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10권 발해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3. 발해국의 주민구성
  • 5) 발해국의 성격에 대한 인접국인의 인식

5) 발해국의 성격에 대한 인접국인의 인식

 발해국의 성격에 대하여 당나라에 끌려가 있던 고구려유민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느냐는 문제와 관련하여 779년 낙양에서 죽은 高震의 墓誌銘이 주목된다. 고진은 寶藏王의 손자였다. 그의 아버지인 連은 安東都護를 역임했으며 그도 안동도호를 지냈다. 그런 만큼 그의 집안은 발해국의 사정에 대하여 정통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고진의 묘지명에 그의 출자를 ‘발해인’이라 하였다.088)<唐開府儀同三司工部尙書特進右金吾衛大將軍安東都護郯國公上柱國公墓誌銘幷序>(≪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Ⅰ, 韓國古代社會硏究所), 541∼542쪽. 비록 고진의 묘지명은 그의 사후에 쓰여진 것이지만, 그의 출자를 발해인이라 기술한 것은 평소 그와 그의 집안이 지니고 있던 스스로의 출자와 발해국의 성격에 대한 인식과 무관한 것일 수 없다.

 다음으로 발해국 존립 당시 신라인이 지니고 있던 발해국에 대한 인식을 살펴보자. 839년 당에 가서 佛法을 구하려고 巡禮를 하였던 일본 승려 圓仁의 일기에 의하면, 당의 登州지역 赤山浦에 거주하던 신라인들이 사원에 모여 추석 명절을 즐기고 있었는데 원인이 추석의 내력을 묻자, 신라인 승려가 옛적에 신라가 발해를 격파한 날을 기념한 것이라 하며 그 때 신라에 격파된 ‘발해’의 잔여 무리가 북으로 가 故土에 의거해 건국한 것이 오늘날 발해라 불리는 나라라고 하였다.089)圓仁,≪入唐求法巡禮行記≫권 2, 開成 4년 8월 15일. 여기에서 ‘발해’는 고구려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신라인 승려가 말한 추석의 기원에 대한 설명이 올바른지의 여부는 그만두고라도, 그가 고구려와 발해를 함께 발해라고 한 것이 주목된다. 이는 곧 당에 거주하고 있던 신라인들이 발해를 고구려의 계승국으로 이해하고 있었음을 나타내준다. 당시 당의 등주에는 신라와 발해의 무역관이 있었고, 양국인이 이 지역에 왕래하면서 무역을 활발히 하였다.090)圓仁,≪入唐求法巡禮行記≫권 2, 開成 5년 3월 2일. 그런 만큼 이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신라인은 발해인과 경쟁의식을 지니고 있었고, 발해국의 성격에 대한 보다 명료한 인식을 지니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신라 최치원의 글에서는 신라와 경쟁적인 관계에 있던 발해에 대하여 “지난날의 고구려가 오늘날의 발해이다”091)<新羅王與唐江西高大夫湘狀>·<與禮部裵尙書瓚狀>(≪崔文昌侯全集≫). “고구려의 잔여 무리들이 모여 북으로 白山 기슭을 의지하여 나라를 세워 발해라 하였다”092)<上太師侍中狀>(≪崔文昌侯全集≫).라고 하여, 발해와 고구려를 계승국관계로 파악하였다. 그의 글 중<謝不許北國居上表>에서는 발해의 원류를 속말말갈이라 하였다. 최치원은 일찍 당에 유학가 장기간 머물렀던 만큼,≪신당서≫발해전의 이 관계 기사의 저본이 되었던 바와 같은 류의 전승을 알고 있었을 수 있고, 이 글은 그것에 의거한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삼국사기≫의 발해 관계 기사는 매우 적다. 발해라고 구체적으로 표기한 기사는 733년에 있었던 발해 공격에 관한 것 외에는 崔致遠傳의 기사뿐이다. 후자는 최치원문집의 것을 전재한 것이다. 전자는 성덕왕 32년(733)과 33년조의 기사에서 발해를 ‘발해말갈’·‘말갈’이라 하였다. 그런데 733년의 기사는≪資治通鑑≫의 기사를 전재한 것이다. 734년의 기사도 당시 당에서 宿衛하고 있던 金忠信이 당의 황제에게 올린 글을 전재한 것이다. 이런 기록들을 통해서는 당시 신라인의 발해국의 성격에 대한 인식의 구체적 면을 알아보기 어렵다.≪三國遺事≫의 경우 紀異篇 靺鞨 渤海條에서 발해에 관한≪通典≫의 기사를 전재한 후, 細註로≪삼국사기≫의 기사를 略記하고 그리고≪新羅古記≫의 기사를 소개한 뒤 자신의 按說을 서술하였다. 이 중 안설에서 “발해는 靺鞨種이다”라고 말하였으나, 이는 一然의 소견이므로 발해국의 성격이라는 객관적 사실이나 그에 대한 신라 당대인의 인식에 관한 문제와는 다른 차원에서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이 세주에서 주목되는 바는≪신라고기≫의 기사이다. 이≪신라고기≫의 작성 시기는 잘 알 수 없으나 신라 당대의 것일 가능성도 크다. 만약 그렇다면 여기에서 “高麗舊將 조영은 대씨로서 殘兵을 모아 태백산 남쪽에서 나라를 세워 국호를 발해라 하였다”라고 한 것은 신라인의 발해에 대한 인식의 한 면을 전해주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신라인들의 발해에 대한 인식은 김충신이나 최치원의 일부 글과 같이 당에 있을 때 썼거나, 당나라측의 정보에 의거한 것에서는 말갈계로 파악한 면을 보이며, 그 외의 경우에는 고구려 계승국으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의 사서에는 대조영의 출자를 고구려계로 기술한 것과 속말말갈계로 기술한 것 두 종류가 다 있다.

 다음으로 이 문제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은 거란인들이 발해인의 성격을 어떻게 이해하였는가 하는 점이다. 그 점에서는 발해를 멸망시킨 후 그 땅에 설립한 東丹國의 左次相으로서 발해인을 직접 통치하는 임무를 맡고 있던 耶律羽之의 견해가 주목된다. 그는 발해인의 저항이 계속되자 그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으로 발해인을 요양으로 강제 이주시키자고 주장하는 상소문을 927년 요의 조정에 올렸다.

梁水의 땅은 발해인의 고향으로써 토지가 비옥하고 산림·철·물고기·소금 등이 풍성합니다. 발해인의 힘이 미약한 기회를 이용하여 그들을 이곳으로 옮기는 것은 길이 남을 계책이 될 것입니다.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되고 또 삼림·철·소금·물고기의 풍요를 획득할 수 있으니 반드시 이곳에서 안착할 것입니다. 그런 연후에 그들 중 무리를 뽑아 우리의 좌익으로 삼고, 돌궐·党項·室韋의 무리로 우익을 삼으면 가히 앉아서 南邦을 제압하여 천하를 아우를 수 있을 것입니다(≪遼史≫권 75, 列傳 5, 耶律羽之).

 상소에서 梁水 즉 太子河유역을 발해인의 고향이라 하였다. 이 표현에 대하여 발해인의 원류를 말갈족이라고 보는 시각에서, 대조영의 먼 조상이 이 지역에서 살았던 것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해석한 견해가 있었다.093)金毓黻,≪渤海國志長編≫권 19, 叢考. 그런데 태자하 하류에 고구려의 요동성이 있었고 그 부근에 태자하를 끼고 백암성이 있었다. 신성·개모성·안시성 등도 요동성 등과 평야로 이어지는 지역에 있었다. 그런 만큼 이 지역 일대는 고구려의 핵심지역의 하나였다. 발해 성립 이전 시기에 이 지역이 그들의 고향이라 운위될 만큼 말갈족이 집단적으로 살았던 적이 있었다는 기록은 전혀 없다. 그리고 위의 글에서 양수지역에 풍부한 물산의 하나로 소금을 들었다. 내륙지역인 태자하유역만을 대상으로 하여 언급한 것으로 볼 때는 이해되지 않는다. 이는 발해인을 이주시킬 대상지역이 요동지역 전체임을 전제로 한 말이며, 요의 동경성이 있던 태자하유역을 그 대표로 언급하였던 것이다. 실제 요에 의해 발해인은 요동의 각지로 옮겨졌다. 발해 이전 시기에 요동 일대에 널리 살았던 족속은 고구려인 외에는 없다. 이렇게 볼 때 이 지역을 발해인의 고향이라 한 것은 발해인이 원래 고구려인이었다고 여긴 거란인의 인식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해석해야 한다.094)여기에 표현된 ‘고향’을 ‘故土’와 같은 뜻이라 하여, 10세기초 거란이 빼앗기 전에는 요동지역이 발해의 영토였다는 사실을 환기한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宋基豪,≪渤海政治史硏究≫, 一潮閣, 1995, 32쪽). 그런데 당시 徙民의 주된 대상은 동부 만주지역 방면의 발해인이었다. 그들을 요동으로 옮기게 되면 ‘彼得故鄕’이라 하였을 때, ‘고향’은 동부 만주지역에 자리잡기 이전의 지역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고향’을 ‘고토’로 보더라도 그 의미는 동일하다.

 이 밖에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돈황문서<북방 몇몇 나라의 王統에 관한 叙記>(Pelliot Tibetain 1283)에서 발해에 대하여 “…티베트인이 He라 부르고 중국인이 He­tse(奚)라 하며 Drug인이 Dad­pyi라고 부르는 종족이 있는데…그(奚) 동방을 보면 Drug인이 Mug­lig로, 중국인이 Ke’u­li라 부르는 나라가 있다”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Drug는 터키계 종족을 지칭하며 Mug­lig는 발해를 의미한다. Mug­lig는 원래 돌궐에서 고구려를 지칭하는 ‘Mökli(貊句麗)’에서 비롯한 말인데, 8세기 이후 발해를 지칭하는 용어로 계속 사용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고구려 멸망 후 상당수의 고구려유민들이 돌궐로 이주하였으며 발해는 건국 직후부터 돌궐과 교섭을 가졌기 때문에, 고구려와 발해에 대한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을 내륙아시아 터키계 주민들이 발해를 지칭하여 계속 Mug­lig라고 한 것은 발해국의 성격을 이들이 어떻게 이해하였는지를 나타내준다. 아울러 당시 중국인들이 발해를 Ke’u­li 즉 고려라고 하였다는 것도 당나라인들의 발해국의 성격에 대한 인식을 나타내주는 자료가 된다.095)盧泰敦,<高句麗·渤海人과 內陸아시아인과의 交涉에 대한 一考察>(≪大東文化硏究≫23, 成均館大, 1989).

 이렇듯 발해국 존립 당시 발해국의 성격에 대한 인접국인의 인식에서 발해 왕실에 대한 두 가지 전승이 알려져 있던 당과 신라에서는 두 면이 보이지만, 당에 끌려갔던 고구려유민과 당에 거류하고 있던 신라인 및 일본인·거란인·내륙아시아인 등은 발해를 고구려의 계승국으로 파악하였음을 볼 수 있다. 이는 발해가 고구려인들에 의해 주도된 국가임을 말해주는 것이다.이 점과 함께 발해 멸망 후 상당수의 발해유민이 고려로 넘어왔고, 우리 선인들이 발해를 한국사의 일부로 인식해왔다는 사실은 곧 발해사가 한국사의 한 부분이 되는 구체적 근저가 확보되는 셈이다. 발해국의 주민구성의 이중성은 발해사의 귀속면뿐 아니라, 발해사회와 문화 및 그 정치구조와 운영을 이해하는 데 고려하여야 할 주요 요소이다. 물론 이 점이 곧 발해사의 여러 측면의 성격을 전적으로 결정짓는 요소는 아니며, 발해사가 고구려사의 연장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발해사는 고구려사의 그것과는 다른 객관적인 상황과 조건 및 과정을 거치면서 진전되었다. 그에 따라 자연 발해사의 독자적인 면모가 형성되었음은 당연한 것이며, 구체적인 연구를 통하여 그런 면에 대한 파악이 요구된다고 하겠다.

<盧泰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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