方廣佛華嚴經變相圖>와 그 바깥쪽에 그려진<力士像>에 의하여 밝혀진다.1230)文明大,<新羅華嚴經寫經과 그 變相圖의 硏究-寫經變相圖의 硏究->1(≪韓國學報≫14, 1979), 27∼64쪽. 원색도판은 安輝濬,<繪畵>(≪國寶≫10, 藝耕産業社, 1984), 圖 16∼17 참조. 이 작품에 대한 소개에 앞서 기록에 보이는 이 시대 회화의 전반적인 양상(<그림 1·2>)에 관하여 대충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확대보기
<그림 1>華嚴經變相圖
<그림 1>華嚴經變相圖
팝업창 닫기

확대보기
<그림 2>華嚴經寶相華文圖
<그림 2>華嚴經寶相華文圖
팝업창 닫기

 먼저 통일신라시대에 활동했던 화가들로 率居·靖和·弘繼·金忠義 등이 주목된다. 솔거에 관해서는 다음의 기록이 많은 참고가 된다.

솔거는 신라 사람이다. 그 출신이 한미하므로 그 族系는 기록하지 않는다. 태어나면서부터 그림을 잘 그렸다. 일찌기 皇龍寺의 벽에 늙은 소나무를 그렸는데 동체와 굵은 가지의 껍질, 잔가지와 잎의 구부러진 모습 등을 까마귀·솔개·제비·참새 등이 이따금 보고 날아들다가 부딪쳐 떨어지곤 하였다. 세월이 오래되어 색이 어두워졌으므로 절의 중이 丹靑으로 손질을 하였더니 까마귀와 참새 등이 다시는 오지 않았다. 또한 경주 芬皇寺의 觀音菩薩像과 진주 斷俗寺의 維摩像도 모두 그의 필적이다. 세상에서는 그의 그림이 神畵라고 전해진다(≪三國史記≫권 48, 列傳 8, 率居).

 이 기록에 의거하여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이 밝혀지거나 추정된다. 첫째로 그는 일반회화만이 아니라 불교회화를 겸장했다는 점과 벽화도 그렸음이 확인된다. 둘째로 그의 그림은 대단히 사실적이고 살아서 꿈틀대듯 氣韻生動하는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셋째로 그는 채색을 먹과 함께 적극적으로 구사하였으며 청록산수화를 그렸을 가능성이 높다고 믿어진다. 소나무를 사실적으로 그리려면 청색·녹색·갈색을 쓰지 않으면 안되는데, 이 세 가지 색깔은 청록산수화의 기본을 이루는 색채이다. 그런데 청록산수화는 중국의 수·당대에 형성되었고 특히 당대의 李思訓과 李昭道의 부자로 대표되며 北宗畵의 전형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또한 이 화풍은 일본에도 전해져 고대 大和繪(야마토에)의 토대가 되기도 하였다. 이렇게 보면 청록산수화의 전통은 우리 나라에도 통일신라시대에 전해졌을 가능성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넷째로 이상의 여러 가지 상황들을 종합해보면 솔거는 삼국시대의 신라 사람이었기보다는 통일신라시대의 화가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된다. 고졸성을 벗어나지 못했던 삼국시대의 회화 수준으로는 각종 새들이 착각하고 날아들 정도의 기운생동하는 소나무를 그릴 수 없었을 것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솔거는 청록산수화에 뛰어났으며 일반회화와 불교회화를 겸장했던 화가, 사실적 표현과 함께 그림에 氣를 불어 넣을 능력을 지녔던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인 거장이었던 인물로 판단된다. 그렇다면 황룡사의<老松圖>는 황룡사 창건시에 그려졌을 가능성보다는 후대에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고 보여진다. 솔거가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에 창건된 진주의 斷俗寺에 유마거사상을 남겼다는 것도 결국 그가 삼국시대의 신라보다는 통일기의 신라에서 활동했음을 입증하는 것이라 하겠다.1231)安輝濬,≪韓國書畵史≫(一志社, 1980), 49쪽 주 12) 참조.

 이렇게 볼 때 솔거를 眞興王(540∼575) 때의 인물로 아무런 근거의 제시 없이 추정한 조선 중기 李睟光(1563∼1628)의≪芝峰類說≫의 기록이나 神文王(681∼691) 때에 중국으로부터 張僧繇가 우리 나라에 들어와 솔거로 개명하였다는<栢栗寺重修記>의 터무니없는 기록 등은 재고되어야 마땅하다고 생각된다.1232)吳世昌,≪槿域書畵徵≫(普文書店, 1975), 1쪽 참조. 다만<백률사중수기>가 솔거를 통일신라 후기의 인물로 적은 것은 흥미롭다.

 한편<東史類攷>에는 솔거가 농가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그림에 뜻을 두어 나무를 할 때는 칡뿌리로 바위에 그림을 그렸고 농사지을 때는 호미 끝으로 모래에 그림을 그렸으며 벽촌에서 스승이 없어 스스로 자성하였다는 것과, 솔거가 밤이나 낮이나 마음으로 천신에게 빌어 神敎를 받고자 원한 끝에 단군을 만나 신의 붓을 받고 명공이 되었으며 단군 어진을 거의 천 본이나 그렸다는 것을 전하고 있다.1233)위와 같음. 이 기록도 후대에 꾸며진 것인 듯한 느낌이 강하게 든다. 단군의 초상화를 많이 그렸다는 점이 관심을 끈다.

 통일신라시대의 화가로서 솔거 다음으로 관심을 끄는 것은 靖和와 弘繼인데 이들은 모두 景明王(917∼923) 때의 승려화가로서 興輪寺의 벽에 普賢菩薩像을 그렸음이≪삼국유사≫의 기록에 보이며, 이 그림들은≪삼국유사≫의 저자인 一然(1206∼1289)의 생존시까지 남아 있었다.1234)≪三國遺事≫권 3, 塔像 4, 興輪寺壁畵普賢. 이들은 불교회화 전문가들로 고신라시대인 6세기에 창건된 흥륜사의 벽에 통일신라시대인 9세기에 벽화를 그렸음이 주목된다. 솔거의 황룡사<노송도>의 제작시기와 관련해서도 참고를 요하는 점이라 하겠다.

 이 밖에 통일신라의 화가로 당나라에 건너가 활약한 金忠義가 관심을 끈다. 그는 당나라의 대표적 화론가였던 張彦遠의 저서인≪歷代名畵記≫에 “孫仁貴와 德宗朝(779∼805)의 장군인 김충의는 모두 巧絶함이 보통사람들을 능가하는데, 이들은 (오도자의) 화적을 함께 공부하여 모두 精妙하나 격은 그다지 높지 않다”라고 기록되어 있고1235)張彦遠,≪歷代名畵記≫권 9, 吳道子. 또한≪新唐書≫에는 “신라 사람 김충의는 工巧로써 小府監에 운좋게 발탁되었다”라고 적혀 있다.1236)≪新唐書≫권 169, 列傳 94, 韋貫之.
≪舊唐書≫권 158, 列傳 108, 韋貫之.
이 기록들로 보면 그는 통일신라시대에 장군 출신으로 당나라에 건너가 화가로서 활동하며 출세하였고 오도자 계통의 그림에 뛰어났던 인물임을 알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당나라의 그림들, 특히 궁정취향이 짙은 작품들이 고신라에 이어 적극적으로 수입되었던 것으로 믿어진다. 북송의 郭若虛가 지은≪圖畵見聞誌≫권 5, 周昉조에 “貞元年間(785∼804)에 신라인들이 후한 값으로 (주방의 작품) 수십 권을 사서 가지고 갔다”는 기록은 이를 잘 말해준다.1237)郭若虛,≪圖畵見聞誌≫권 5, 周昉. 주방은 당대의 궁정취향이 강한 인물화에 가장 뛰어났던 화가였다.

 이상의 단편적인 기록들은 통일신라시대의 회화가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당나라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었으며 일반회화와 불교회화 양면에서 대단히 높은 수준으로 발달하였음을 밝혀준다.

 이러한 사실을 보다 뚜렷하게 밝혀주는 것이 현재 유일하게 유존되고 있는 작품인<대방광불화엄경변상도>와<역사상>이다(<그림 1·2>). 이 그림들은 백지에 먹으로 필사된 두 개의≪화엄경≫두루마리들과 함께 1977년에 밝혀졌다. 80권으로 된≪화엄경≫중에서 43권∼50권을 담고 있는 두루마리의 앞부분에 붙어 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두루마리의 끝에 적혀 있는 발문에 따르면 이<사경>과<변상도>는 緣起法師의 발원에 의하여 天寶 13년(754) 8월 1일에 시작되어 이듬해인 천보 14년 2월 14일에 완성되었고, 불보살상 등은 義本·丁得·光得·豆烏 등이 분담하여 제작하였음이 밝혀진다.1238)安輝濬, 앞의 책, 45∼57쪽 참조. 석굴암과 불국사가 조영된 시기에 제작된 것이 주목할 만하다.

 자주색의 닥종이에 먹선과 금선을 위주로 하고 은선을 곁들인 이 그림들은 8세기 중엽의 불상 양식과도 상통하여 그 시대양식을 잘 드러낸다. 2층의 건물을 배경으로 사자좌 위에 앉아 있는 보살형의 본존과 그 좌우의 보살들이 보여주는 짜임새 있는 구성, 균형잡힌 부드러운 몸매, 자연스러운 자태, 섬세한 描線, 화려하고 아름다운 분위기 등이 돋보인다. 이<변상도>의 반대쪽에는 화염문과 보상화문에 둘러싸인<역사상>이 그려져 있는데 그의 불거진 장딴지 근육은 석굴암의 역사상 조각을 연상시켜 준다. 이런한 단편적인 예와 문헌사료로만 보아도 이 시대 회화가 불상이나 공예·건축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국제적 보편성과 독자적 특성을 지니며 높은 수준으로 발전하였음을 알 수 있다.

<安輝濬>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