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10권 발해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3. 발해국의 주민구성
  • 3) 발해 왕실의 출자

3) 발해 왕실의 출자

 발해 왕실의 시조인 대조영의 출자에 대해서는 이를 ‘高麗別種’이라 한≪舊唐書≫발해말갈전의 기록과, ‘粟末靺鞨族으로서 고구려에 복속했던 자’라 한≪신당서≫발해전의 기사를 각각 대표로 하는 서로 다른 두 종류의 전승이 전해지고 있어 논란이 거듭되어 왔다.≪구당서≫발해말갈전과≪신당서≫발해전 기사는 각각 장·단점을 지니고 있는 만큼, 그 중 어느 한쪽의 전승 내용이 우월하다고 여겨 그것에 의거해 논의를 전개시키는 것은 절반의 설득력을 지닐 뿐이다. 그래서 양 전승의 내용을 종합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가 제기되었다.

 別種의 ‘別’을 서로 다르다는 의미로 파악해, 별종은 ‘종족상으로는 별개이나 다만 정치적으로 예속관계에 있는 집단을 지칭한 것이다’라는 해석은 그러한 시도의 하나이다.071)張博泉,<‘別種’草議>(≪社會科學戰線≫1983­4). 그렇게 해석될 수 있다면 신·구당서의 기록은 같은 의미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별종’은 단순히 정치적인 상하 統屬關係에 있는 집단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漢族에 종속되었던 집단은 무수히 많았지만, 漢人別種이란 말은 없다.072)孫進己 等,<渤海的族源>(≪學習與探索≫1982­5). 별종은 기준이 되는 집단과 어떤 종족상의 친연관계를 지니고 있다고 여겨진 집단을 지칭한 용어인 것이 분명하다.

 두 전승을 통합적으로 이해하려는 다른 한 견해는 발해인 濊(貊)族說이다.즉 이 설은 ‘고려별종=예(맥)=발해말갈=속말말갈’이라는 이해이다.073)日野開三郞,<靺鞨の前身とその屬種>(≪史淵≫38·39, 1948).
權五重,<靺鞨의 種族系統에 관한 試論>(≪震檀學報≫49, 1980).
孫進己 等, 위의 글.
韓圭哲,≪渤海의 對外關係史-南北國의 形成과 展開-≫(신서원, 1994), 68∼82쪽.
이 설의 기저는 사서에서 동일하게 말갈족이라고 기술된 족속은 실제로는 서로 다른 두 부류의 종족으로서, 속말부·백산부와 같은 예맥계 말갈과 흑수부 등과 같은 挹婁-勿吉系 靺鞨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보는 데 있다. 그런데 속말부는≪隋書≫나≪신당서≫·≪구당서≫에서 말갈족으로 분류되었다.≪수서≫靺鞨傳에서 속말부를 말갈족이라 한 것은 隋에 來朝해온 속말부인의 말에 의한 것이다.074)盧泰敦, 앞의 글, 註 110 참조. 그리고 수·당의 영내로 이주해간 속말부인은 모두 말갈족으로 명기하였다.075)속말부의 大首領으로서 隋에 망명한 突地稽의 경우, 그의 아들이 唐代에 고관으로 현달한 이후에도 그 출자를 말갈족이라고 명기하였다(≪新唐書≫권 110, 列傳 35, 諸夷蕃將, 李謹行). 흑수부 등 다른 여러 말갈족 집단들의 존재를 알고 있던 당시 중국인이 속말부인을 계속해서 말갈족으로 파악하였다는 사실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당시 자타에 의해 모두 그 종족 명칭을 말갈족이라 한 것을 굳이 예(맥)족으로 파악할 근거는 없는 것이다. 부여성 일대에 거주하던 속말부를 唐代에 浮渝靺鞨이라고도 불렀던 것은 그들의 거주지의 명칭에서 연유한 말갈족 내에서의 구분을 표시한 것이며, 그들은 종족상으로는 어디까지나 말갈족이었다. 말갈족이 부여지역에 많이 거주하게 된 것은 5세기말 이후 물길이 부여지역을 일시 석권함으로써 부여의 왕실이 고구려 내지로 이주하는 등의 정세 변화에 따라 이 지역으로 상당수의 말갈족이 이주한 이후부터였다.076)盧泰敦, 앞의 글.
길림성 楡樹縣 老河深유적은 3개 층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 상층에 있는 무덤에서 북주 무제 건덕 3년(574)에 처음 주조된 ‘오행대포’가 출토되었다. 상층유적은 말갈족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는 勿吉 발흥 이후 속말수 유역의 부여지역으로 상당수 말갈족이 이주하게 되었을 것이라는 필자의 추정을 뒷받침해준다(吉林省 文物考古硏究所 編,≪楡樹老河深≫, 1987, 119∼121쪽).
그리고≪수서≫에서 말하는 불열부 이동의 말갈과 그 서쪽의 말갈족간의 차이는 철기문화의 보급도나 농경화의 정도에 따른 말갈족 내에서의 문화적 낙차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三國史記≫신라본기와 백제본기 초기 부분에 한반도 내에서 활약하는 말갈의 존재가 전해진다. 그러나 당시 동해안 일대의 주민을≪三國志≫동이전에서 濊라 하였고<廣開土王陵碑>에서도 穢라 한 것으로 보아, 이는 역시 丁若鏞 이래로 주장되어 온 僞靺鞨說을077)丁若鏞,<疆域考>권 2(≪與猶堂全書≫6집). 취하는 것이 옳으리라 생각된다.

 이렇게 볼 때 발해 왕실의 출자에 관한 두 전승을 통합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는 성립하기 어렵고, 두 견해는 계속 평행선을 그을 수밖에 없는 듯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다시 한번 別種의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별종의 용례로서 후예를 뜻하는 경우가 있다. 그 다음으로 별종은 기준이 되는 本族에 비해 支派·別派, 또는 嫡系에 대한 傍系의 집단이라는 뜻이 있으므로 본족과 별종은 함께 존재할 수 있다.

 공시적으로 존재하는 두 집단이 중국인에 의해 별종관계로 파악된다는 것은 양자가 계통면에서 同種임을 뜻하며, 아울러 현상적으로는 양자간에 동질성과 함께 약간의 상이성도 띄고 있었던 상태를 말해준다. 이런 별종이 생성되게 되는 동인으로는 種族分岐를 생각할 수 있다. 실제 족제적 성격이 강한 초기 고대사회에서는 인구의 증가나 통수권 계승문제 및 정책결정에 따른 異見 등등의 문제로 인하여 생긴 내부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때로는 전쟁 등에 따른 여파로 집단의 분기가 이루어졌고 그에 따라 이주한 예는 흔히 볼 수 있다.

 그런데 일정한 영역 내의 주민들에 대한 강력한 통제력을 지닌 지배체제를 구축한 영역국가에서는, 그러한 종족의 집단적인 분기는 극히 어려운 일이다. 오히려 족제적 질서 자체가 해체되어 감에 따라, 영역국가에서는 종족의 분기가 아니라 영역 내의 같은 계통의 종족들간에 융합이 진행되었다. 나아가 특정 족속에 의해 주도된 영역국가가 수백년에 걸쳐 우월한 세력과 문화를 유지해 나갔을 때, 주변의 이질적인 기원을 지닌 족속들조차도 점차 그에 동화되어 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고구려의 경우 5세기초 이후 이백 수십년 동안 남부와 북부의 일부지역을 제외하고는 국경선에 큰 변동이 없었고, 전국이 크고 작은 성을 단위로 한 행정구역으로 편제되어 있었다. 사회분화가 깊이 진전되었고 빈부의 차등에 의거해 조세가 부과되었으며 율령이 시행되어 왔다. 그런 가운데서 초기 고구려국에서 原고구려족, 즉 5部民이 지녔던 집단적인 우월적 지위도 소멸되었으며, 그 영역 내에 포괄되어 있던 여러 족속들간에 상호 융합이 진전되었다. 그 결과 보다 큰 단위로서의 고구려인이 형성되어 갔다. 원고구려족을 중심으로 한 상호 융합 과정에서 그 영내에 포괄되어 있던 족속들 중에 상대적으로 융합이 덜 진전된 집단이 있을 수 있다. 이 때 융합·동화의 기준은 국내성·평양·요동평야 등 고구려의 중심지역의 주민의 그것이다. 이들 지역을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려나갈 때, 상대적으로 바깥쪽 즉 변경지역 주민의 문화와 사회의 성격은 중심부에 비해 다소간의 차이를 지니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668년 이후 당이 고구려유민들을 가능한 한 분리시켜 파악해 지배하려고 하였을 때, 그러한 부류는 별종으로 구분되었을 수 있다.

 특히 말갈족과 근접해 살고 있던 변경지역의 경우, 그 지역의 고구려계 사람들의 습속과 생활양태는 중심부의 고구려인의 그것과 상당한 차이를 지녔을 수 있다. 또 한편으로는 그러한 변경지역에 거주하며 오랜 동안 고구려의 지배 아래 있었던 말갈족 중 일부는 고구려인의 영향을 받아 사회적 문화적으로 상당히 고구려화되었을 것이다. 그런 지역에 살았던 양 계통의 주민간의 차이는 가령 중심부의 고구려인과 흑수말갈과의 사이에서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현저한 것이 아닐 수 있다. 만약 이러한 지역 출신일 경우, 당시 중국인과 같은 제3자가 그 출자를 운위할 때 그 족속 계통에 대한 두 갈래의 전승이 나올 소지가 충분하다.

 이렇게 융합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볼 때 대조영집단의 출자에 대한≪신당서≫와≪구당서≫의 전승 사이의 차이는 極對極의 현격한 것이 아니다. 즉 그 전승은 속말수 유역에 거주하던 고구려계 변경민(≪구당서≫)과 고구려화한 말갈계 주민(≪신당서≫)으로 각각 말하고 있다. 두 경우 중 어느 쪽이 더 타당한지 단정할 자료는 없다. 그런데 668년 이후 속말말갈 내의 여러 집단들의 정치적 움직임이 상이하였는데, 그 중 걸사비우집단은 당에 강제 이주되었다. 이는 이 집단이 그 동안 고구려와 밀착된 관계를 지녔기 때문이며, 그 만큼 속말말갈 내의 여타 집단들에 비해 고구려화된 면을 지녔을 것으로 보여진다. 걸사비우에 대해서는 모든 기록에서 한결같이 말갈족이라 전한다. 그에 비해 ‘高麗舊將’이라는 전승도 전해지는 대조영의 경우는 ‘고려별종’이라 한 것이 다수이다. 이는 양자간에 차이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걸사비우가 고구려화된 말갈족이라면 대조영은 그보다 더 중심부의 고구려인에 가까운, 그리고 더 고구려 조정에 밀착된 면모를 보여준다. 이는 곧 그가 변경의 고구려인이었을 가능성이 더 큰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점만으로 단정하기는 충분하지 못하다. 발해 왕실 스스로의 의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