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9권 통일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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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 예술
  • 2) 서예
  • (1) 초기의 서풍

(1) 초기의 서풍

 통일초에 유입된 초당서풍은 이후 통일신라시대 전반에 걸쳐 절대적 영향을 미치면서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우선 초기의 유입을 보여주는 예로서 당나라 군사들의 戰勝을 기록한 명문이 백제의 도읍이었던 부여에 몇몇 전하고 있다. 定林寺址五層石塔의 塔身과 국립부여박물관 소장의 圓形石槽에 새겨진 大唐平百濟碑銘(660) 및 부여 부소산에 세워졌던 唐劉仁願紀功碑(663?)가 그것이다. 이들은 모두 저수량(596∼658)의 해서풍을 따랐는데, 당시 저수량이 사망한 직후였다는 점에서 그의 글씨가 유행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사진 1>). 또한 고구려의 유민으로 당나라에 귀화했던 泉男生·泉男産·高慈의 墓誌 그리고 백제의 유민으로 당에 귀화한 扶餘隆(615∼682)의 묘지에 보이는 구양순·저수량류의 해서풍 역시 통일 초기 서예의 경향을 보여주는 예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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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唐劉仁願紀功碑
<사진 1>唐劉仁願紀功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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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밖에 충남 연기군을 중심으로 百濟系 유민들이 조성한 것으로 癸酉銘千佛碑像(673)·癸酉銘全氏阿彌陀三尊石像(673)·戊寅銘四面碑像(678)·己丑銘阿彌陀如來諸菩薩石像(689) 등의 碑像이 전하는데, 이 비상에 새겨진 造像記 또한 통일초 백제지역에 초당서풍의 유입에 따라 기존의 서예에 일단의 변화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아울러 石碑의 형식에 있어서도 유인원기공비와 같이 표면을 매끈하게 갈은 직육면체의 빗돌(碑身)에 머리 부분을 이무기 모양으로 새긴 螭首를 갖추고 있어 삼국통일기를 즈음하여 唐代의 정비된 石碑形式이 전래되었음도 확인할 수 있다.

 통일 초기의 대표적인 석비로서 경주시 서악리고분군 초입에 세워져 있는 太宗武烈王碑(661)가 있다. 이 비는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무열왕의 陵碑로서 唐代 석비의 전형을 따랐을 뿐만 아니라 龜趺와 이수의 생동감있는 조각이나 ‘太宗武烈大王之碑’라고 새긴 篆額의 서풍 등에서 초당양식의 전반적인 유행을 짐작하게 한다(<사진 2>). 이런 점에서 일찍부터 망실되었던 비신의 글씨도 초당서풍을 따랐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이는 四天王寺址 출토의 석비(통일 직후), 文武王(재위 661∼680)의 능비(<사진 3>), 그리고 金仁問(629∼694)의 묘비 등 통일 직후에서 7세기말에 걸쳐 건립된 석비의 글씨가 대부분 구양순류의 해서를 따랐다는 점에서 충분히 짐작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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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太宗武烈王陵碑
<사진 2>太宗武烈王陵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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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3>文武王陵碑片
<사진 3>文武王陵碑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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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일 초기의 해서가 초당시대에 유행했던 서풍을 수용했던 것에 비하여 行書에서는 주로 東晉時代 王羲之의 고전적 행서풍이 널리 유행했다. 이에 따라 왕희지의 행서에 뛰어난 많은 명서가들이 배출되었고 나중에는 왕희지의 필적을 모아 새긴 集字碑도 적지 않게 건립되었다. 이와 같이 初唐三大家의 해서풍과 왕희지의 행서풍이 주로 유행했던 데에는 당시 중국 서예의 조류와 깊은 관련이 있다. 특히 唐 太宗이 왕희지 글씨를 지나치게 애호했고 그의 치세 아래에서 초당삼대가가 배출되었던 사실은 이를 잘 대변해준다.

 이 밖에 통일 초기의 초서에 관해서는 삼국시대 이래 통일초까지의 초서 필적이 매우 드물기 때문에 상세한 상황은 알 수 없지만, 아마 행서에서처럼 왕희지 등의 古法을 바탕으로 했다고 여겨진다. 篆書에 있어서는 몇몇 석비의 篆額으로 전하고 있어 대체적인 양상을 짐작할 수 있는데, 秦代로부터 전래하던 엄정한 짜임과 획법의 小篆風을 기반으로 하여 唐代 특유의 전서풍도 함께 사용되었다. 隷書 필적은 남아 있지 않아 그 면모를 전혀 알 수 없으나 전서에서처럼 唐風을 수용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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