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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성곽

 통일신라의 성곽은 축조의 동기와 축조의 양상에 있어서 삼국시대보다는 확실한 부분이 많으나, 이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는 매우 한정되게 이루어졌다. 통일신라의 성곽은 크게 구분하여 王京, 州와 小京城, 일반 郡·縣의 성, 변경지역의 鎭城과 關城으로 나눌 수 있다.1279)이 밖에도 烽·戍·邏에 대한 중국측의 기록이 있으나(≪北史≫권 94, 列傳 82, 新羅), 구체적인 것은 확실치 않다. 이는 다분히 성곽의 등급과 기능을 참작한 구분이며, 지역과 국방시설로서의 성격 일반이 포함된 구분이기도 하다. 고고학적 측면에서는 산성과 도시성으로 구분하거나, 축성재료를 기준하여 토축과 석축으로 나눌 수 있다. 이 시기는 결론부터 말하자면 고대의 축성기법이 종합되고, 동시에 새로운 기법이 나타난 시기에 해당되며, 이는 통일에 따른 통치 영역의 재편성과 고대사회의 완성기이자 해체기라는 시대적 성격의 반영이기도 하다.

 통일전쟁이 벌어졌던 文武王 때에 이미 있었던 왕성과,1280)중국측 기록에는 신라의 王城은 金城으로 둘레가 7∼8里로 표현되고, 衛兵 3,000인과 獅子隊가 있다고 하였다(≪舊唐書≫권 199上, 列傳 149上, 東夷 新羅). 그 주변 사방의 산성이 이룩되어 왕도의 방어를 위한 시설로서의 성곽은 일차적으로 완성된 것이었다. 그러나 문무왕이 계획하였던 京城은 미쳐 완성되지 못하였다가 8세기 전반에 京城周作典이 두어지면서 왕성(궁성)의 외곽에 경성(외성)을 두고, 다시 그 외곽의 사방에 산성이 배치되고, 그 외곽의 요로에 방어망을 갖춘 체제로 왕도의 방어시설이 이룩되었다. 통일신라적 행정구역의 재편성은 神文王 때 이루어졌지만, 왕도의 재구성은 계획만 되고 실현되지 못하였었다. 그 대신 小京과 지방 중심지로서의 州가 축성의 대상이 된 것을 보면, 성곽제도의 재편과 확산과정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즉 통일신라는 王京을 중심으로 축성이 시작되어, 다음 단계에서는 지방의 가장 유력한 중심도시인 소경과 주에 축성이 이루어지고, 다음 단계에서는 일반 군·현과 군사적 요충인 변경지역의 鎭·關에 축성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러한 축성의 확산과정은 곧 왕도의 완성과 지방 및 국경지역의 성곽축조가 8세기 중엽에 이르러 일차적으로 완성된 것을 의미하며, 이후의 축성은 새로이 개척된 대동강 이남 지역에 대한 축성이었다. 이러한 과정은 통일신라의 왕권이 안정된 시기에 왕도를 중심하여, 지방의 주요 도시를 거쳐 국경에 이르는 전체적인 통제력이 가장 강력하였던 것과 관련된 等位的인 축성이라 할 수 있으며, 이러한 축성의 양상은 고대의 신분제도나 왕권을 중심한 등위적 편성에 의한 것과, 기존의 많은 성곽들을 재편하고 수축하는 과정이 왕경 중심이었던 것과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는 왕경과 지방도시의 성곽에 대하여 연구성과를 종합하고, 논쟁점의 큰 줄거리를 언급한 다음에 축성기법의 변화상을 몇몇의 조사 사례를 통해 이해하는 수준에서 서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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