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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일본에서의 고려악

 삼국악을 전승한 일본의 高麗樂(고마가쿠)은 한국음악사의 주류에서 오래전에 벗어났다. 그렇지만 고려악은 모두 한민족의 음악문화를 오랜동안 지속시켰다는 사실이 음악사적 관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고려악은 아직까지도 唐樂(도가쿠)과 함께 일본 雅樂(가가쿠)의 한 기둥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음악사적 의의를 갖는다.

 삼국통일 이후에도 백제악·고려악·신라악은 일본궁중에서 삼국악사와 악생에 의하여 계속 연주되었다.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한지 40여 년 후인 大寶 2년(702) 당시의 雅樂寮(가가쿠료)에 소속되었던 고구려·백제·신라악사는 각각 4명씩이었고, 삼국악생은 각각 20명씩이었다. 그러나 天平 3년(731)에 이르러 백제악생은 20명에서 26명으로 증원됐지만, 고려악생은 20명에서 8명으로 줄었고, 신라악생은 20명에서 4명으로 16명이나 감원되었다. 그리고 아래의 사료에서 제시되었듯이 大同 4년(809)에는 신라악사가 4명에서 2명으로 줄었으나, 백제악사와 고려악사의 4명은 변동되지 않았다.1325)李惠求,≪韓國音樂論叢≫(수문당, 1975), 170∼171쪽.

가가꾸료가 정하기를 …고려악사 4명은 횡적·군후·막목·춤 등의 선생이고, 백제악사 4명은 횡적·군후·막목·춤 등의 선생이며, 신라악사 2명은 가야금·춤 등의 선생이다(≪日本後紀≫권 17, 平城天皇 大同 4년 3월 병인).

 백제악사와 고려악사 4명은 橫笛· ·莫目·춤을 가르치는 선생이었고, 신라악사 2명은 가야금·춤 선생이었다. 삼국시대 언제부터 이러한 숫자의 삼국악사들이 일본에 파견되었는지 분명하지 않지만, 백제의 경우를 보건대 그 시기는 늦어도 欽明天皇 15년(554)에 4명의 백제악사가 교체되었던 6세기 무렵부터였다. 횡적은 나중에 高麗笛(고마부에) 또는 百濟笛(구다라부에)으로 불리운 관악기였고, 후에 百濟琴(구다라고토)으로 불리운 군후는 箜가 아닌 거문고였으며,1326)李惠求, 위의 책, 162쪽. 막목은 향피리와 같은 관악기의 일종으로 추정되었다.1327)李惠求,≪韓國音樂硏究≫, 199∼200쪽.

 平安(헤이안, 794∼1191) 초기 雅樂寮에 소속됐던 삼국악사와 삼국악생들은 仁明天皇(833∼847) 당시 악제개혁에 따라서 변천과정을 거쳐야만 했다. 먼저 고려악·백제악·신라악·발해악으로 각각 불리던 것을 高麗樂(고마가쿠)으로 통합시켰고, 통합된 고려악을 아악료의 右坊樂으로 삼았다. 12세기 이후 우방악의 고려악은 左坊樂의 唐樂와 함께 일본 아악의 두 기둥으로 현재까지 전승되고 있다.

 嘉祥 원년(848) 9월 22일에 있었던 악제개혁 때 삼국악사와 삼국악생들의 숫자가 많이 변천되었다.1328)神宮司廳,≪古事類苑≫(東京 : 吉川弘文館, 1979), 樂舞部, 권 24, 635∼636·641·643쪽, 권 30, 908∼910쪽 및 권 31, 996∼997쪽.
李惠求, 위의 책, 169∼172쪽.
악제개혁 이전에는 고려악생 20명·백제악생 20명·신라악생 20명 총 60명이었으나, 개혁 후에는 고려악생 18명·백제악생 7명·신라악생 4명 총 29명으로 감원되었다. 악제개혁 이전과 이후 삼국악사와 삼국악생의 변천과정을 알기 쉽게 도표로 정리하면 아래의<표>와 같다.

년 도 \ 구 분 백 제 고 구 려 신 라
악 사 악 생 악 사 악 생 악 사 악 생
大寶 2년(702) 4명 20명 4명 20명 4명 20명
天平 3년(731) 4명 26명 4명 8명 4명 4명
大同 4년(809) 4명 - 4명 - 2명 -
嘉祥원년(848) 이전 - 20명 - 20명 - 20명
嘉祥원년 4명 7명 4명 18명 2명 4명

<표>삼국악사·악생수의 변동

 우방악의 고려악에 사용된 악조는 高麗壹越調(고마 이찌코츠조)·高麗平調(고마 효오조)·高麗雙調(고마 소오조) 이상 세 가지였는데, 이러한 악조명은 좌방악의 당악에서 사용된 壹越調·平調·雙調와 명칭상 구분하기 위해서 생긴 결과였다. 고려평조로 된 舞樂(부가쿠)으로 林歌가 있고, 고려쌍조의 白濱 등이 있으며, 고려일월조의 新鳥蘇 등이 있다. 이렇게 당악과 구분되기는 했지만, 악제개혁 후의 고려악은 삼국의 음악적 특징을 잃어버린 채 차츰 일본화의 길로 접어들었고, 따라서 일본에서의 고려악은 한국음악사의 주류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밖에 없었다.

<宋芳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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