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9권 통일신라
  • Ⅴ. 문화
  • 5. 예술
  • 5) 건축
  • (2) 궁실 및 연못

(2) 궁실 및 연못

 문무왕(661∼681)은 재위 8년에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삼국통일을 이룩하였고 고구려·백제를 정복함으로써 얻게 된 막대한 노동력과 재물을 활용하여 경주를 통일왕조의 수도답게 변모시키려 하였다. 도시 전체의 변모는 이룩하지 못하였으나 선왕으로부터 물려받은 궁궐을 새롭게 수리하고 그 이름을 東宮이라 하였다. 동궁 외에도 壤宮을 짓기도 하였으나 그 위치는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았다. 문무왕은 재위 후반부인 14년부터 21년까지 계속 궁궐을 확장하고 새로운 궁궐을 짓는데 심혈을 기울였고 경주 전체를 변모시키려 하였던 것 같다. 문무왕 14년 2월에는 雁鴨池를 파고 인공의 산을 만들어 그 곳에 화초를 심고 진기한 짐승들을 길렀다. 문무왕 19년 2월에는 궁궐을 매우 웅장하고 장려하게 중수하였고 그 해 8월에는 동궁을 짓고 궁궐 안팎에 있는 여러 개의 문에 걸 현판 이름을 정하기도 하였다.

 문무왕에 이어 즉위한 신문왕(681∼691)은 전제왕권을 구축한 왕으로 귀족 세력을 탄압하고 통일에 따른 중앙과 지방의 여러 행정과 군사조직을 완성하였다. 중앙의 행정조직을 5단계로 정비하고 지방에 九州 五小京을 설치하였고 수도와 지방에 각각 九誓幢과 十停 등 군사조직을 배치하였다. 또 신문왕 6년(686)에 土木·營繕을 담당하는 例作府를 설치하기도 하였다. 신문왕 9년 가을에 왕은 도읍을 달구벌(대구)로 옮기려 하였으나 실현하지는 못하였다. 다만 도시에 활력을 불어넣을 여러 가지 시설과 궁궐을 마련하는 데만 주력하였다.

 효소왕 4년(695)에는 西市와 南市를 두었고 성덕왕 16년(717)에는 신궁을 창건하였으며 성덕왕 26년에는 永昌宮을 수리하였다. 효성왕 3년(739)에는 善天宮이 완성되고 경덕왕 3년(745) 7월에는 동궁을 수리하였으며 동왕 6년에는 永明神宮으로 태후(효성왕비 김씨)가 옮겨가기도 하였다. 경덕왕 16년에는 영창궁을 중수하였으며 19년 2월에는 궁안에 큰 못을 파고 궁 남쪽의 蚊川에 月精橋와 春陽橋를 놓았다. 못의 위치는 아직까지 확인하지 못하였고 월정교는 다리 유구가 남아 있어 최근 발굴조사가 이루어졌으며 이 때 석교 서쪽에서 나무다리의 유구도 발견되어 원래 월정교는 나무다리였음이 확인되었다. 춘양교는 일정교라고도 하며 국립경주박물관 서쪽에 유구가 남아 있다. 경덕왕 때는 전제왕권의 절정기였으며 문화의 황금기였다. 이 시기의 경주에는 많은 걸작품들이 만들어진 시기이기도 하였다. 그 대표적인 유산이 토함산의 석굴암을 비롯하여 불국사 등이 있다. 이러한 유적들을 보면 당시의 건축술 수준이 대단한 경지에 이르렀을 것으로 생각되며 궁궐건축은 통일신라 문화를 최대한 반영시킨 건축이었음에 틀림없다.

 선덕왕으로부터 진성여왕에 이르는 동안 신라는 호족세력의 등장으로 쇠퇴가 빠르게 진행된 시기이다. 이 시기에는 궁궐을 새로 짓거나 도성을 보강하는 큰 공사는 없었으며 건물 한 채를 짓거나 궁궐 안의 중요건물을 중수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궁궐 안의 건물로는 동궁에 萬壽房을 새로 지었고 중수된 건물은 臨海殿·朝元殿·平議殿·鳴鶴樓·月上樓·月正堂 등이다. 한편 이 시기의 기록에는 앞 시기에 보이지 않던 崇禮殿·臨海門·玄德門·武平門·導禮門 등이 보이나 그 위치에 대해서는 아직 확실히 알 수 없다. 月池宮이나 북궁에 관한 기록이 헌덕왕 14년(822), 진성여왕 11년(897)에 나오는데 북궁이 어느 곳의 궁이였는지 확실하지 않으나 경주시 성동의 殿廊址를 북궁으로 보려는 견해도 있다.

 진성여왕 3년(889) 이후 경순왕 9년(935)까지는 신라의 내란기에 이어 멸망기에 접어 들었다. 고려 태조 왕건은 경순왕 9년 신라의 항복을 받고 936년 후백제를 멸망시키고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이리하여 천년고도 경주는 지방의 한 도시로 전락하였고 통일신라 왕조의 중심이였던 월성·동궁 등 많은 궁궐들도 명맥을 잃게 되었다.

 안압지 궁궐터:안압지는 통일신라시대에는 月池라 불렸는데 조선 초기의 기록인≪新增東國輿地勝覽≫에 “안압지는 天柱寺 북쪽에 있으며 문무왕이 궁 안에 연못을 파고 돌을 쌓아 산을 만들어 巫山十二峯을 상징하고 화초를 심고 기이한 짐승을 길렀다. 그 서쪽에는 임해전이 있었는데 지금은 주춧돌과 계단만이 밭 이랑 사이에 남아 있다”라는 기록이 있어 현재 안압지로 알려진 것이다. 안압지는 1975년 3월부터 발굴조사가 실시되어 1976년말까지 연못 안과 주변의 건물터가 확인되어 그 전모를 파악할 수 있었다. 연못의 전체 면적은 15,658㎡(4,738坪)이었고 연못 안에 3개의 섬이 있었으며 연못의 호안석축 길이는 1,285m로 확인되었다. 유물은 瓦塼類 24,000여 점을 포함하여 30,000여 점의 각종 유물이 출토되었고 연못의 서쪽과 남쪽에서 건물터 26개 소, 담장터 8개소, 입수구 및 출수구 등이 발견되었다. 현재 연못의 서쪽에는 3채의 건물이 복원되어 있다. 유물 중에는 글씨를 새긴 기와와 전돌이 나왔는데 그 내용은 ‘儀鳳四年皆土’ 및 ‘調露四年漢只伐部’라 쓴 것이 있어 문무왕 19년(679) 동궁을 창건하였다는≪삼국사기≫의 기록이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안압지 주변에서 많은 건물터가 발견되었지만 각 건물이 어떠한 건물인지는 확인하기가 어려웠다.1276)문화재관리국,≪안압지≫(1978).

 경주 성동 전랑터:이 전랑터는 경주시 북천 가까이에 있다. 1937년 발굴된 내용을 보면 동서 180m, 남북 100여m 범위 안에 긴 회랑터 7개 소, 전당터 6개 소, 문터 2개 소 등이 확인되었다. 원래는 서쪽과 동북쪽까지 건물들이 있었으나 장마 때에 북천의 범람으로 인해 유적이 유실된 것 같다. 이 전랑터를 헌덕왕 14년(822)과 진성여왕 11년(897)에 나오는 북궁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아직 확실하지 않다. 이 전랑터의 배치를 보면 긴 회랑이 남북으로 놓이고 전당들이 남향하고 있어 남북으로 긴 궁궐이었던 것으로 생각되며 회랑들이 전랑터를 동서로 구획하고 있어 고구려의 安鶴宮과 유사한 점을 발견할 수 있어 주목된다. 1993년부터 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이 유적을 재발굴하고 있어 발굴결과가 주목되고 있으며 과거 밝혀지지 않았던 내용들이 확인되기를 기대하고 있다.1277)朝鮮古蹟硏究會,≪昭和12年度古蹟調査報告≫(內外出版,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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