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10권 발해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2. 당과의 관계
  • 1) 발해 건국 초기의 양국교섭

1) 발해 건국 초기의 양국교섭

 발해는 唐과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빈번하게 접촉하였다. 발해가 신라와 5차례, 일본과는 34차례 교섭이 있었던데 비하여, 당과는 무려 100여 차례가 넘는 교섭기록을 갖고 있다. 물론 이것은 기록만을 좇아 본 것이고 주로 발해 사신이 당에 파견되었던 것이 중심이지만, 양국의 관계가 신라나 일본과 달리 밀접한 관계였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양국은 전쟁을 포함해서 ‘朝貢’외교로 표현되는 정치·경제·문화적 교섭을 빈번히 하였기 때문이다. 왕조간의 교섭 의미를 횟수만으로 따질 수는 없지만 빈번한 접촉은 곧 두 나라간의 이해관계가 긴밀했었다는 하나의 방증일 것이다.

 양국간의 교섭은 발해의 건국과정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요동지방을 중심으로 전개되던 고구려유민들의 부흥운동이 당의 방해를 받고 있었고, 이를 물리치고 발해가 건국되었기 때문이다. 고구려 멸망 후 당의 營州(현 朝陽)에 끌려가 살고 있던 일부 고구려유민들은 696년 거란 추장 李盡忠 등이 반기를 들고 영주도독 趙翽를 살해하자 이를 계기로 당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발해를 세웠다. 이 때 이른바 대조영의 아버지라는 乞乞仲象은 당으로부터 ‘震國公’에 책봉되어 회유를 받았으나 받아들이지 않고, 추격해 오던 당의 거란 출신 장군 李楷固를 天門嶺에서 크게 물리치고212)天門嶺의 위치에 대해서는 張廣才嶺說(丁謙), 承德縣 西境說(≪滿洲源流考≫), 輝發河와 琿河의 분수령인 長嶺子 附近說(松井等)이 있다(張昌熙,<天門嶺地理位置之我見>,≪延邊大學學報≫, 1983­3 및 松井等,<渤海國の疆域>,≪滿洲歷史地理≫1, 1913). 새로운 왕조를 건설하였다. 30년만에 ‘고씨 고구려’에서 ‘대씨발해’로 그 역사를 이을 수 있었던 것은 당의 추격을 물리쳤기 때문이다.

 대조영은 국가를 세우고 돌궐과 신라 등에 사신을 파견하여, 발해의 건국 사실을 알리고 이를 인정받음으로써 당에 대한 공동대처를 시도하였다. 이러한 외교적 노력은 신라로부터 대조영이 신라의 제5품 관등을 받음으로써 신라와 당이 다시 연합하지 않는 효과를 만들어 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은 705년 발해 건국을 기정 사실화하고 발해와의 관계를 점차 개선하는 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당은 中宗의 즉위와 함께 사신 張行岌을 보내어 화해를 구하기도 하였다. 이에 대조영도 그 아들 大門藝를 숙위로 당에 파견하는 등 당과의 관계를 우호적인 방향으로 바꾸었다.

 당의 조정으로부터 ‘靺鞨’로만 불리웠던 발해는 713년 대조영이 “渤海郡王 忽汗州都督”으로 책봉을 받음으로써, 이 때부터 辰國 대신에 ‘渤海’라 불리워지게 되었다.213)발해는 건국 초기에 ‘振國’이라 하다가 곧 ‘渤海’로 국호를 바꾸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중국학계를 중심으로 여러 학자들은≪新唐書≫권 219, 列傳 144, 北狄 渤海傳의 “이로부터 비로소 靺鞨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오로지 渤海로만 불렀다”라는 점을 근거로 하여, 마치 당나라가 발해의 국호를 ‘靺鞨’에서 ‘渤海’로 고쳐준 것으로 이해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당시의 양국관계는 많은 한계가 있었으니 대조영에 대한 당의 인식은 ‘발해국왕’이 아닌 ‘발해군왕’이었다. 발해가 신라와 대등하게 국왕으로 인정받았던 시기는 당나라가 安史의 亂 등으로 발해의 협조가 필요한 시기였던 발해 문왕 大興 26년(762)에 이르러서였다.214)≪舊唐書≫권 199 下, 列傳 149 下, 北狄 渤海靺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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