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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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9권 통일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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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 서풍의 발전

(2) 서풍의 발전

 통일기를 지나 唐과의 교섭이 보다 잦아짐에 따라 통일신라의 미술은 전반적으로 이전에 비해 폭넓게 전개되었다. 서예 분야에서도 초당의 楷書風을 위주로 했던 통일초에 비해 보다 다양한 글씨들이 수용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8세기 이후로는 통일신라의 서예가 높은 수준에 올라 많은 명품과 명서가를 낳았다. 그러한 면모를 보여주는 서예사료로서 몇몇 眞蹟과 함께 다수의 금석문이 전하는데, 특히 왕의 陵碑와 일반인의 墓碑 등 세속적인 금석문을 위시하여 高僧들의 塔碑와 造像記·石塔記·石經·鐘銘·舍利函銘 등 불교관계 금석문이 다수 전하고 있다.

 우선 고승들의 비로서 名僧 元曉(617∼686)의 행적을 기린 경주의 高仙寺誓幢和尙碑(800∼808?)는 구양순의 행서풍을 따른 점이 주목된다(<사진 4>). 또 조상기로서 경주의 甘山寺址石造阿彌陀如來立像 및 石造菩薩立像(719)의 광배에 새겨진 예가 대표적이다. 명문은 薛聰이 짓고 京融과 金驟源이 각각 썼는데 부분적으로 초당 해서풍의 영향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아직까지 고신라시대 이래의 고박한 필치가 상당히 남아 있는 예이다. 또한 경주의 栢栗寺址 六面石幢記(817?)는 소위 異次敦殉敎碑라고 불리는 것으로 저수량의 해서풍에 기반했으면서도 아직까지 삼국시대의 해서풍이 잔존해 있는 예이다. 석탑기로는 경주시 구황동 皇福寺址三層石塔에서 발견된 金銅舍利函(706)의 뚜껑에 새겨진 명문이 대표적인데, 이 명문은 성덕왕이 아버지 신문왕과 어머니 神睦王后 및 형 효소왕의 명복을 위해 석탑을 조성한다는 내력을 새긴 것으로 마치 종이에 쓴 듯한 유려한 필치가 돋보인다(<사진 5>). 이 밖에 鐘銘으로 강원도 오대산의 上院寺銅鐘(725)과 국립경주박물관 소장의 聖德大王神鐘(771) 등의 명문이 대표적이다. 그 중에서도 성덕대왕신종은 당시 재상이던 金弼奧가 명문을 짓고 金□晼과 洪端이 썼는데, 주조된 글씨라서 본래의 필치를 살펴보기는 어려우나 짜임이나 획법에서 초당서풍과는 다른 경향을 보이고 있어 주목되는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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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4>高仙寺誓幢和尙碑
<사진 4>高仙寺誓幢和尙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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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5>皇福寺址三層石塔 金銅舍利函銘
<사진 5>皇福寺址三層石塔 金銅舍利函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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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일신라시대의 진적으로 몇 가지 예가 전한다. 이 가운데 호암미술관 소장의 白紙墨書華嚴經(754∼755)은 우리 나라 사경 가운데 가장 오랜 것으로서 唐代 사경에 못지 않은 맑고 굳센 필력을 지니고 있어 신라 사경의 높은 수준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사진 6>). 그리고 일본 正倉院에 소장된 新羅帳籍(775·815 등)은 西京(현 淸州)의 한 촌락과 인근 촌락의 넓이와 戶口·牛馬·土地의 증감 등을 기록한 행정문서로서 자연스러운 필사체를 보여준다(<사진 7>). 이 밖에 경북 양북면 感恩寺址西三層石塔에서 출토된 白紙墨書와 경주 안압지 등에서 출토된 木簡 및 土器의 墨書에서도 당시의 필사체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이와 아울러 세계 最古의 목판인쇄본으로 잘 알려진 경주 佛國寺 釋迦塔에서 발견된 無垢淨光大陀羅尼經(751?)도 당시의 사경 서풍을 이해하는 데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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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6>白紙墨書華嚴經
<사진 6>白紙墨書華嚴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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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7>新羅帳籍
<사진 7>新羅帳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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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편 통일신라시대에는 다수의 명서가들이 출현하였다. 그 중에서도 우리나라의 서예를 부흥시킨 명서가로서 추앙받고 있는 金生(711∼?)을 들지 않을 수 없다. 김생에 관해서는≪三國史記≫권 48, 列傳 8, 김생전에 전하는데, 그곳에는 그가 어려서부터 글씨에 능했으며 여든살이 넘도록 쉬지 않고 글씨에만 전념하여 隷書와 行草가 모두 入神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적혀 있다. 그런데 오늘날 전하는 그의 필적은 모두 해서·행서·초서이며 예서는 전혀 전하지 않는다. 이는≪삼국사기≫가 저술된 시기에는 오늘날 楷書(正書)라고 통칭하는 서체를 ‘隷書’라고도 불렀기 때문에 그렇게 기록될 수도 있다. 여하튼 김생은 해서와 행초에 장기를 보였다고 하겠는데, 이에 대해서는 그가 불교를 애호하여 장가들지 않고(好佛不娶) 이곳 저곳 頭陀行을 수행하면서 佛經의 필사에서 뛰어난 기량을 발휘했다거나 精細한 해서를 잘 구사했다는 등의 기록으로 충분히 짐작된다.1239)秦弘燮 편,≪韓國美術史資料集成 1-三國時代∼高麗時代-≫(一志社, 1987), 487∼491쪽.

 김생은 당시 유행했던 歐陽詢 등의 초당서풍을 따르지 않고 東晉 王羲之를 위시한 南朝의 서풍을 바탕으로 하여 활발한 운필과 변화로운 필치로써 특유의 개성적 서풍을 이루었다. 고려의 사신 洪灌이 宋나라 수도에 들어가 그곳의 한림학사들에게 김생의 行草 글씨를 보였더니 크게 놀라며 “오늘 왕희지 필적을 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하자 홍관이 “그게 아니라 신라 김생의 글씨요”라고 했으나 끝내 믿지 않았다는≪삼국사기≫의 기록은 왕희지 글씨에 대한 그의 깊은 이해를 잘 대변해준다. 이러한 명성으로 김생은 후대의 비평가들로부터 ‘東方의 書聖’이란 높은 찬사를 들었는데 고려의 李奎報와 같은 사람은 우리 나라의 역대 명서가를 품평하면서 그를 ‘神品第一’로 평가하기도 했다.1240)李奎報,≪東國李相國集≫後集 권 11, 東國諸賢書訣評論序.

 오늘날 전하는 김생의 필적 가운데 대표적인 예는 경북 봉화에 전래하던 太子寺朗空大師白月栖雲塔碑(954)이다(<사진 8>). 이 비는 통일신라시대의 고승 낭공대사의 탑비로서 고려 광종 때 僧 端目이 김생의 행서·초서 필적으로 集字한 것이다. 마치 唐 太宗 때 僧 懷仁이 왕희지의 행서·초서 필적을 모아 大唐三藏聖敎序(集字聖敎序)를 집자했던 것과 흡사하다. 이 비는 김생의 글씨를 연구하는 데에 있어 절대적인 기준이 되는데, 한 글자 안에서 굵고 가는 획을 섞어 미묘한 변화를 주었으며 굽고 곧은 획을 섞어 陰陽向背의 묘를 잘 살려내었다. 또한 왕희지체 자형에 바탕했으면서도 상투적인 틀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짜임을 구사하여 파격적이면서도 古格을 유지하는 그의 천재적 예술성이 잘 발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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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8>朗空大師白月栖雲塔碑
<사진 8>朗空大師白月栖雲塔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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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밖에 조선시대에 간행된 김생의 필적으로 田遊岩山家序와 廬山瀑布詩 등이 전한다. 이 가운데 전유암산가서는 낭공대사비와 같은 파격적인 필치로 글씨의 운치를 살리는 데에 힘쓴 그의 대담한 정서가 잘 나타나 있다. 여산폭포시 大字行書는 조선시대에 만들어진≪大東書法≫이란 목판본에 실려 있는데, 장쾌한 폭포수와 같은 활달한 획법과 힘찬 운필은 고금의 독보였다는 평가를 듣기에 충분하다(<사진 9>). 이런 점에서 김생은 우리 나라 서예를 부흥시킨 명서가로 간주되면서 널리 추앙을 받았고, 또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쳐 많은 이들로부터 추종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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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9>廬山瀑布詩
<사진 9>廬山瀑布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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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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