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10권 발해
  • Ⅱ. 발해의 변천
  • 3. 발해유민의 부흥운동
  • 3) 후기 부흥운동-흥요국과 대발해국-
  • (2) 고영창의 대발해국

(2) 고영창의 대발해국

 흥요국 붕괴 후 많은 발해유민들이 요양지방을 떠나 다른 지방으로 강제 이주되었지만, 이 지역의 발해유민들은 그래도 상당수가 남아 있었다. 이 지역을 중심으로 1116년(거란 天祚帝 天慶 6) 정월에 발해유민 高永昌이 다시「大渤海國」을 세워 발해국의 부흥을 꾀하였다.

 발해가 멸망한 지 190년이 지나서 거사를 한 고영창도 처음에는 여느 발해의 지배층 유민들과 같이 거란에 협조하던 발해 후손이었다. 그러나 그도 거란이 여진 完顔 阿骨打의 공격을 받고 붕괴되어갈 무렵, 아골타 무리를 물리치기 위하여 당시 거란 황제였던 天祚帝가 그에게 渤海武勇馬軍 2천을 모집하여 遼陽府 부근의 白草谷을 지키게 하였던 기회를 이용하여 발해 부흥국을 세웠다. 고영창은 당시 東京留守 蕭保先에 대해 반감을 가진 발해유민들을 선동하여 1116년 정월에 그의 거사에 호응한 발해병 8천 명으로 동경 요양부를 점령하고 스스로가 대발해국 황제에 즉위하여 隆基라는 연호도 사용하였다.194)≪高麗史≫권 14, 世家 14, 예종 11년 3월 임인.
≪高麗史節要≫권 8, 예종 11년 3월.
≪遼史≫권 28, 本紀 28, 天祚帝 天慶 6년.
葉隆禮,≪契丹國志≫권 10, 天祚帝 天慶 6년.
「大渤海國」의 國號에 대해≪고려사≫와≪고려사절요≫는 모두 大元이라 전하고 있고, 그 연호를≪거란국지≫는 應順이라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대발해국에 관한 자료는 일반적으로≪요사≫의 기록을 취하고 있고, 그 내용도 다른 기록들에 비해서≪요사≫가 풍부하여 필자도 이에 따른다.

 대발해국은 그들이 발해 부흥 왕조를 세운 지 10여 일 만에 요동의 50여 주를 석권하는 위세를 떨쳤으며, 貴德州(鐵嶺市 東南)의 거란 장수 耶律余賭조차 廣州에서 이 거사에 순종하는 형세였다. 고영창은 한때 거란과 瀋州(瀋陽)에서 공방전이 벌어지고 있는 사이 신흥 금나라와 협상도 갖는 등 유리한 입장에 있었다. 그러나 고영창은 황제를 고집하는 등 경직된 협상을 벌이다 이것이 결렬되자 오히려 금나라 군대에 의해 참살되면서,195)≪金史≫권 71, 列傳 9, 斡魯. 대발해국을 통한 부흥운동 또한 실패하고 말았다.

 대발해국은 고영창이 내세운 국호에서도 알 수 있듯이, 발해 계승의식이 명확히 나타난 이른바 명실상부한 발해 부흥국이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1030년 대연림이 부흥시키려던 흥요국은 그 국호에서 보여주는 것과 같이 발해 계승의식이 많이 쇠퇴한 면이 있었다. 그러나 대발해국은 발해가 망한 지 200년이 가까웠음에도 불구하고, 떳떳하게 발해국이라 호칭하였던 것은 거란 내부의 발해유민들의 역사의식을 분명히 보여준 것이라고 생각한다.

 대연림이 세웠던 발해 부흥국 흥요국과 고려 사이에 수 차례 교섭이 있었던 것처럼, 고려와 대발해국간에도 교섭이 있었다. 고려 사신들이 고영창의 대발해국에서 겪었던 사건들은 다음 기록에 잘 나타나 있다.

① 秘書校書郞 鄭良稷을 보내어 安北都護府의 아전이라 칭하고, 공문을 가지고 요나라 동경에 가서 節日使 尹彦純·進奉使 徐昉·賀正使 李德允 등이 오래 머무는 사실을 염탐하여 알아오게 하였다. 2월에 일본국에서 柑子를 바쳤다. 遼나라 동경 사람 高諝가 來附하였다(≪高麗史節要≫권 8, 예종 11년 정월·2월).

② 鄭良稷이 요나라 동경으로부터 돌아왔다. 그 때에 동경의 渤海人이 난을 일으켜 留守 蕭保先을 죽이고 供奉官 高永昌을 세워 황제라 僭稱하고 나라 이름을 大元이라 하고 연호를 세워 隆基라 하였다. 그런데 良稷이 거기에 이르러 官銜을 詐稱하고 표문을 올려 臣이라 칭하고 국가가 東京留守에게 주는 토산물을 고영창에게 贈與하고 후한 대접을 받고 돌아왔으나, 이것을 숨기고 알리지 않았다가 일이 발각되어, 有司가 그를 옥에 가두어 벌 줄 것을 청하니 그대로 하였다(≪高麗史≫권 14, 世家 14, 예종 11년 3월 임인).

③ 尹彦純·徐昉·李德允 등이 요나라 동경에서 돌아왔다. 윤언순 등이 동경에 구류되어 있는 동안 고영창이 勅命하여 表文을 올려 그 건국을 稱賀하라 하니, 모든 것을 그의 말대로 하였는데 돌아와서는 숨기고 자수하지 않으니, 유사가 청하여 그 죄를 다스렸다(≪高麗史節要≫권 8, 예종 11년 3월).

 발해국 부흥운동 중에는 고영창의 대발해국보다 1년 전인 1115년에 일어났던 古欲의 부흥운동이 있었다.196)≪遼史≫권 28, 本紀 28, 天祚帝 天慶 2월·4월·5월. 고욕은 자칭「大王」이라고만 했다고 전하고, 이들이 어떠한 국호나 연호를 썼는지는 모른다. 단지 고욕의 부흥 정권은 거란의 심장부인 시라무렌강 상류의 饒州에서 발해유민의 제철 기술자 1천 호를 포함한 호구 4천의 長樂縣과, 태종 때에 발해의 여러 고을 잡호로 세운 安民縣의 발해유민을 배경으로 세워졌다는 정도가 알려져 있을 뿐이다. 고욕 역시 그가 대왕을 칭한 지 5개월 만에 거란의 계략에 말려들어 사로잡힘으로써 부흥운동은 무산되고 말았다.

 발해국의 부흥운동은 모두가 실패로 돌아갔다. 발해의 옛 지역이 거란의 지배 아래 들어가면서 그들 자신이 발해국을 광복하겠다는 의식도 상당히 약화되어, 흥요국과 같이 단지 현실적 이해관계에서 발해의 부흥을 외쳐댈 뿐이었다. 그러나 이보다 85년이 지난 고영창의 부흥운동은 그 국호에서도 볼 수 있듯이 흥요국보다 매우 적극적이었다.

 요컨대 발해국 부흥운동이 발해 멸망 후 100년이 넘도록 계속되고 있었다는 사실은 정복된 발해지역이 갖는 발해사적 의미를 확인해 주는 것이고, 발해 멸망 후 190년이 지난 시기까지「발해」사람들이 거란으로부터 고려에 내투하도록 하지 않았는가 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발해와 신라가 갖고 있던 남북국의 역사·문화적 계승의식이 발해 멸망 후 200년 가까운 시기까지 이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반증해 준다. 그들이 단순히 고려가 인접한 곳이었기 때문에 발해 멸망 후 줄곧 고려를 그들의 망명처로 삼지는 않았음이 명백하다.

<韓圭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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