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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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9권 통일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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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무용

(1) 무용

 신라 제31대 신문왕 9년(689), 왕은 新村에 거동하여 연회를 개최하였는데 이때에 笳舞·下辛熱舞·思內舞·韓岐舞·上辛熱舞·小京舞·美知舞 등과 같은 무용이 공연되었다.1329)≪三國史記≫권 32, 志 1, 樂, 三竹. 제40대 애장왕 8년(807)에는 思內琴舞·碓琴舞가 공연되었다. 이들 춤의 형식과 내용은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춤의 이름에 琴이 들어 있는 것은 금의 반주에 맞추어 춤을 추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명명되었으리라 추측될 뿐이다.

 통일신라시대에는 音聲署 소속의 무용수를 舞尺이라 불렀는데 당시의 무척은 靑衣를 입거나 赤衣를 입고 춤을 추었다. 尺은 한국에서는 고대로 평민보다 밑의 계급에 속하는 하급 專業家를 뜻하고 있으나 당시의 尺이 몇 등급에 속하는 사람들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당시에 이미 무용을 전문으로 하는 무척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더 큰 의의가 있다.

 무척과 함께 주의를 끄는 것은 歌尺과 琴尺이다. 신라에는 이들을 모두 樂工이라 불렀다. 가척은 노래를 전문적으로 부른 악공이며 금척은 무척과 가척의 반주를 맡은 가야금 연주자였다.

 삼국시대의 무용이 음악과 노래와 춤이 혼합된 종합공연예술의 성격으로 연기되었다고 하는 사실은 앞에서 이미 언급하였다. 실제로 가야금을 제작한 于勒은 樂·歌·舞의 명인이었다. 그에게 階古는 琴을 法知는 노래를, 萬德은 춤을 전수받았던 것이다. 이 때가 진흥왕 13년(552)이었다.1330)≪三國史記≫권 4, 新羅本紀 4, 진흥왕 3년. 따라서 6세기 말경을 전후로 하여 삼국시대의 종합공연적 성격을 띄었던 음악·노래·춤은 각각 독자적인 영역으로 분리되기 시작한다고 추측할 수 있다.

 삼국시대에 단순한 노래와 춤으로 연주되었을 신라의 무용은 통일신라시대로 들어오면서 더욱 세련되고 체계화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拍板·大鼓 등의 唐나라 악기가 수입되었고 당나라의 敎坊歌舞가 음성서에 소개되었으리라 짐작되기 때문이다.1331)宋芳松, 앞의 책, 221쪽.

 당시 무용수의 복장은 귀가 나온 복두를 쓰고 큰 소매가 달린 자색 난삼을 입고 붉은 가죽에 도금한 금테를 두른 허리띠를 띠고 검정 가죽장화를 신었다.1332)≪三國史記≫권 32, 志 1, 樂. 이 무용수의 복장은 궁중에서 춤출 때 입었을 것이다.

 통일신라의 궁중무용은 앞 시대의 여러 지방에서 鄕人들이 즐기던 노래와 춤을 음성서에서 더욱 체계화하였다. 가무는 奈勿王(356∼401) 때 만들어진 춤이며, 하신열무는 儒理王(24∼57) 때에 만들어진 것인데 통일신라시대에 음성서에서 더욱 체계화되어 춤추어진 것이다.

 음성서에서 춤추던 춤 이외에도 금색의 공을 가지고 노는 일종의 곡예인 金丸, 唐을 거쳐 들어 온 西域의 가면극인 月顚, 역신을 구축하는 大面, 서역의 가연희인 東毒, 사자춤인 狻猊 등이 향약으로 민중들 사이에서 공연되었다.

 그 외에도 劍舞, 처용설화에서 유래되어 만들어진 處容舞, 憲康王이 직접 춤추어 보여준 霜髥舞, 고승 元曉大師가 만들었다고 하는 無碍舞 등이 모두 통일신라시대에 춤추어졌던 무용의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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