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10권 발해
  • Ⅱ. 발해의 변천
  • 1. 발해의 융성
  • 2) 해동성국의 구현

2) 해동성국의 구현

 10대 宣王(大仁秀 ; 818∼830)은 9대 간왕의 從父이면서 大祚榮의 동생 大野勃의 4世孫이었다. 이전까지는 대조영의 직계손으로 왕위가 이어지다가 이 때부터 그의 동생인 대야발의 후손으로 바뀐 것이다. 이 사실은 단순히 王系의 교체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왕계가 바뀌면서 동시에 사회 분위기도 일신되는 것은 다른 나라의 역사에서도 흔히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연호가 建興이었음은 그가 앞에서 이루지 못한 중흥을 재차 시도하였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시호가 선왕인 것은 그가 평소에 善政을 베풀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그의 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내분이 수습된 것으로 보인다.

 이 당시에는 정복활동도 활발히 벌어졌다. 이러한 사실은 다음 두 가지 기록에서 확인된다.

① 大仁秀가 바다 북쪽의 여러 부락을 토벌하여 큰 영토를 여는 데에 공이 있었다(≪新唐書≫권 219, 列傳 144, 北狄 渤海).

② 興遼縣은 본래 漢나라 平郭縣이 있던 곳으로서, 발해 때에 長寧縣으로 고쳤다. 唐나라 元和 연간(806∼820)에 발해 왕 대인수가 남쪽으로 신라를 평정하고 북쪽으로 여러 부락을 공략하여 郡과 邑을 설치함에 따라 지금의 이름이 생기게 되었다(≪遼史≫권 38, 志 8, 地理 2, 東京道).

 두 기록에서 바다 북쪽을 공략하였던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의 바다는 당시에 湄沱湖라 불리던 호수로서 오늘날의 興凱湖를 가리킨다. 따라서 미타호 일대에 거주하던 越喜靺鞨을 비롯한 여러 말갈부락이 정복 대상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때에 월희말갈 지역을 정복하여 懷遠府와 安遠府를 설치하였다.105)같은 지역에 있던 拂涅·鐵利·虞婁 등의 부락도 이 때에 완전히 장악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렇다면 挹婁(虞婁)의 옛 땅에 둔 定理府와 安邊府도 이 무렵에 설치되었을 가능성이 크다(陳顯昌,<論渤海國的疆域>,≪學習與探索≫1985­2, 131쪽 및 朱國忱·魏國忠,≪渤海史稿≫, 黑龍江文物出版社, 1984, 71∼74쪽). 그러나 그보다 북쪽의 黑龍江(아무르강)가에 살던 黑水靺鞨은 마지막까지 완전히 복속시키지 못하였다.

 ②의 자료에서는 정복활동이 남쪽 방면인 요동지방과 한반도 서북부쪽으로도 이루어졌음을 보여 준다. 遼나라의 東京 遼陽府(지금의 遼陽)에 속하였던 興遼縣은 원래 발해 선왕이 공략하여 長寧縣을 두었던 곳이라고 한다. 공략 시기는 그의 즉위 연대와 함께 고려하면 선왕의 즉위 초년인 818년에서 820년 사이가 된다. 사실 발해는 8세기 중반 문왕 때에 이미 요동방면으로 진출하여 木底州와 玄菟州 등을 차지한 적이 있는데, 이 때에 와서 재차 요동으로 진출하여 요양일대까지 차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106)金毓黻 이래 발해가 요동을 소유하지 않았다고 주장해왔으나 사료를 면밀하게 검토해 보면 타당성이 없다. 이에 대해서는 魏國忠,<渤海王國據有遼東考>(≪龍江史苑≫ 1985­1) 참조.

 그뿐만 아니라 그는 신라방면으로도 진출하였다. 위의 자료에서 신라를 평정하였다는 것은 발해가 大同江 이북 지역으로 뻗어 내려간 것을 가리키는 듯하다.107)宋基豪,<東아시아 國際關係 속의 渤海와 新羅>(≪韓國史 市民講座≫5, 一潮閣, 1989), 54쪽. 신라는 이에 대응하여 憲德王 18년(826) 7월에 대동강에 300리나 되는 장성을 쌓았다.108)≪三國史記≫권 10, 新羅本紀 10, 헌덕왕 18년 7월.

 이상과 같이 발해의 대외 정복활동은 선왕 때에 거의 마무리되었다. 그 결과 사방의 경계가 이 무렵에 완성되었고,≪新唐書≫발해전에 보이는 5京·15府·62州의 행정구역도 완비되었다. ②의 자료에서 “郡과 邑을 설치하였다”고 한 것은 군이나 읍이라는 구체적인 행정구역을 가리키기보다는 이러한 행정구역의 설치 사실을 막연히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때에 이르러 대동강과 泥河(지금의 龍興江)를 경계로 신라와 국경선을 맞대게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선왕의 시대는 역시 중흥기였다.

 내부적인 안정에 따라 대외관계도 아주 적극적이었다. 그가 재위한 12년 동안 일본에 5번이나 사신을 파견하여 그 어느 때보다도 빈번하였고, 그 성격도 더욱더 상업성을 띠게 되었다. 이 무렵에 일본이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였던 것과는 대조가 된다. 825년 12월에 도착한 발해 사신에 대해서 藤原緖嗣가 表를 올려 이들이 “사실은 상인 집단일 뿐이지 이웃 나라 손님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이들을 맞아들여 나라에 손해를 끼칠 수 없다”고 한 말은 유명한 것이다.109)≪日本逸史≫권 34, 淳和天皇 天長 3년 3월 무진. 이렇게 자주 일본에서 교역하고자 하였던 것은 사회 발전에 따라 발해 지배층의 욕구가 그만큼 커졌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선왕의 중흥 노력에 힘입어 그 다음에 즉위한 11대 왕 大彛震(831∼857)으로부터 12대 왕 大虔晃(857∼871), 13대 왕 大玄錫(871∼894?)에 이르기까지 크게 융성하여 마침내 중국으로부터「海東盛國」이란 영예의 칭호를 얻게 되었다. 선왕 때에 대외정복이 완결됨에 따라 그 이후의 왕들은 주로 文治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이것은 8세기에 무왕의 대외정복에 이어서 문왕이 문치에 힘썼던 것과 궤를 같이 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융성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사료들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9세기가 전성기에 해당되지만 오히려 이 시기에 관한 사료는 8세기 때보다도 더 적은 형편이다. 이것은 당나라가 혼란에 빠져 기록을 제대로 남기지 못하였고,110)≪冊府元龜≫의 경우를 예로 들면, 발해 기록이 846년을 마지막으로 중단되었다가 907년에 다시 등장하고 있어서, 武宗이 사망한 뒤로부터 멸망까지 60년 이상이 공백으로 남아 있다. 일본과 오고간 國書도 극히 실무적이고 의례적인 내용만 담고 있는 데 기인한다. 이러한 근본적인 한계가 있지만, 다음의 몇 가지 점에서 당시에 융성했던 모습을 추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대이진 초기나 혹은 그 직전에 官制가 크게 확충되었다는 사실이다. 당나라 사신 王宗禹가 832년 12월에 발해로부터 귀국한 뒤에 左右神策軍과 左右三軍, 120司를 설치하였던 사실을 조정에 보고하였다.111)≪舊唐書≫권 17 下, 本紀 17 下, 文宗 太和 6년 12월. 좌우신책군은 당나라 代宗 때에 두었던 禁軍을 이른다.112)≪文獻通考≫권 151, 兵考 3. 따라서 발해에서 이를 본받아서 좌우신책군을 두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 해는 咸和 2년(832)으로서 대이진 초기에 해당한다. 그 규모가 너무 크고≪신당서≫발해전의 기록과도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이를 그대로 믿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이를 받아들이고 있다.

 1960년 4월에 上京城에서 발견된 銅印에 새겨진 ‘天門軍’이113)韓國古代社會硏究所 編,≪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Ⅲ(駕洛國史蹟開發硏究院, 1992), 486∼487쪽. 이러한 제도 개혁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함화 4년에 조성된 碑像에 보이는 許王府라는 관부와 그에 속한 參軍·騎都尉라는 관직도114)韓國古代社會硏究所 編, 위의 책, 467∼470쪽.
宋基豪·全虎兌,<咸和四年銘 발해 碑像 검토>(≪西巖趙恒來敎授華甲紀念 韓國史學論叢≫, 亞細亞文化社, 1992).
역시 이와 관련하여 고찰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자료들은≪신당서≫발해전에 보이지 않는다. 이로 보건대 대이진 초기나 혹은 그 이전에 관제가 크게 확충되었을 여지가 충분히 있다.

 둘째는 발해인들의 賓貢科 급제 사실이다.115)宋基豪,<唐 賓貢科에 급제한 渤海人>(≪李基白先生古稀紀念 韓國史學論叢≫上, 一潮閣, 1994). 발해는 초기부터 당나라에 학생을 자주 파견하여 중국의 문물을 배워오게 함으로써 해동성국의 기틀을 마련하였다.116)≪新唐書≫권 219, 列傳 144, 北狄 渤海. 당나라가 9세기 전반에 외국 학생들을 위하여 빈공과를 설치하자, 발해 학생들은 840년대 후반부터 이 과거시험에 급제하기 시작하였다.117)≪孤雲集≫권 1, 與禮部裵尙書瓚狀. 이 때는 발해로 치면 대이진 중반경에 해당된다. 이로부터 여러 명의 급제자를 배출하였으니, 그 가운데에는 이름과 급제 연도가 알려진 인물이 세 사람 있다. 872년에 급제한 烏昭度,118)≪孤雲集≫권 1, 新羅王與唐江西高大夫湘狀 및 與禮部裵尙書瓚狀.
≪高麗史≫권 92, 列傳 5, 崔彦撝.
892년에 급제한 高元固,119)≪全唐詩≫11函 1冊, 徐夤. 906년에 급제한 烏光贊120)≪高麗史≫권 92, 列傳 5, 崔彦撝.이 이들로서, 오소도와 오광찬은 부자지간이다. 전체 급제자는 10명에 가까울 것으로 여겨지는데,121)崔 瀣,≪拙藁千百≫권 2, 送奉使李中父還朝序. 80명에 달하였던 신라에 비한다면 아주 뒤지는 것이지만, 빈공과에 참여한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는 두번째로 많다. 따라서 이러한 급제 사실을 통해서도 대이진 이후 문화 수준이 향상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셋째는 일본에 파견되던 사신단에 일정한 격식이 마련되어 간 사실이다. 이에 대해서도 다음의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먼저 사신의 조건에 관한 문제이다. 발해 초기에 武官이 파견되다가 8세기 중반에 文官으로 바뀌었고, 9세기에 들어오면서 문관 가운데에서도 문학적 소양이 있는 文人들이 다수 파견되었다. 이러한 문인들에는 副使 楊泰師(758년 파견), 大使 王孝廉과 부사 高景秀 및 錄事 釋仁貞(이상 814), 부사 周元伯(858), 대사 楊成規와 부사 李興晟(871), 대사 裴頲(882), 대사 배정과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부사(894), 대사 裴璆(907·919·929)가 있다. 이 가운데에서 양태사와 왕효렴 일행을 제외하면 모두 9세기 중반 이후가 된다. 이러한 사실은 발해사회의 질적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다. 무관에서 문관으로 변모한 것은 사신 파견의 목적이 정치적인 데에서 경제적인 것으로 바뀌었기 때문이지만, 문인을 파견한 것은 경제적인 목적과는 별로 상관이 없다. 이것은 9세기에 들어와 귀족들의 문학적 소양이 전반적으로 높아졌음을 의미하며, 결과적으로 발해사회의 문화적 기반이 더욱 확충되었음을 반영한다. 당나라 溫庭筠으로부터 발해가 “문물제도에서 한 집안을 이루었다”122)≪全唐詩≫9函 5冊, 送渤海王子歸本國.고 평가를 받은 것이나, 당 조정으로부터 “의로움을 아는 것이 華夏와 동일하다”123)≪全唐文≫권 647, 元稹, 靑州道渤海愼能至王姪大公則等授金吾將軍放還蕃制.고 칭찬을 받은 것은 ‘해동의 융성한 나라’라는 영예의 칭호를 얻은 것과 더불어 이러한 문화적 성숙이 바탕에 깔려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大使의 소속 관청과 관직에서도 변화가 보인다. 8세기에는 武職으로서 10衛에 속하는 郎將, 左熊衛 都將(낭장)이 있고, 지방관으로서 若忽州都督, 行木底州刺史, 玄菟州자사가 있으며, 중앙관으로서 政堂省左允, 司賓寺 少令이 있어서 사신의 소속 관청과 관직이 일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선왕 때부터는 소속 관청이 중앙의 政堂省과 文籍院으로 좁혀지고 있고, 관직도 정당성좌윤과 문적원少監으로 한정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추세는 선왕대에 들어서 발해 내부에서 각 관청과 관직의 역할과 기능이 고정되어 갔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따라서≪신당서≫발해전에 기재된 관직체계와 같은 틀이 완성된 것은 적어도 선왕대에 와서야 가능하였다고 생각된다.

 또한 발해에서 일본에 파견된 사신의 숫자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역시 8세기에는 최저 23명에서 최고 325명까지 들쭉날쭉하여 고르지 않다. 그러나 선왕 때부터는 100명 정도로 고른 분포를 보이기 시작하였고, 11대 大彛震이나 13대 大玄錫 시기부터는 105명으로 고정되었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사신의 파견 연한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였으나, 사신단의 규모에 대해서는 별로 규제를 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렇게 사신 숫자가 고정되어 간 것은 발해 자체의 규정이 마련되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마지막으로 中臺省牒의 휴대문제이다. 발해에서 중대성첩을 처음으로 보낸 것은 759년이다. 그러나 이 때 王書는 가져가지 않고 口頭로만 보고하였으며, 문서로는 첩만 가져갔다. 따라서 왕서와 첩을 함께 지참하기 시작한 것은 9세기에 들어서이다. 이러한 방식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정확히 알기는 어렵지만, 전해지는 자료만을 토대로 한다면 대이진 시기인 840년대부터가 된다.

 이상으로 일본에 파견되는 사신단에 대한 틀이 일정하게 마련되어 갔던 점을 살펴보았다. 이것은 선왕 때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대이진이나 대현석 시기에 완성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비단 이 자체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발해 관제, 나아가 발해사회 전체의 고정 격식이 이 시기에 와서 완비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爭長事件과 관련된 문제이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崔致遠의 글이 있다.

신 某는 아룁니다. 신이 저희 나라의 宿衛院 狀報를 보니, 지난 乾寧 4년(897) 7월에 賀正使로 왔던 발해 왕자 大封裔가 狀을 올려 발해가 신라보다 윗자리에 앉기를 요청하였으며, 이를 처리한 勅旨를 보건대, ‘國名의 先後는 본래 强弱으로 따지는 것이 아니니 朝制의 순서를 지금 어찌 盛衰를 근거로 바꿀 수 있겠는가. 마땅히 과거의 관례에 따를 것이니 이에 두루 알리노라’고 하였습니다(≪孤雲集≫권 1, 謝不許北國居上表).

 이 내용을 자세히 음미해 보면, 당나라는 발해의 국력이 신라보다 앞섰음을 인정하고 있었다.124)浜田耕策,<唐朝における渤海と新羅の爭長事件>(≪古代東アジア史論集≫下, 吉川弘文館, 1978), 349쪽. 이를 가리켜 安鼎福도 “발해가 스스로 강대국을 자처하였다”125)安鼎福,≪東史綱目≫권 5 下, 정사년 7월.고 지적하였다. 이 때 신라는 孝恭王 원년으로서 後三國으로 분열되던 시기였고, 반면에 발해는 14대 大瑋瑎가 왕으로 있으면서 9세기에 이룩하였던 융성이 지속되고 있었다. 이에 따라 발해 왕자 대봉예는 자신있게 당나라에 서열의 변경을 요구할 수 있었다.

 이상으로 8세기말부터 9세기말까지의 발해사회를 살펴보았다. 결론적으로 문왕이 사망한 793년부터 선왕이 즉위한 818년까지 25년간은 정권쟁탈을 둘러싼 內紛의 시기였다. 그리고 선왕이 즉위하여 내분을 수습하고 중흥을 이룩함으로써, 그 이후 13대 왕 대현석에 이르기까지는 크게 발전하여 전성을 구가하던 隆盛의 시기였다. 이 때에 당나라로부터 해동성국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러한 융성은 14대 왕 대위해 시기까지도 지속되었다. 그러다가 마지막 왕인 大諲譔이 즉위할 무렵부터 내외의 혼란에 빠져 멸망의 시기에 접어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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