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10권 발해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1. 신라와의 관계
  • 5) 발해 멸망기의 남북교섭

5) 발해 멸망기의 남북교섭

 신라와 발해의 대립관계가 또다시 교섭의 분위기로 바뀐 시기는 발해가 멸망의 위기에 처해 있던 10세기 무렵이었다. 당시 남북국이 교섭하였음을 알려주는≪契丹國志≫의 기록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옛날에 발해국왕 大諲譔은 본래 奚 및 거란과는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관계였다. 그런데 (거란) 태조가 처음에 일어나 8부를 병탄하고 계속하여 군사로써 奚國을 병탄하자, 대인선은 이를 크게 두려워하여 은밀히 신라를 비롯한 여러 나라들과 더불어 서로 돕기를 약속하였다. 태조가 이것을 알고 의논을 모았으나 결정을 내리지 못하였다(≪契丹國志≫권 1, 太祖).

 발해의 마지막 왕 대인선이 거란의 팽창을 두려워한 나머지 은밀히 신라를 비롯한 여러 나라들에 구원을 요청하여 이것을 약속받았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新羅諸國’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발해의 사신 파견 대상국이 달라진다. 위에서 해석한 대로 ‘신라를 비롯한 여러 나라’라고 한다면, 당시의 신라를 포함한 後梁 등이 될 것이며, ‘신라의 여러 나라’로 해석한다면, 신라를 비롯한 후삼국의 여러 나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발해가 멸망의 위기에서 일차적으로 신라 등에 사신을 파견하였을 것으로 보이는 시기는 후량에도 사신을 파견하였던 대인선 6년(911)과 7년 경이었다.210)韓圭哲, 앞의 책, 130∼131쪽.
신라의 사신파견 시기에 대해서 金毓黻이나 酒寄雅志는 924년 경으로 본다.
金毓黻, 위의 책 참조.
酒寄雅志, 앞의 글, 32쪽.
이 때는 거란이 발해의 이웃 나라인 해국을 평정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발해로서도 위기감이 고조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국제정세가 거란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던 것은 아니므로, ‘신라제국’이 거란을 의식하지 않고 쉽게 발해를 돕겠다고 약속하지 않았을까 한다. 그러나 발해는 계속되는 거란의 공세를 이기지 못하고 파멸의 위기에까지 몰리게 되었다. 그러자 발해는 신라를 포함해서 고려 및 후당 등에도 사신을 파견하여 도움을 청했던 것으로 짐작된다.≪高麗史≫에 전해지고 있는 바와 같이 발해유민이 대대적으로 고려로 망명해온 사건이 있었던 시기가 바로 925년이었다는 것은 모두 당시의 이러한 정황과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발해의 은밀한 도움 요청을 받고 돕기를 약속하였던 신라제국이 발해를 돕지 않고 결국에는 거란을 도왔다고 한다.

(거란 태조는) 발해를 평정하고 (후)당에 사신을 파견하여 (이것을) 알렸다. 갑오일 다시 (거란 태조는) 忽汗城에 행차하여 창고의 재물을 돌아 보고 (그를) 따랐던 신하들에게 차이가 있게 하사하였다. 奚의 부장 勃魯恩과 王郁 그리고 回鶻·新羅와, 吐蕃·党項·室韋·沙陀·烏古 등은 (발해)정벌에 공이 있었다고 하여 특별히 상을 더하여 주었다(≪遼史≫권 2, 本紀 2, 太祖 下, 天顯 원년 2월).

 위의 기록은 신라가 거란의 발해공격을 도와 주었기 때문에 거란 태조로부터 상을 받았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이 기록은≪遼史≫사이의 일치되지 못한 기록상의 문제로 인하여 신라가 과연 거란의 발해공격에 참가하였을까 하는 것과, 참여하였다면 그 규모는 과연 어느 정도였는가 하는 문제 등이 제기되고 있다. 당시 신라의 국내사정으로 보아 신라는 거란의 침략을 지켜 보고만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이것 역시 거란을 돕는 하나의 방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소규모일지라도 신라가 거란의 발해공격에 참가하였을 것이라는 견해211)宋基豪,<발해 멸망기의 대외 관계-거란·후삼국과의 관계를 중심으로->(≪韓國史論≫17, 서울大, 1987), 21∼26쪽.도 있으며, 적어도 신라가 발해를 멸망시키려는 거란을 지원하였다는 데에는 의견이 일치되어 있다.

 그렇다면 신라가 발해의 멸망 과정에서 발해의 도움 요청에 응했다고 하는 사실과, 결국 신라가 발해를 돕지 못하고 침략자 거란을 도왔다고 하는 사실은 한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즉 왜 신라는 후삼국 대립이라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발해의 원조 요청에 돕겠다는 약속을 하였는가 하는 점과, 결과적으로 신라가 발해를 돕지 못하고 무력적이건 방관자적 입장에서건 침략자였던 거란을 도왔는가 하는 점이다.

 전자의 경우 신라가 발해의 인접국이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시 인접국으로서 신라보다 더 효과적일 수 있는 後梁(907∼922)이나 後唐(923∼936)·奚 등이 발해가 가장 먼저 도움을 청할 수 있는 나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신라와 발해의 역사적 관계가 일정하게 반영되어서 ‘신라제국’이 발해를 도울 수 있는 나라로 기록되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신라는 발해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였다. 신라가 발해를 물리적으로 돕지 못하였던 원인은 신라 내부의 혼란에도 있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신라의 발해에 대한 공동체 의식의 변화에서도 찾을 수 있다. 남북국이 200여 년에 걸쳐 정치적 긴장과 대립을 유지하였던 결과로 남북국을 형성하던 7세기 말엽보다 공동체 의식이 훨씬 약화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요컨대 남북국이 교섭하였던 시기는 발해의 건국과 멸망, 그리고 신라의 귀족항쟁기에 해당하는 시기로서 양국은 서로가 정치·외교적인 면에서 매우 불안한 때였다. 반면에 남북국이 대립하였던 시기는 서로가 안정된 시기 내지 전성기에 해당하는 때였다. 이러한 면에서 양국교섭의 한계를 지적한다면, 신라는 그들 특정 집단의 이해관계에 따라 발해와 교섭을 시도하였고, 발해는 고구려 멸망에 대한 신라와의 감정 대립으로 인하여 안정이 아닌 위기하에서 주로 신라와 교섭을 시도하였다. 또한 두 나라는 각기 당과 일본의 관계를 우선적으로 생각하고 남북교섭은 그들의 필요에 의한 차선책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이러한 한계는 결국 신라와 발해가 문화적 이질성이 심화되고 대립 현상이 고착되는 결과를 낳게 하였다.

<韓圭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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