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10권 발해
  • Ⅱ. 발해의 변천
  • 1. 발해의 융성
  • 1) 내분의 발생

1) 내분의 발생

 발해는 제2대 武王(大武藝)과 3대 文王(大欽茂)을 거치면서 발전기를 맞이하였으나, 793년에 문왕이 사망하면서 내분이 발생하여 818년에 10대 宣王(大仁秀)이 즉위할 때까지 25년 동안 정치적 불안상태가 지속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우선 4대 大元義로부터 9대 簡王(大明忠)에 이르는 6명의 왕이 재위하였던 기간이 아주 짧았던 데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좀더 구체적인 면은 다음의 사실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문왕이 사망한 뒤에 그의 직계 자손이 아니고 族弟였던 4대 대원의가 즉위하였으나(793),096)이 때에 왕위를 이을 大宏臨이 일찍 사망하였지만, 왕위를 계승할 만한 인물로서 대굉림의 아들인 大華璵나 문왕의 다른 아들인 大嵩璘·大英俊·大貞翰 등이 있었다. 그마저 몇 개월 만에 귀족들에게 피살되었다. 그 다음에는 문왕의 손자인 大華璵에게 이어졌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대원의의 즉위가 정상적인 것이 아니었고, 모종의 정권쟁탈을 통해 이루어졌음을 암시한다.097)方學鳳,<발해 대원의가 피살된 사회적 배경과 그 성격에 대한 연구>(≪발해사연구≫, 정음사, 1989), 121∼122쪽. 이러한 정권쟁탈의 가능성은 795년에 康王(大嵩璘)이 일본에 보낸 國書에서도 드러난다. 문왕이 사망한 사실을 2년이 지나서야 알리면서도 이 때까지 미처 諡號를 정하지 못하고 단지 ‘祖大行大王’이라 부르고 있어서 이 동안에 내부 사정이 복잡하였음을 간접적으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098)≪日本逸史≫권 5, 桓武天皇 延曆 15년 4월 무자.

 대원의를 이어서 794년 5대 成王(대화여)이 즉위한 뒤에 東京에서 上京으로 천도하고 그의 年號처럼 中興을 이루려 하였지만 곧 사망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문왕의 작은 아들인 6대 강왕(794∼809)이 즉위해서는 비교적 오랜 기간인 15년간 통치하였다. 그러나 그가 즉위하기까지에는 우여곡절이 있었던 것 같다. 즉위초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구차히 延命하다가” 왕위에 오르게 되었고, 그 뒤로는 신하들이 “의로움에 감복하여 뜻을 바꾸고 감정을 억제하니,” 마침내 “조정의 기강이 옛날과 같이 되었고, 영토도 처음과 같이 되었다”고 하였다.099)위와 같음. 이로 보아서 그는 내분의 틈바구니에서 겨우 왕위에 올랐으며, 그 뒤로는 조정의 기강을 바로잡는 데 힘을 기울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시호가 강왕이었던 것도 이러한 업적을 고려한 것이었다. 이 때에 사회가 안정되자 당나라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여 문왕 다음으로 많은 冊封을 받을 수 있었다.100)≪舊唐書≫권 199 下, 列傳 149 下, 北狄 渤海靺鞨.
≪唐會要≫권 96, 渤海.
≪冊府元龜≫권 965, 外臣部, 封冊 3.
그러나 여러 차례의 요청 끝에 일본으로부터 아무 때나 사신을 파견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놓고서도 그 후로 10년 가까이 사신을 파견하지 못하였던 사실에서 당시의 안정이 그리 오래 가지는 못하였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7대 定王(大元瑜 ; 809∼812)도 통치기간이 짧아서 별다른 치적을 남기지 못하였고, 이어서 8대 僖王(大言義 ; 812∼818)이 즉위하였지만 그의 즉위도 순탄하지는 못하였다. 일본에 사신으로 갔던 王孝廉이 815년 정월에 일본 조정의 추궁에 대해서 “세월이 흐르고 임금도 바뀌어 전번의 일을 알 수가 없다”101)≪日本後紀≫권 24, 嵯峨天皇 弘仁 6년 정월 갑오.고 대답하였는데, 비록 정왕대의 일이기는 하지만 불과 3년 전에 일어난 일을 두고 이렇게 대답한 것은 앞 시대와의 단절성을 느끼게 한다. 따라서 희왕이 즉위하는 데에도 모종의 커다란 변동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가 사망하고 818년 9대 簡王(大明忠)이 즉위해서도 연호를 太始라 하여 새로운 출발을 시도하였지만, 그도 곧 사망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렇게 6代의 왕을 거치면서 내분이 빈번하게 발생하여 지리멸렬함을 면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이 기간에 특기할 만한 것은 강왕 대숭린대에 고구려 계승의식이 집중적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798년에 일본에서 발해에 보낸 국서에서 “과거에 고구려가 계속해서 일본을 방문하였고, 大氏 왕실이 나라를 다시 열어서 역시 끊임없이 일본을 방문하였다”102)≪日本逸史≫권 7, 桓武天皇 延曆 17년 5월 무술.고 하였는데, 특히 “대씨가 나라를 다시 열었다”는 말은 일본이 발해를 고구려 부흥국가로 인식하였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菅野道眞 등이 797년에≪續日本紀≫를 완성하고 바친 上表文에서도 발해라는 바다의 북쪽에 貊種, 즉 고구려 계통의 사람들이 있음을 밝히고 있는데,103)≪日本後紀≫권 5, 桓武天皇 延曆 16년 2월 기사. 그 시기로 보아서 이 사람들은 발해인을 지칭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아울러 798년에 발해 사신인 大昌泰 일행이 가져간 국서에서도 “교화를 따르는 부지런한 마음은 高氏에게서 그 발자취를 찾을 수 있다”104)≪日本逸史≫권 7, 桓武天皇 延曆 17년 12월 임인.고 하여 발해 스스로도 고구려 계승의식을 밝히고 있어서 주목된다. 이러한 고구려 계승의식은 이미 건국기에서부터 멸망기까지 일관되게 확인되고 있어서, 발해사가 한국사에 포함될 수 있는 중요한 근거를 마련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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