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10권 발해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3. 일본과의 관계
  • 1) 발해 건국 초기의 양국교섭

1) 발해 건국 초기의 양국교섭

 발해와 일본은 東京 龍原府의 한 곳으로부터 일본까지를 잇는 日本道가 있었다고 중국측에 기록될233)≪新唐書≫권 219, 列傳 144, 北狄 渤海.
발해 사신의 출발지는 동경 용원부의 한 항구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금의 중국 길림성 琿春의 八連城으로 보고 있으며, 도착지는 일본의 出羽國 내지 能登國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특히 최근에는 발해 사신의 출발 항구와 관련하여 혼춘에서 가까운 지금의 연해주 포시예트항이 주목받고 있다.
정도로 공식적인 교섭이 빈번하였다.

 남북국시대에 발해와 일본의 관계는 신라보다 더 빈번한 접촉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 즉 발해가 일본에 34차례, 그리고 일본이 발해에 13차례에 걸쳐 사신을 파견한 것으로≪續日本紀≫에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三國史記≫가 신라 1,000년의 역사를 다루면서 일본에 10차례밖에 사신을 파견하지 않은 것으로 기록한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물론 일본측의≪속일본기≫등은 신라와 일본의 관계에 관하여 이보다 많은 기록을 남기고 있는데, 신라가 일본에 24차례, 일본이 신라에 24차례 교섭을 하였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234)山田英雄,≪日本史料集成≫(平凡社, 1956), 67∼69쪽의「遣新羅使年表」및「新羅使年表」참조. 물론 일본측의 신라와의 교섭은 발해와 일본처럼 왕조대 왕조의 접촉뿐만 아니라 민간차원의 교섭내용까지 포함하고 있는 것이어서, 왕조간의 교섭만을 본다면 남북국시대의 228년 동안 발해와 일본은 신라보다 긴밀한 접촉을 하였던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발해가 일본에 처음 사신을 파견한 것은 발해 武王 仁安 9년(727)으로, 이 때 발해 사신 寧遠將軍 郎將 高仁(高仁義)과 高齊德 등 24인이 일본에 파견되었다.235)≪續日本紀≫권 10, 聖武天皇 神龜 4년 9월 경인. 이들은 바다에서 폭풍을 만나 蝦夷에 표착하였다가 고인 등이 해를 당하고 다만 고제덕 등 8인만이 살아 남아서, 같은 해 9월에 出羽國에 상륙하였고 12월에는 일본수도 나라(奈良)에 도달하였다. 다음해 정월에는 聖武天皇을 만나 발해의 國書와 信物을 전하였다. 고제덕 등은 일본 방문에 대한 답으로 일본 천황으로부터 正六位上의 관작과 함께 帛·綾·絁·綿 등의 비단류도 받았다. 또한 이들은 신년하례가 끝난 뒤 초대되어 雅樂을 듣기도 하였으며, 발해왕에게 보내는 교서를 가지고 4월에 귀국할 때에는 引田蟲麻呂로부터 발해까지 전송을 받기도 하였다. 발해와 일본의 교섭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런데 발해가 일본에 사신을 파견한 것은 대체로 신라를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236)그렇지만 발해의 일본에 대한 교섭이 흑수말갈사건으로 인한 발해의 당에 대한 공격을 염두에 둔 조처였다는 해석도 있다(韓圭哲,≪渤海의 對外關係史-南北國의 形成과 展開-≫, 신서원, 1994, 187∼188쪽).

 발해와 일본의 교섭은 이후 십여 년간의 공백이 있었다. 발해는 文王 大興 3년(739) 일본에 두번째 사신으로 忠武將軍 胥要德·雲麾將軍 已珍蒙 등을 보냈는데 이 때에 일본의 朝唐使 平群廣成도 함께 동행하였다. 이들 가운데 서요덕은 바닷물에 빠져 죽고 이진몽·평군광성 등만이 출우국에 상륙하였다. 같은 해 12월에는 일본 수도에 들어가 발해의 국서와 선물을 전하였으며 다음해 정월 7일에는 일본 천황으로부터 답례품을 받기도 하였다. 한편 이진몽은 渤海樂에 대해서 일본측에 설명하기도 하였고 활쏘기대회를 참관하는 등 문화교류도 활발히 하였다. 이들은 같은 해 2월 일본측 大伴犬養의 전송을 받으면서 귀국하였다.

 이와 같이 발해가 두번째로 사신을 파견한 것은 일본과의 첫 교섭 이후 12년이 지난 때였다. 제3대 문왕은 그의 시호에서도 알 수 있듯이 무왕과는 달리 文治를 통하여 발해의 질서를 유지하려던 왕이었다. 발해의 중앙정치기구와 지방제도 및 왕실제도가 비로소 체계적으로 확립된 시기가 바로 문왕대였다. 그가 재위한 기간은 발해의 다른 어느 왕보다도 긴 56년간이었는데, 오랜 재위기간을 통하여 안정된 왕권을 바탕으로 제도를 정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발해가 일본에 다시 사신을 파견한 것은 문왕의 대외적 유화정책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던가 한다. 문왕은 당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적극성을 보였던 것과 같이 일본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다시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고 이것이 사신파견으로 나타난 것이라 하겠다.

 발해가 일본에 세번째로 사신을 파견한 것은 문왕 대흥 16년으로, 輔國大將軍 慕施蒙과 일행 75명을 보낸 것이다. 두번째 사신파견으로부터 13년째가 되던 해였다. 그러나 당시 발해의 대일 교섭태도는 이전과 다른 면이 있었다. 발해왕의 국서를 갖고 가지 않아 일본조정으로부터 억류될 뻔하였으며 다음해 6월 그들은 일본의 전송사신 없이 귀국하였다. 양국간에 처음으로 사신의 파견과 접대에 있어서 불편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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