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10권 발해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1. 신라와의 관계
  • 2) 발해 왕권확립기의 남북대립

2) 발해 왕권확립기의 남북대립

 발해와 신라의 교섭 분위기는 발해 고왕의 집권 중반기까지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러나 대조영 집권 말기부터 발해와 신라는 대립관계로 전환되기 시작하였다. 신라가 聖德王 12년(713)에 발해와의 접경지인 開城에 성을 쌓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대립적 분위기는 발해의 왕권이 확립되는 제2대 무왕(大武藝) 때에 이르러서 더욱 굳어졌다. 무왕의 대내외정책은 옛 고구려 영토의 회복을 의식한 때문이었는지 매우 강경하였다. 주변 여러 종족들을 병합하여 상당한 성과를 올렸고, 신라가 차지하고 있던 고구려 영토에 대한 회복 의지도 강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점은 신라가 성덕왕 20년에 강릉지방의 장정 2천 명을 징발하여 북쪽 경계에 긴 성을 쌓기도 하는 등 발해와의 군사적 대결을 의식한 축성사업을 벌이고 있었던 사실에서 드러나고 있다.

 발해와 신라가 직접적으로 충돌하는 계기는 무왕 仁安 14년(732)에 있었던 당나라 공격에 신라가 개입한 사건에서 비롯한다.200)韓圭哲, 위의 책, 179∼190쪽. 발해와 당은 발해 건국과정에서부터 대립적이었다. 즉 당은 李楷固를 시켜 요하를 건너 동쪽으로 이동하고 있던 대조영을 공격하였다가 天門嶺에서 패배한 적도 있었다. 이러한 양국관계는 발해의 고구려 영토 회복정책과 신라와 발해의 대립관계가 심화되면서 더욱 노골화되었다.

 발해가 당의 登州를 공격하게 된 배경 중의 하나는 당이 발해를 견제하기 위하여 黑水靺鞨과의 관계를 긴밀히 하였던 데에 있다. 즉 오랫동안 돌궐의 간섭을 받아오던 흑수말갈이 돌궐의 세력 약화를 틈타 당에 접근하여, 당의 흑수주 설치를 허락하고 長史라는 감독 관리까지 맞아들였다. 이러한 양측의 접근을 막기 위하여 발해 무왕은 흑수말갈의 정복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은 그의 동생 大門藝의 반대에 부딪혀 실행되지 못하였다. 당에서 宿衛하였던 적이 있는 대문예는 발해의 흑수말갈 공격이 자칫 당의 공격을 불러들여 발해가 멸망할 수 있다는 이유를 들어 흑수말갈의 정복을 반대하였다. 그의 이러한 반대는 형 무왕의 노여움을 사게 되어 그가 결국 당나라로 망명하고, 발해가 당을 공격하는 사태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발해는 무왕 인안 14년 9월 張文休 등을 해상으로 보내어 당의 등주(山東省 모평현)와 萊州(산동성 청주)를 공격하였으며, 육로로는 요서지방의 馬都山까지 진출하기에 이르렀다. 등주를 공격한 장문휴는 등주자사 韋俊을 죽이고 그 곳에 주둔하고 있던 당나라 군대를 격파하기도 하였다. 이에 대해 당은 장군 蓋福順과 발해에서 망명한 대문예로 하여금 발해를 공격하도록 하는 한편, 당에 와 있던 신라인 金思蘭을 귀국시켜 신라로 하여금 발해의 남쪽을 치도록 요청하였다.

 신라는 당의 요구에 응하여 군대를 발해(말갈)의 남쪽 국경지역에 파견하였으나, 때마침 내린 폭설로 산길이 막혀 죽은 병사들이 과반수나 되어 다시 돌아왔다.201)≪三國史記≫권 8, 新羅本紀 8, 성덕왕 32년. 사실 일기상의 이유만으로 죽은 자가 그렇게 많았는지는 의문이다.

 한편 이 사건이 일어났을 당시 당나라에 있던 신라 지식인들의 태도에서도 남북국의 대립상을 엿볼 수 있다. 당시 성덕왕의 사촌 동생으로 성덕왕 25년(726)에 신년하례 사신으로 당에 갔다가 숙위로 머물러 있던 金忠信의 발언이 그 좋은 예이다. 그는 무왕 인안 14년 발해와 당이 전쟁을 시작하자 발해 토벌을 위해 신라가 끝까지 군사적 대응을 해야 한다고 부추기면서, 그러한 명령을 자신을 통하여 신라왕에게 전달해 줄 것을 당 玄宗에게 간청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발해에 관하여 “兵馬를 내어 말갈(발해)을 쳐 없애자”라고 하였으며, “흉악한 도적(발해)”, “준동하는 저 오랑캐(발해)”라는 극언도 서슴지 않았다.

 아무튼 발해가 당의 등주를 공격하게 되었던 직접적인 원인은 흑수말갈문제였지만, 더 근본적 원인은 신라와의 대립에서 비롯되었다. 그러한 근거로는 신라가 당의 청병요청에 응하여 발해를 공격한 것이라든지, 그 이후에도 발해를 독자적으로 공격하려 하였고, 이 사건 이후 발해와 당의 관계보다 발해와 신라의 관계가 더욱 악화되었던 사실을 들 수 있다. 반면에 신라와 당은 매우 우호적 관계로 전환되었다. 그 이전만 하더라도 삼국민의 당 축출전쟁으로 인하여 신라와 당의 관계는 적대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신라의 당에 대한 군사적 지원 이후부터 당은 비로소 신라의 浿江(大同江) 이남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정식으로 인정하였으며, 신라 역시 당에 謝恩使를 파견하는 등 신라와 당의 친선관계가 회복되었다. 그러나 남북국 사이에서 이 사건은 발해와 신라의 관계가 보다 적대적인 관계로 전환되는 분기점이 되었다는 데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

 신라와 발해가 대립하였던 또 다른 시기는 발해와 일본이 신라를 협공하려 했던 발해 3대 문왕(大欽茂) 때였다. 문왕은 무왕 대무예의 둘째 아들로서 737년에 왕위에 올라 무왕의 대내외정책을 이어받아 보다 적극적으로 발해의 정치제도를 정비하여 나갔다. 그 역시 왕위에 오르자 연호를 大興으로 고쳐 썼고, 수도를 敦化에서 黑龍江省 寧安縣의 東京城으로 옮겨 내정의 개혁을 꾀하였다. 이어 774년에는 연호를 대흥에서 寶曆으로 고쳤다가 말년에 다시 대흥으로 바꾸는 등 몇 차례에 걸쳐 정치쇄신을 위하여 힘썼던 것 같으며, 특히 그의 말년(785∼793)에 다시 혼춘의 東京 龍原府로 수도를 옮기는 등 진통을 겪기도 하였다.

 초기 및 번영기의 문왕대에는 발해와 신라 그리고 당과의 관계가 무왕대와 같은 형태로 진전되지 않았다. 신라 경덕왕은 중국의 제도를 과감히 받아들여 당지향적 내정개혁을 실시하였으며, 발해와의 관계를 의식한 듯 북쪽지역에 대한 순찰을 강화하고 변경지대에 大谷城(黃海道 平山郡) 등 14군현을 설치하는 등 북변지역의 경영에 관심을 기울였다. 반면에 발해는 당과 일정한 간격을 두고 조공외교를 통하여 경제·문화적 이익을 취할 따름이었다.

 이러한 국제관계 아래에서 발해와 신라가 충돌할 뻔했던 사건이 일어났다. 일본의 신라 공격계획(758∼764)에202)≪續日本紀≫권 22, 淳仁天皇 天平寶字 3년 9월 임오.
酒寄雅志,<渤海國家の史的展開と國際關係>(≪朝鮮史硏究會論文集≫16, 1979), 17∼20쪽 참조.
발해가 끼어든 것이다. 물론 일본이 그들의 신라 공격에 발해를 끌어들이려고 하였던 것은 발해와 신라의 대립관계를 이용해 보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일본은 742년과 753년 두 차례에 걸쳐 신라에 파견하였던 일본 사신이 신라 왕을 만나지도 못하고 돌아갔던 것을 수치로 여기고 신라 공격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형식상의 이유이고 실질적으로는 藤原仲麻呂(惠美押勝)정권의 정치적 위기를 밖으로 이전시키려는 전략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은 이 계획을 실천에 옮기기 위하여 762년을 실행 시기로 정하고 수백 척의 배를 건조하였다고 한다. 이 때 일본은 753년 신라에 사신으로 왔다가 수모를 당하고 돌아 갔던 小野田守를 발해에 파견하여 발해의 측면지원을 요청하였는데, 발해에서도 이에 동조하였다고 여겨진다. 발해의 揚承慶이 일본에 가서 융숭한 대접을 받고 돌아 왔고, 그 이후에도 양국은 일본의 주도 아래 몇 차례의 교섭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과 발해의 신라 협공계획은 발해의 중도 포기와 安史의 亂(755∼763)에 따른 국제정세의 변동, 그리고 일본의 정세변화로 무산되었다. 이후 발해는 대일관계를 군사적인 면에서 정치·경제적 면으로 그 정책을 전환하였다. 이것은 그들이 762년부터 일본에 보낸 사신들을 武官에서 文官으로 교체하였던 사실을203)≪續日本紀≫권 22, 淳仁天皇 天平寶字 3년 및 권 24, 天平寶字 6년.
石井正敏,<初期日渤交涉における一問題-新羅征討計劃中止との關連をめぐって->(≪史學論集 對外關係と政治文化≫1, 吉川弘文館, 1974), 98∼103쪽.
통해 알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당시의 국제정세의 변화 또한 발해의 신라 공격계획에 변동을 가져왔다. 즉 당에서 일어났던 안사의 난을 계기로 하여 발해와 당과의 관계가 개선되었으며 발해와 신라와의 대립도 완화되어 갔다. 당은 안사의 난 이후 발해의 도움이 필요한 때문이었는지 문왕 26년에 발해왕을 ‘郡王’에서 ‘國王’으로 격상·인정하고 신라와 동등한 대우를 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동아시아의 이러한 평화적 분위기는 발해의 신라 공격을 그만두게 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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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국의 대립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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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러한 발해측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끝내 신라 공격을 포기하지 않았다고 보여진다. 그 계획의 중심인물이었던 혜미압승이 건재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라에 대한 발해와의 협공계획은 이제 일본 단독으로 실행해야 하는 부담을 안게 되었다. 결국 이 계획은 764년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혜미압승이 난을 일으켰다가 실패하면서 무산되었던 것이다. 孝謙천황과 淳仁천황 세력의 분열이 심화되고 순인천황의 막후 실력자로서 신라 정벌계획의 입안자이기도 했던 혜미압승이 반란을 일으켰다가(764) 敗死하면서,204)岸俊男,≪藤原仲麻呂≫(吉川弘文館, 1969), 382∼417쪽. 신라 정벌계획은 무산되게 되었다. 그러나 신라 협공을 위한 일본과 발해의 이러한 군사적 연합계획이 결국 실천에 옮겨지지는 않았지만 이러한 사건이 신라와 발해의 대립구도에서 나올 수 있었다는 데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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