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10권 발해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1. 신라와의 관계
  • 4) 발해의 영토확장과 신라·당 밀착기의 남북대립

4) 발해의 영토확장과 신라·당 밀착기의 남북대립

 신라 하대 정치세력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이루어진 남북국의 교섭은 발해의 영토확장과 신라와 당의 군사 협력을 계기로 하여 대립관계로 전환되었다. 10대 宣王 大仁秀의 즉위와 함께 발해는 고구려 영토 수복정책을 적극 추진하였는데, 이와 같은 발해의 정책은 신라와 당에게 모두 위협적이었다. 즉 이러한 정세는 신라와 당에게는 서로 협력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주었다. 또 신라와 당의 밀착은 발해와 신라가 교섭을 단념하고 또다시 대립하도록 하였다.

 발해와 신라의 관계가 교섭에서 대립으로 결정적으로 바뀌게 되었던 것은 신라와 당의 군사적 협력관계에서 비롯되었다. 신라의 도움이 필요하던 당은 그들 내부에서 일어난 李師道의 반란사건을 계기로 신라를 더욱 가까이 하게 되었다. 즉 신라는 헌덕왕 11년(819) 당에서 일어났던 이사도의 반란을 토벌하기 위한 당의 지원요청을 받고 군대 3만을 파견하였다. 이것은 신라가 성덕왕 31년(732)에 발해의 공격을 받았던 당을 군사적으로 지원한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사도는 본래 고구려계 사람으로서 고구려 멸망 후 당에 강제로 이주되었던 李正己의 손자였다. 따라서 당이 이사도의 반란을 토벌하는데 신라의 도움을 청하였던 것은 이사도를 발해계로 생각하여 남북국의 대립관계를 이용하려 하였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이 사건 이후 신라와 당은 매우 우호적인 관계로 변하였다.

 그러나 신라와 당의 밀착이 남북국의 관계에 미치는 영향은 매우 부정적이었다. 먼저 신라의 대내적인 면에서 보자면, 지금까지 원성왕계의 반발을 견제하기 위하여 헌덕왕의 측근에 대거 등용하였던 무열왕계에 대한 대탄압이 이루어졌다. 신라와 당의 밀착 이후 무열왕계 金周元의 아들인 金憲昌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헌덕왕이 그 무리 239명을 처형한 것은(822), 그만큼 왕권에 대한 자신감의 표현이 아니었을까 한다. 다음으로 신라의 대외관계에서 보자면, 신라가 중대 성덕왕 이후와 같이 당과의 밀착을 추구함으로써 남북의 관계는 대립적 방향으로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즉 신라는 헌덕왕 18년(826) 1만여 명의 漢山 북쪽 주민들을 동원하여 발해와의 북쪽 경계에 긴 성을 쌓아 발해와의 대결을 각오하는 방향으로 외교노선을 전환하고 있었다. 신라와 당의 밀착은 결국 발해와의 대립관계를 심화시켰고, 내부 반대세력의 탄압으로까지 연결되었던 것이다.

 신라와 발해가 대립적이었다는 사실은 일본의 승려 圓仁이 쓴≪入唐求法巡禮行記≫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이 책은 그가 당에 조공사로 갔다가 거기에서 이탈하여 독자적으로 구법활동을 하며 기록했던 4권의 기행문으로서, 838년 7월부터 847년 초겨울까지 9년 반 동안의 여행기록을 담고 있다. 그런데 이 책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반 이상이 신라인들이고 발해에 관한 기록도 있어 당시의 남북관계를 알 수 있게 해준다. 이 기행문은 신라인들이 8월 15일이 되어서 백 가지 음식을 차려 놓고 3일 동안 밤낮으로 춤과 노래를 부르며 놀았다는 사실과, 그러한 이유를 신라와 발해가 싸워서 신라가 이겼던 날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하는 신라 노승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205)圓仁,≪入唐求法巡禮行記≫권 2, 開成 4년 8월 15일. 원인의 이 기록이 839년에 나온 것이니까 이것을 사실로 받아들인다면, 적어도 839년 이전에 신라와 발해는 정면으로 충돌한 적이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중국이나 신라의 어느 기록에도 양국간의 전쟁이나 신라의 승리 사실을 남기고 있지 않아 이에 대한 신빙성은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206)이 기록을 당시의 신라인들이 고구려가 멸망할 때 신라와 고구려가 싸웠던 날을 신라와 발해가 싸운 것으로 착각하여 전달한 것이 아닌가 추측하기도 한다(石井正敏,<朝鮮における渤海觀の變遷-新羅∼李朝->≪朝鮮史硏究會論文集≫15, 1978 ; 임상선 편역,≪발해사의 이해≫, 신서원, 1990, 52쪽). 아무튼 오늘날 한민족 최대의 명절인 추석의 기원을 발해와 신라의 대결에서 신라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한 데에서 유래할 수도 있다고 한 점은207)崔南善,≪朝鮮常識問答≫5, 名日.
依田千百子,<秋夕考>(≪白初洪淳昶博士還曆紀念史學論叢≫, 1977), 2∼3쪽.
주목하여 볼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남북국의 대립관계는 당에서 있었던 두 나라의 외교관과 유학생들의 경쟁에서도 엿볼 수 있다. 최치원의<謝不許北國居上表>를 통해서 잘 알려진 신라와 발해 사신의 자리다툼사건(席次爭長事件)도208)浜田耕策,<唐朝における渤海と新羅の爭長事件>(≪末松保和頌壽紀念 古代東アジア史論集≫下, 1978).
임상선, 앞의 책, 264∼265쪽.
그 한 예이다. 즉 大瑋瑎 4년(897)에 당에 사신으로 파견된 발해 왕자 大封裔가 당시 발해의 국세가 신라보다 강성함을 들어 발해가 신라보다 우선하여야 한다고 당 昭宗에게 요구하였다. 그러자 소종은 이것을 거절하고 신라 우선의 옛 관습대로 하였고, 이러한 소식에 접한 최치원이 당 소종에게 감사의 글을 보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외교적인 면에서 양국이 대립하고 있었던 하나의 실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대립은 당이 외국인들을 위해 설치한 賓貢科 시험에서도 있었다. 875년 발해의 烏昭度가 신라의 李同보다 높은 점수를 얻어 수석의 영광을 차지하자, 최치원은 이 사건이야말로 “일국의 수치로 영원히 남을 것이다”라고 치욕스럽게 여겼다. 또한 906년에는 신라의 崔彦撝가 오소도의 아들인 烏光贊보다 상위에 합격하자, 당에 있던 오소도가 자기 아들의 순위를 최언위보다 올려달라고 요구하였다가 거절당했던 적이 있었는데,209)≪高麗史≫권 92, 列傳 5, 崔彦撝.
≪崔文昌侯全集≫文集 1, 狀,<新羅王與唐江西高大夫湘狀>·<與禮部裴尙書瓚狀>.
金毓黻,<諸臣列傳>(≪渤海國志長編≫권 10, 華文書局, 1934).
이러한 것은 모두 남북국의 대립의식에서 나왔던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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