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9권 통일신라
  • Ⅴ. 문화
  • 5. 예술
  • 3) 조각
  • (1) 불교조각

가. 7세기 후반의 불교조각

 신라는 통일을 완성한 문무왕 8년(668) 이후에도 唐과의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적극적으로 불교문화를 수용하였다. 남아 있는 이 시기의 조각들을 거의 같은 시대의 중국 불상과 비교하여 보면 그 형식이나 표현양식에서 별로 큰 차이가 없이 전개되었다. 또한 통일의 과정에서 삼국의 많은 유민들이 일본에 건너가서 일본 불교미술 발전에도 큰 역할을 담당하였는데 7세기 후반의 사신교류로 보아서 당과 신라보다는 신라와 일본과의 왕래가 더 빈번하게 나타나고 있을 만큼 당시의 동북아 불교문화의 성립과 발전에 신라의 역할이 컸음을 알려준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우선 옛 백제와 고구려 지역의 불교문화를 통합시키는 계기를 마련하여 다양한 지방 전통이 신라조각 양식의 형성과정에 흡수되는 역할을 하였다. 옛 백제의 영토인 충청남도 연기군 지역에서 출토된 몇 예의 납석제 佛碑像은 출토지역이나 양식으로 보아 백제조각의 전통을 이어주는 중요한 예이다.1242)黃壽永,<忠南燕岐石像調査>(≪藝術院論文集≫ 3, 1964;≪韓國의 佛像≫, 文藝出版社, 1989, 227∼272쪽).
秦弘燮,<癸酉銘 三尊千佛碑像에 대하여>(≪歷史學報≫17·18, 1962;≪新羅·高麗時代 美術文化≫, 一志社, 1997, 302∼330쪽).
연기군 碑巖寺址에서 출토된 3개의 불비상 중에서 癸酉年銘이 있는 사면비상은 정면에 아미타3존불이 조각되어 있고 그 주위에 제자·인왕 등의 권속이 좌우로 배치되었다. 이 비상의 전면 가장자리에 새겨진 명문에서 본존이 아미타불이고 공양인들의 이름 중에는 乃末·大舍·小舍 등의 신라 관직과 백제의 관직 達率, 그리고 백제의 姓氏인 全氏·木氏·眞牟氏 등이 발견된다. 신라 통일 후 백제유민에게 신라 관직 등에서 합당한 지위를 주었다는 역사기록에 의거하여 이 비상군은 백제지역에서 만들어진 상으로 계유년을 통일신라초인 문무왕 13년(673)으로 추정하고 있다. 따라서 같은 절에 있던 또 다른 己丑年銘의 아미타불비상은 신문왕 9년(689)으로 추정하며(<그림 1>), 나머지 하나의 비상에는 銘文이 없으나 반가사유상이 본존으로 중국 隋代에서 유행한 불상에 늘어진 술 장식이 보인다. 이 연기군 출토의 불비상군 중에는 조치원 瑞光庵에서 발견된 계유명삼존천불비상과 西面 月下里 蓮花寺에 있는 戊寅年불비상 등 2예를 포함하여 조각양식이 같은 것을 알 수 있다. 부조로 표현된 상들은 표면이 많이 마멸되어 자세히 관찰하는 것이 불가능하나 양식적으로 보면 干支年의 일주기인 60년 앞서는 시기로 보아도 큰 무리가 없을 정도로 古式을 따르고 있다. 따라서 이들 불비상군은 사라진 백제의 지방양식이 통일신라 초기에 그 지방 전통을 이어서 제작되고 차차로 통일신라 불상양식의 성립에 다양성을 부여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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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己丑銘阿彌陀佛碑像
<그림 1>己丑銘阿彌陀佛碑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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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와 같이 삼국의 조각 전통이 통일신라로 이어지면서 변하는 또다른 예로는 경상북도 군위의 팔공산에 있는 석굴 속에 모셔진 아미타삼존석불좌상으로 이 경우에는 고신라의 석조 불상양식을 좀 더 발전시킨 예로 볼 수 있다(<그림 2>). 개울 옆 암벽위로 약 6m 되는 곳에 굴을 파고 다른 지역에서 가져온 화강석으로 석조불좌상 3구를 조각하여 안치하였다. 왼쪽 협시보살입상의 보관 중앙에 아미타좌불이 있고 오른쪽 협시보살상의 보관에는 정병이 있는 것으로 보아 본존이 아미타삼존상임을 알려 준다. 본존의 얼굴은 몸체에 비해서 크고 어깨가 넓으며 대좌위로 덮어 내린 군의의 주름표현은 삼국적인 조형성을 보여준다. 웃음이 사라진 부처의 엄숙한 얼굴표정이나 觸地印에 가까운 손모습 등은 통일기에 들어와서 나타나기 시작하는 새로운 불상형식이다. 양쪽 협시보살상들의 균형잡힌 몸매와 유연하게 허리를 굽힌 三屈의 자세, 그리고 늘어진 천의의 부드러운 주름표현은 경주의 三花嶺 미륵삼존상에서 보이던 신라 말기의 굳어진 조각양식에서 신체비례나 조각수법이 좀 더 발전된 양상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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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軍威阿彌陀三尊佛像
<그림 2>軍威阿彌陀三尊佛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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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세기 후반 신라의 통일과 더불어 새로이 등장하는 불교도상으로 四天王像이 알려져 있다. 경주시 狼山 남쪽 끝에 위치한 사천왕사지는 통일 직후 唐의 침략을 부처의 힘으로 저지하기 위하여 법회를 열어 발원한 후 문무왕 19년(679)에 완성한 호국불교의 사찰로 두 개의 목조탑을 구비한 쌍탑가람이었다. 이곳 절터에서 나온 綠色 鉛釉를 입힌 사천왕상은 여러 개의 파편으로만 남아 있는데 그 중 복원해본 두 종류의 상은 각기 활과 화살 그리고 창을 들고 두 다리를 내려뜨려 악귀를 밟고 있는 형상으로 갑옷이나 다리 근육의 사실적인 표현이나 고통스러워 보이는 악귀의 얼굴표정은 이 시대 신라 조각의 뛰어난 표현수법을 보여준다.1243)姜友邦,<四天王寺址出土 彩釉 四天王 浮彫像의 復元的 考察>(≪美術資料≫ 25, 1980;≪圓融과 調和≫, 202∼2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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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感恩寺舍利器金銅四天王像
<그림 3> 感恩寺舍利器金銅四天王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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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다른 예의 사천왕상은 경주 동북쪽 해안가에 문무대왕의 산골처로 알려진 大王岩 못미쳐 있는 感恩寺址의 동·서쌍탑에서 나온 상자형 사리함에 부착되었던 사천왕상을 들 수 있다(<그림 3>). 이 절은 통일을 이룩한 문무왕의 유언에 그가 죽은 후 호국대룡이 되어 일본의 침략을 막고자 했던 염원을 받들어 신문왕이 재위 2년(682)에 완성한 사찰이다. 1960년 감은사의 서쪽 탑내에서 발견된 정교한 금동사리함과 그 네 면에 부착되어 있는 사천왕상은 이미 잘 알려져 있으며, 1996년 다시 동탑에서 새로이 나온 사리기의 금동외함에도 비슷한 형태의 사천왕상이 표현되어 있다. 보존상태가 모두 완전한 것은 아니나 한 손을 허리에 대고 다른 손에 탑이나 창을 들고 서 있는 천왕상들의 자세나 갑옷의 형상은 당시 唐의 사천왕상에서 보이는 특징을 따르고 있는데 특히 중국 龍門석굴에서 672∼675년간에 조성된 奉先寺洞의 입구 양쪽에 서 있는 사천왕상과 비교가 된다. 또한 이 봉선사동의 본존의 대좌 벽면에 부조된 사천왕상들은 앞서 관찰한 사천왕사지 출토의 녹유 천왕상들과 자세나 갑옷에서 유사하다. 이들 7세기 후반의 통일신라기 사천왕상들은 당에서 새로이 성립된 사천왕상의 圖像이 전래되어 수도 경주를 중심으로 유행하였던 사천왕상의 형식과 양식을 보여주며 신라와 당의 불교도상이나 양식의 비교에서 큰 차이가 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1244)1960년도 감은사 조사보고서로는 金載元·尹武炳,≪感恩寺址發掘調査報告書≫. (國立博物館特別調査報告 2, 乙酉文化社, 1961)이 있고, 1996년의 동탑 출토 자료에 대해서는 아직 정식 보고서가 나오지 않았으나 간략한 보도자료가 있다(≪보존과학연구≫ 18, 국립문화재연구소, 1997, 205∼219쪽).

 7세기 후반 통일신라 초기의 불상에서 당시 중국 불상과 도상이나 양식상으로 국제적인 공통성을 보여주는 또다른 대표적인 예가 경주 雁鴨池에서 출토된 금동판불이다. 문무왕 14년(674)에 건설하기 시작한 안압지와 그 주변에 세워진 건물터의 바닥에 깔았던 보상화문 전돌에 문무왕 20년에 제작되었다고 새겨진 명문이 발견되어 대개 이 무렵 東宮으로 알려진 건물들이 완성되었다고 본다. 그리고 이러한 7세기말의 통일신라양식을 보여주는 중요한 불상군이 안압지에서 발견된 10구의 금동판불이다. 2구의 삼존불좌상은 본존의 손이 설법의 자세인 轉法輪印이고 나머지 보살좌상 8구는 모두 두 손을 모은 합장인인데 광배 둘레에 남아 있는 못이나 밑에 달린 2개의 촉으로 보아 아마도 소형의 목조불감 같은 데에 부착하여 궁궐내에서 예배상으로 모셨던 것으로 생각된다(<그림 4a·4b>). 특히 설법인의 불상은 인도 굽타시대에 유행하기 시작한 형식으로 중국에는 7세기초에 많이 나타나기 시작하여 당 초기의 돈황석굴의 벽화나 용문석굴의 조각에도 보인다. 이 안압지상은 그 도상으로 보면 일본의 法隆寺(호류지) 금당 벽화의 아미타삼존의 본존불 표현과도 유사하고 또 동경국립박물관 소장을 비롯하여 몇 예의 금동제 押出佛과도 비교되어 7세기말 신라 불상이 보여주는 국제적인 양식을 뒷받침해 준다. 아울러 일본의 7세기말 내지 8세기초의 상들과도 연결지을 수 있는 귀중한 예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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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a>雁鴨池出土金銅三尊板佛像
<그림 4a>雁鴨池出土金銅三尊板佛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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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b>雁鴨池出土金銅菩薩造像板佛
<그림 4b>雁鴨池出土金銅菩薩造像板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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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세기의 불상 중에 역사기록이나 명문으로 그 제작연대나 불상의 명칭이 확인되는 중요한 예는 경주 낭산 동쪽 구황동의 皇福寺 절터로 알려진 곳에 세워진 3층석탑에서 나온 사리함에서 발견된 2구의 순금제 불상이다. 이 두 상을 넣었던 네모난 사리함의 뚜껑 안쪽에 새겨진 명문에 의하면 孝昭王 원년(692)에 선왕인 신문왕을 위해서 그 부인 神穆太后와 아들 효소왕이 탑을 세웠고, 이 두 분이 돌아가시자 聖德王 5년(706)에 왕이 불사리 및 다라니경과 아미타상을 넣었다는 기록이 있다.1245)李弘稙,<경주 狼山東麓 3층석탑내 발견품>(≪韓國古文化論攷≫, 韓國文化叢書 14, 1954), 37∼59쪽.
金元龍,<韓國 美術史 硏究의 2, 3問題>(≪亞細亞硏究≫7-3, 1964), 56∼67쪽.
발견된 2상 중에 입상은 오른손이 與願印이고 왼손은 가사의 한 끝을 잡았으며 얼굴 표정이 굳었고 옷주름 표현이 딱딱한데 비해서 다른 한 구의 여래좌상은 오른손이 여원인이고 왼손은 무릎 위에 얹었는데 주름의 표현이 자연스럽고 부드러우며 주조기술면에서도 훨씬 발달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양식이나 당시에 유행한 불상의 수인으로 보아도 이 불좌상이 성덕왕 5년(706)에 넣은 아미타상으로 추정된다.

 형식이나 표현양식에서 안압지상보다 좀더 古式인 구황동탑 출토의 여래입상은 효소왕 원년(692) 처음으로 탑을 세울 때에 넣은 것으로 추정되어 신문왕이 평소 예배하던 念持佛이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성덕왕 5년에 다라니경과 함께 넣었다고 생각되는 불좌상은 둥글고 통통한 얼굴에 돋으라지게 입체감이 강조된 옷주름 처리에서 당시 唐 조각의 영향을 반영하는 불상양식의 특징을 알 수 있다. 또한 투각된 광배에 나타나는 정교한 화염문과 장식적인 당초문 및 좁쌀 같이 작은 무늬를 동그랗게 찍어낸 魚子文 기법은 당시의 뛰어난 금속공예기술도 보여준다. 따라서 이 두 불상을 당시 왕실과 관련있는 경주지역의 불상 제작자가 만든 것으로 700년 전후의 통일신라 불상양식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역사기록이나 명문에 의해 소개된 위의 상들 이외에도 더 많은 상이 예배되었을 것이고 지금 남아 있는 많은 불·보살상들이 이 시기에 제작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출토지나 정확한 연대를 확인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삼국시대 말기로 보고 있는 불·보살상 중에도 7세기 후반에 속하는 상들이 포함되고 있을 것이며 또한 7세기 후반에 일본에서 제작된 상들과 비교하여 보면 7세기 후반 신라상들의 양식적 특징을 추정해 볼 수도 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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