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10권 발해
  • Ⅱ. 발해의 변천
  • 3. 발해유민의 부흥운동
  • 2) 전기 부흥운동-후발해와 정안국-

2) 전기 부흥운동-후발해와 정안국-

 발해가 멸망한 후 그 유민들 가운데서 발해왕조를 다시 세우려는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발해유민들의 자발적 운동 결과는 아니었지만, 발해가 멸망한 후 발해인들이 다수 참여한 최초의 왕조는 발해의 옛 수도 忽汗城(上京 龍泉府)에 세운 東丹國이었다.168)東丹國은 일반적으로「동단국」이라고 불리고 있으나, 그 명칭은 원래 동쪽의 거란(글안)이라는 뜻이므로「동란국」또는「동안국」이라고 하여야 할 것 같다. 그러나 동란국은 거란 정복자들이 세운 괴뢰정권이었으므로 이를 발해 부흥운동의 일환으로 다루는 것은 문제가 있다. 동란국의 왕은 거란 耶律阿保機의 큰 아들 耶律倍였고 기타의 고위직에 발해인들이 상당수 등용되었던 것은 발해인을 회유하기 위한 배려에 불과하였기 때문이다.

 거란에 의한 동란국 건설의 근본 목적은 발해지역의 거란화였다. 그러나 이러한 그들의 목적은 발해유민의 저항 등으로 그다지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다음 몇 가지 점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첫째는 927년 동란국 수도를 홀한성에서 거란 수도와 가까운 遼陽으로 옮겼다는 사실이다. 둘째는 동란국의 右次相 耶律羽之가 수도를 옮기는 이유로 “홀한성의 위치가 거란의 상경 용천부와 너무 멀어, 만약 발해유민이 이러한 구석진 곳에서 서식하면 반드시 뒷날 좋지 못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하였던 점이다.169)동란국 수도의 천도 이유에 대해서는 동란왕 야율배의 아우였고 거란 태종이었던 耶律德光이 그의 형 동란국왕 야율배를 제치고 아버지 야율아보기의 급작스러운 병사를 이유로 거란국왕이 되었던 형제간의 알력 때문이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李龍範,<高麗와 渤海>,≪한국사≫4, 국사편찬위원회, 1974, 70∼72쪽). 셋째는 926년 8월 거란이 항복시켰던 발해의 長嶺府 등을 다시 정벌하였던 점170)≪遼史≫권 2, 本紀 2, 太祖 下, 天顯 원년 3월 및 8월. 등이다. 그리고 거란은 압록강 중류와 두만강 하류 일대 특히 한반도 서북부의 옛 발해 영토에 대해서는 거의 손을 못 쓰고 있었으며, ‘여진’으로 남아 있던 발해유민들에게 많은 저항을 받고 있었다. 어쨌든 대다수 발해유민들이 거란에게 제압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시기는 後渤海 兀惹정권이 거란의 공격을 받고 싸우다가 평화관계를 유지하게 되는 1004년(거란 聖宗 統和 22) 전후가 아니었을까 한다.

 발해가 멸망한 후 거란에 의해 세워졌던 동란국이 927년 서쪽의 요양으로 옮겨가고, 그 곳 홀한성에 발해 대씨 왕실의 진정한 부흥 왕조가 세워졌는데, 이것을 926년 이전의 발해와 구별하여「후발해」라고 한다.171)和田淸,<定安國に就いて>(≪東洋學報≫6, 1916 ;≪東亞史硏究(滿洲篇)≫, 東洋文庫, 1955)에서 後渤海를 언급한 이래 日野開三郞,<後渤海の建國>(≪帝國學士院紀事≫2­3, 1943)에 의해 그 이름이 굳어졌다(韓圭哲,<渤海復興國 ‘後渤海’硏究-연구동향과 형성과정을 중심으로->,≪國史館論叢≫62, 國史編纂委員會, 1995 참조). 후발해의 건국 연대는 高正詞가 발해 사신으로 후당에 갔던 929년경으로 보고 있으며,172)발해에서 사신 高正詞를 파견하여 입조하고 특산물을 바쳤다(≪冊府元龜≫권 972, 外臣部, 朝貢 5, 後唐 天成 4년 5월 및≪五代會要≫권 30, 渤海, 後唐 天成 원년). 멸망 시기는 후발해의 올야정권이 거란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붕괴되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1003년 무렵으로 보고 있다.173)≪遼史≫권 14, 本紀 14, 聖宗 統和 21년 4월 무진. 사실 발해유민과 거란과의 관계에서 ‘발해’라는 이름이 최후로 나오는 것이174)後渤海의 멸망 시기는 日野開三郞의 견해를 따랐다. 그러나 和田淸의 생각을 받아들인 李龍範은 후발해의 존속기간을 10여 년으로 보았다. 즉 후발해의 대씨 왕실이 10여 년만에 烈氏 定安國에게 왕실을 찬탈당하였던 것으로 파악하였다(和田淸, 앞의 글 및 李龍範, 앞의 글, 76∼78쪽). 바로 이 때였다.

 후발해의 수도는 옛 발해 수도가 있던 홀한성으로 짐작되며,175)日野開三郞은 忽汗城이 975년경에는 兀惹城으로 고쳐 불려졌다고 하였다. 한편 李龍範은 和田淸의 생각을 받아들여 後渤海의 중심지도 忽汗城이 아닌 鴨綠江 일대로 보았다(日野開三郞,<兀惹部の發展(3)>,≪史淵≫32, 1944, 42∼53쪽 및 李龍範, 위의 글, 73∼76쪽). 그 시조는 발해국의 대씨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후발해의 대씨정권은 곧 그들의 실질적 권력을 올야 출신의 烏氏에게 빼앗겼다.「대씨발해」가「오씨발해」로 바뀐 것이다.176)兀惹를 “올야 자체는 여진족의 집단이나, 그 지배층은 여진화된 발해민 오씨일 것”이라고 한 견해가 있다(李龍範, 위의 글, 85쪽). 그러나 필자는 오씨가 발해시대「고씨」등과 함께 귀족성의 하나였다는 사실과, 대조영이 송화강 출신으로 후대에 그를「속말말갈」로 표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감안하여, 발해시대의 올야 부락 역시 발해국의 한 부락이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후발해의 발전은 군사·외교적 면에서 두드러졌다. 975년에는 거란에게 반기를 들고 도망해온 발해유민 출신의 장수 燕頗와 함께 발해의 옛 부여부를 탈환하기 위한 군사작전을 펴기도 하였다. 그리고 발해의 옛 長嶺府지역이었던 輝發河(回跋河) 유역에서의 싸움에서도 원군 7천 명을 보내기도 하였으며,177)≪遼史≫권 8, 本紀 8, 景宗 上, 保寧 7년 9월. 979년경에는 定安國의 일부 세력을 규합하기도 하였다. 한편 외교적 면에서는 후당에 高正詞, 成文角 등을 7차례나 보내기도 하였다.178)日野開三郞, 앞의 글(1943), 474∼477쪽. 그러나 후발해와 중국과의 관계는 954년 7월 발해 호족(酋豪) 崔烏斯 등 30인이 後周에 귀화했던 기록이179)崔烏斯는 崔烏斯多·烏斯多·烏思羅와 같은 인물로 보고 있다. 그의 귀화 기록은≪宋史≫권 491, 列傳 250, 外國 7, 渤海國 및≪五代會要≫권 30, 渤海, 後周 顯德 원년 참조. 마지막이었던 것으로 보아, 이 때부터 후발해는 주로 내정과 거란과의 관계에 관심을 쏟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상경 용천부를 중심으로 하여 후발해가 발해의 부흥왕조로서 계승되고 있을 때에, 한편으로 발해의 서경 압록부였던 압록강 일대를 중심으로 한 발해유민들의 부흥운동이 烈氏 定安國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었다.180)池內宏,<遼の聖宗の女直征伐>(≪史學雜誌≫26­6, 1915).
―――,<余の遼聖宗征女眞考と和田博士の定安國考について>(≪東洋學報≫6­1, 1916).
三上次男,<高麗の定安國>(≪東方學報≫11­1, 1940).
日野開三郞,<定安國考(一·二·三)>(≪東洋史學≫1·2·3, 1950·1951).
和田淸, 앞의 글.
정안국의 건국 연도에 대해서는 935∼936년설과 937년설, 970년설 등이 있다.181)935∼936년설은 三上次男, 위의 글, 338∼339쪽, 937년설은 日野開三郞, 위의 글(二), 45∼54쪽, 그리고 970년설은 和田淸, 위의 글 참조. 아무튼 정안국에 관해서는≪宋史≫열전에도 나와 있는데, 이에 의하면 정안국은 970년에 국왕 烈萬華가 송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였다고도 한다.182)≪宋史≫권 491, 列傳 250, 定安國.
이 때를 定安國의 건국 연대로 보는 견해도 있다(和田淸, 위의 글).

 그렇다면 고려 경종 4년(979)에 고려에 내투해 오는 수만 명의 발해사람들은183)≪高麗史≫권 2, 世家 2, 경종 4년. 대체로 정안국 사람들이었을 가능성이 높으며,184)三上次男, 앞의 글, 340쪽. 당시 고려의 北進策은 정안국과 마찰하였을 가능성도185)三上次男, 위의 글.
姜大良,<高麗初期의 對契丹 關係(上)>(≪史海≫1, 1948), 33쪽.
없지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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