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10권 발해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1. 신라와의 관계
  • 1) 발해 건국기의 남북교섭

1) 발해 건국기의 남북교섭

 신라와 발해의 첫 접촉은 발해가 왕실을 개창한 지 2년째가 되던 高王(大祚榮) 2년(700)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러한 사실은 신라 崔致遠이 唐 昭宗에게 보낸 글에서 확인된다. 즉 그는 소종에게 보낸<발해가 신라보다 위에 앉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음을 감사하는 글(謝不許北國居上表)>에서 발해에 관하여 “그들이 처음 거처할 고을을 세우고 와서 인접하기를 청하였기에 그 추장 대조영에게 비로소 신라의 제5품 大阿飡의 벼슬을 주었다”고 하였다. 이로써 발해가 건국한 후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였음을 알 수 있다.

 7세기말 건국기를 전후하여 발해는 당으로부터 심한 위협을 받고 있었다. 이러한 위기를 벗어나기 위하여 발해는 돌궐과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는 등 당을 견제하기 위한 외교정책을 구사하였다. (동)돌궐은 630년 당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여 흩어졌으나, 682년부터 다시 일어나 당의 위협적 존재가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696년 당의 王孝傑 등이 돌궐을 치다가 대패하였다든지, 698년 狄仁傑이 돌궐을 쳤던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이럴 즈음에 당의 회유와 군사적 공격에도 불구하고 옛 땅에 와서 나라를 세운 발해는 돌궐에 먼저 사신을 보내어 당에 대한 공동 전선을 모색하였다. 이어 발해는 신라에도 사신을 파견하였다. 이것은 과거 신라와 당의 연합군이 고구려를 공격하였던 것과 같은 또 다른 공격을 막기 위한 조처였다고 판단된다. 결국 발해 사신은 대조영이 신라로부터 제5품 대아찬의 벼슬을 받는 외교적 수모를 당하면서도 외교적 실리를 찾고자 하였다.

 발해 건국기의 대외교섭은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신라는 발해왕 대조영에게 신라의 제5관등인 대아찬을 주는 형식을 취함으로써 그들의 명분을 유지하였고, 발해는 그들이 우려하였던 신라와 당의 접근이 현실화되지 않음으로써 새 왕조 건설의 안전을 보장받았기 때문이다. 남북국의 첫 교섭은 양국이 서로 당과의 관계에서 의존이 아닌 자주적 활동을 펼쳤다는 점에서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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