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10권 발해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2. 발해의 발전
  • 2) 국가체제의 정비

2) 국가체제의 정비

 당 및 신라와의 전쟁이 끝나고 대외적인 안정을 회복한 이후 발해는 대내적인 체제정비에 주력하였다. 무왕을 이은 文王의 장기간에 걸친 재위기간(737∼793) 중 발해의 제도와 문물이 크게 정비되었다. 문왕은 즉위 직후 儒家思想에 입각하여 황제를 정점으로 한 집권적 국가체제를 이끌어나가는 각종 의례와 법령과 규범을 담아놓은 당의 開元禮를 수입하였으며, 당의 문물 수용에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였다. 문왕의 치세 기간 중 발해는 당에 49차례의 사신을 파견하였고, 당도 4차례나 문왕을 책봉하는 등 양국관계가 긴밀하였다. 당의 문물은 발해가 그 국가체제를 정비해 나가는 데 주요 典範이 되었다.≪新唐書≫발해전에 전하는 바와 같은 발해의 중앙 및 지방제도는 국초부터 마련되기 시작하였겠지만, 문왕대에 이르러 그 틀이 대부분 확립되었다.

 문왕대에 이루어진 제도정비를 살펴보면, 먼저 지방제도로서 府州縣制와 5京制를 들 수 있다. 부는 주의 상위 기관으로 기능하였는데 이는 獨奏州의 존재를 통해서 알 수 있다. 당시 涑州 등 3개의 독주주는 다른 62개의 일반 주와는 달리 왕에게 바로 상주할 수 있는 예외적인 단위로 설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발해 초기에는 지방관으로서 도독과 刺史가 있었으나, 양자는 상하 統屬關係에 있었던 것 같지 않다. 발해 지방관의 구체적 명칭은 739년 일본에 파견한 사신인 胥要德이 若忽州都督이었다는 기록을 통해 확인된다. 도독은≪신당서≫발해전에서 전하는 부-주-현체계에서 부의 장관이다. 그런데 약홀주의 장을 도독이라고 하였음은 곧 이 당시까지 아직 부가 성립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그럴 경우 도독과 자사는 일본의≪類聚國史≫殊俗部 渤海條에 “館驛이 없으며…大村의 장을 도독, 次村의 장을 자사라 한다”고 한 것처럼, 州 중에 큰 주의 장을 도독이라 하였던 것 같다. 도독과 자사는 상하 통속관계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병렬적인 존재로서 각각 중앙의 조정에 연결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발해에서 아직 부-주-현제도가 정립되지 못하였음을 뜻한다.

 758년에 일본에 파견한 사신인 楊承慶은 行木底州刺史였고, 759년에 파견된 高南申은 玄菟州刺史였다. 이들이 띠고 있는 관직명에 보이는 주의 명칭은 두 자로 되어 있어 739년의 약홀주도독의 그것과 같다. 그런데≪신당서≫발해전에 의하면 전국의 주의 명칭은 모두 한 자로 되어 있어 이와 차이를 보인다. 이는 단지 명칭상의 차이만이 아니라 아직 부와 주간의 상하 통속관계와 같은 행정적 체계화가 확립되지 못한 상태임을 나타내준다고 생각된다.≪신당서≫발해전이 전하는 것과 같은 형태로 어느 시기에 주의 명칭이 전국에 걸쳐 일괄적으로 한 자로 정리될 때, 부-주-현제의 행정체계도 함께 정비되었던 것이 아닐까 한다. 구체적으로 776년에 일본에 파견한 사신이 南海府의 吐號浦에서 출발하였다는 기록에서053)≪續日本紀≫권 34, 光仁天皇 寶龜 8년 정월. 부의 존재가 확인된다. 남해부는 南京이었으니 남경의 존재는 곧 五方 개념에 따른 5경제가 이 시기에 성립되었음을 말해준다. 주 아래의 현의 존재는 구체적인 기록상으로는 849년 永寧縣丞 王文矩를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한 데서 확인되나,054)≪續日本後紀≫권 18, 仁明天皇 嘉祥 원년 12월 을묘 및 권 19, 仁明天皇 嘉祥 2년 3월 무진. 그 전에 이미 존재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대체로 남경 남해부의 존재가 확인되는 776년 무렵에는 부주현제와 5경제가 성립되었다고 보는 것이 무난할 것으로 여겨진다. 그것이 5경·15부·62주 형태로 된 것은 9세기초 선왕대의 팽창을 거친 뒤였다.

 한편 문왕대에는 수 차례의 천도가 행해졌다.≪신당서≫지리지에 의하면 顯州, 즉 中京 顯德府가 당의 天寶 연간(742∼756)에 발해의 수도였다고 한다. ≪武經總要≫에서도 현주가 천보 이전에 발해의 수도였다고 하였고,055)≪武經總要≫前集 권 16 下. 和龍縣 서고성자의 발해시기의 성의 유적으로 보아 천도는 사실로 여겨진다. 이곳은 첫 수도인「舊國」즉 영승지역보다 기후가 따뜻하며 기름진 넓은 들을 끼고 있고 물산이 풍부하였다. 이 지역의 현주의 포, 盧城의 쌀, 位城의 철 등은 발해의 특산물로 유명하였다.056)≪新唐書≫권 219, 列傳 144, 北狄 渤海. 구체적으로 언제 이곳에 천도하였으며, 얼마간 수도였는지는 논란의 여지를 남기고 있다.057)이곳으로 천도한 시기가 무왕대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宋基豪,≪渤海政治史硏究≫, 一潮閣, 1995, 97쪽). 문왕은 천보말에 북쪽의 상경지역으로 다시 천도하였다. 이 때 천도한 배경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언급된 기록이 전해지지 않으나, 천도한 시점이 주목된다.

 천보 14년(755) 11월에 당에서 安祿山의 난이 일어났고 이듬해 정월 안녹산이 황제라 칭했으며, 사천지역으로 피난갔던 당의 현종이 퇴위하고 숙종이 7월에 즉위하여 연호를 至德이라 하였다. 안녹산은 반란을 일으키기 이전에 당의 平盧節度使로서 발해·흑수·거란·해 등을 담당하는 四府經略使를 겸하고 있었다. 그의 반란에 따른 당의 격렬한 내란 상황에 대해 발해로서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난의 여파는 발해에 직접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756년 가을 당의 平盧留後事 徐歸道가 발해에 사신을 보내어 기병 4만을 동원하여 안녹산을 칠 것을 요청하였다. 발해는 이에 응하지 않고 사신을 돌려보내지 않았다. 서귀도는 그 해 말 안녹산측에 붙었다. 이어 서귀도를 죽이고 權知平盧節度를 자칭한 王玄志도 사신을 보내어 당의 사정을 말하였는데, 발해는 이를 믿지 않고 따로 사신을 보내어 정세를 탐문하게 하였다.058)≪續日本紀≫권 21, 淳仁天皇 天平寶字 2년 12월 무신. 한편 발해는 758년과 759년에 楊承慶과 高南申을 각각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하였는데, 그 때 양인의 관직이 행목저주자사와 현도주자사였다. 목저주와 현도주는 각각 혼하와 蘇子河 유역에 있어 요동평야로 나아가는 발해의 서남쪽 관문에 해당한다. 이 지역을 담당하는 관리를 파견한 것은 안녹산의 난에 대한 정보에 밝았던 이들을 보내어 난의 추이를 일본에 전하여 일본측의 반응을 탐색하고, 난의 여파가 밀려올 때를 대비한 대책 마련에 활용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소식에 접한 일본 조정은 난의 여파가 미칠 만약의 사태에 대한 대책 마련에 부심하였다.059)일본 조정이 758년에 이어 759∼761·763년에 거듭 발해에 사신을 파견하였던 것도 그러한 움직임의 일환이었다. 이런 면들은 발해가 안녹산의 난에 따른 안보에 상당히 민감하게 반응하고 대처하였음을 말해준다. 따라서 천보말에-아마도 756년 전반기에-있었던 상경으로의 천도 역시 이와 연관된 것이라고 보여진다.060)林相先,<渤海의 遷都에 대한 考察>(≪淸溪史學≫5,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8).
방학봉,<발해는 무엇 때문에 네차례나 수도를 옮겼는가>(≪白山學報≫39, 1992).
宋基豪, 앞의 책, 99쪽.
상경지역은 중경보다 북쪽에 있고 주변에 산악이 둘러처져 있어 서쪽으로부터의 침공에 대한 방어에 유리하며, 넓은 평야를 안고 있어 도읍으로 적합한 지역이다. 그리고 앞서 말한 바처럼 8세기 중반 송화강 하류의 철리부 등의 말갈 부족들을 복속시켰기 때문에 그 배후지의 안전은 확보되어 있었다.

 문왕대의 종반인 785년 이후에 상경에서 다시 두만강 하류 유역인 琿春의 八連城인 東京 龍原府로 천도하였다. 이어 794년에 문왕이 죽고 大元義가 즉위하였으나 곧 ‘國人’들에게 피살되었고, 成王이 왕위에 오른 뒤 다시 상경으로 천도하였다. 상경은 그 뒤 926년 발해가 멸망할 때까지 계속 수도가 되었다. 천도는 한 국가에 있어서 모든 면에 영향을 주는 매우 중요한 사건인데, 이렇듯 잦은 천도를 행하였다는 것은 주목되는 사실이다. 그러나 아직 이 배경에 대하여는 분명히 밝혀져 있지 않다.

 아무튼 문왕대에 부주현제와 5경제 등이 정비되었는데, 이처럼 관료조직이 체계화되었다는 것은 곧 중앙집권력과 왕권이 강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진전을 뒷받침하였던 당시의 이념적 기반의 하나는 유교였다. 政堂省 아래의 6部의 명칭이 유교적 덕목을 딴 忠·仁·義·智·禮·信이었다는 점은 그러한 면을 웅변해준다. 冑子監이 설치되어 있어 유교 경전에 대한 교육과 인재 양성에 중심적 역할을 하였다. 또한 발해는 국초 이래로 당에 유학생을 보냈는데, 이들이 귀국한 후 유학 보급에 큰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불교 또한 왕실과 밀착하여 왕권의 강화에 일정한 역할을 하였던 것 같다. 문왕의 시호가 ‘大興寶曆孝感金輪聖法大王’이었는데 大興과 寶曆은 문왕대의 연호였고, 金輪聖法은 불교적 의미를 띤 것으로서 轉輪聖王의 이념을 상징한다. 이로써 문왕은 정복군주로서 천하에 正法을 시행하는 이상적인 군주임을 自任한 것을 알 수 있다.061)宋基豪, 위의 책, 123∼125쪽. 아울러 불교를 독실히 신봉하였음과 함께 당시 발해의 불교계 또한 왕의 권위을 높이고 이를 신성화하는 데 충실했을 것을 짐작할 수 있다.

 8세기 후반 관료조직이 확충되고 왕권이 강화되자, 이를 바탕으로 문왕은 황제를 뜻하는 皇上이라고 불리기도 하였으며,062)<貞孝公主墓誌>(≪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Ⅲ, 韓國古代社會硏究所, 1992), 460쪽.
현명호,<발해 ‘계루군왕’칭호에 대하여>(≪력사과학≫1991­1).
宋基豪, 위의 책, 101∼105쪽.
771년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발해는 일본을 舅甥關係라 하였고 스스로 天孫이라 칭하였다.063)≪續日本紀≫권 32, 光仁天皇 寶龜 3년 2월 을묘. 당시 발해의 중앙관제·지방제도·수도의 도시 구획 등은 일단 외형상 당의 그것을 방불케 하는 매우 세련된 면모를 갖추었다. 신개척지에서 기존의 전통과 제도적 유산의 제약을 상대적으로 덜 받으면서 새로이 국가를 건설해 나갔기 때문에, 당의 문물 제도를 모방하는 작업을 보다 수월하게 수행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발해의 제도가 외면상 세련되고 정비된 면모를 갖추었다는 것이 반드시 그 제도가 실제 그처럼 일원적으로 운영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특히 발해는 다종족국가로서 종족 및 지역간 발전의 불균등성이 컸던 만큼, 그러한 면이 제도의 운영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그것은 발해의 주민구성이 어떠하며 발해국을 이끌어 나갔던 주된 집단이 어떤 족속이었느냐를 파악하는 문제와 연관되는 것이기도 하다.

<盧泰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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