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10권 발해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3. 사회·경제구조
  • 1) 사회구조
  • (2) 토인과 수령

(2) 토인과 수령

 한편 발해의 신분뿐 아니라 주민구성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존재인 土人과 首領에 대하여 일본의≪類聚國史≫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발해국은 고구려의 옛 땅이다. …그 넓이가 2천 리이고 州縣館驛이 없고 곳곳에 村里가 있는데 모두 말갈의 부락이다. 그 百姓은 말갈이 많고 土人이 적다. 모두 토인으로서 村長을 삼는데, 大村(촌장)은 都督이라 하고, 다음(촌장)은 刺史라 하고, 그 아래(촌장)는 백성들이 모두 首領이라 한다(≪類聚國史≫권 193, 殊俗部, 渤海 上, 延曆 15년 4월 무자).

 이에 의하면 발해의 백성은 말갈인과 토인으로 구분되고 있다. 토인은 곧 고구려인을 말한 것으로 보이므로, 지방행정구획에 있어서의 상위직은 대부분 고구려인이 차지하고 있었다.296)한편 土人에는 고구려인 집단뿐 아니라 營州 방면에서 東走한 말갈인 집단도 포함되어 있었고, 이들은 순수 말갈에 비해 소수가 아니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盧泰敦, 앞의 글, 263∼269쪽). 그러나 말갈과 토인은 별개의 종족적 명칭이 아니고 단순히 지배층과 피지배층을 표시한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韓圭哲,<渤海國의 住民構成問題>,≪발해의 민족형성과 연구사≫, 발해사 국제학술회의 발표요지, 1993, 91쪽). 그러나 고구려유민 전부가 집권층이었다고는 할 수 없으며, 그 문벌 및 건국사업의 참여 여부에 따라서 일반 양민 또는 기술직에 속하는 층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297)李龍範,≪古代의 滿洲關係≫(한국일보사, 1976), 136∼137쪽. 또한 말갈족 중에서도 乞四比羽 무리를 비롯한 건국과정에 참여한 집단은 고구려유민에 준하는 신분을 보장받았을 것이다.298)발해의 건국과정에 참여한 말갈집단으로는 걸사비우 집단뿐 아니라 營州로부터 東牟山에 발해가 건국되는 동안에 합류한 부류, 그리고 건국 직후에는 속말수 지역의 속말말갈이 대표적 집단이었다(林相先,<渤海 建國 參與集團의 硏究>,≪國史館論叢≫42, 國史編纂委員會, 1993, 136∼145쪽).

 그런데≪유취국사≫의 기록은 수령의 해석을 둘러싸고 적지 않은 논란을 야기시켰다. 먼저 발해의 지방행정체계가 大村(도독)-次村(자사)-下村의 3단계로 이루어졌으며, 하촌 즉 차촌 아래의 촌의 長이 바로 首領이라는 견해가 있고,299)李龍範,<渤海王國의 形成과 高句麗遺族(上)·(下)>(≪東國大學校 論文集≫10·11, 1972·1973 ;≪中世東北亞細亞史硏究≫, 亞細亞文化社, 1976, 21쪽).
金鍾圓, 앞의 글, 218쪽
최태길, 앞의 글, 286∼287쪽.
한편으로는 대촌-차촌의 2단계로 발해의 지방행정체계가 구성되어 있었고 이들 대촌과 차촌의 백성들이 도독, 刺史를 수령으로 불렀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300)朴時亨,<발해사연구를 위하여>(≪력사과학≫1962­1).
鈴木靖民,<渤海の首領に關する豫備的考察>(旗田巍先生古稀記念會 編,≪朝鮮歷史論集≫上, 1979 ;≪古代對外關係史の硏究≫, 吉川弘文館, 1985).
韓圭哲, 앞의 글, 91쪽.
그러나 수령은 이 기록 외에도 발해의 대외사절단에도 포함되어 있고, 이 때의 수령은 자사·縣丞과 별개의 존재로서 위계도 훨씬 낮은 존재였다. 또한 발해에 앞선 고구려의 지방통치조직이 大城-城-小城의 3단계로 구분되고, 대성과 성에는 중앙에서 褥薩과 處閭近支가 임명되고, 소성의 可邏達에 발해의 수령이 비정되는 것을 감안하면 앞의 주장 가운데 자사 아래 단계의 촌장이 수령이라는 해석이 온당할 것으로 생각된다. 결국 발해는 지방의 유력부락에는 도독 혹은 자사를 파견하여 주변의 부락을 통할시키고, 그 기초가 되는 아래 단계의 촌락에는 수령으로 불리는 토착부락장에게 자치를 맡기고 있었다고 판단된다. 그리고≪유취국사≫의 기록에 따르면 촌장은 모두 고구려인이며, 자사 아래 단계의 촌장이 수령이므로 도독과 자사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수령층 역시 고구려인이 임명되었음이 분명하다.301)≪類聚國史≫의 “處處有村里 皆靺鞨部落”이라는 기록에 얽매여 부락장도 모두 말갈인으로 해석한 경우도 있으나(河上洋,<渤海の地方統治體制-一の試論として->
≪東洋史硏究≫42­2, 1983 ; 임상선 편역, 앞의 책, 114쪽, 鈴木靖民, 위의 책, 457쪽 및 鈴木靖民, 앞의 글 ; 임상선 편역, 앞의 책, 127쪽), 이어지는 “其百姓者 靺鞨多土人少”의 ‘其’는 바로 앞의 ‘말갈부락’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하므로, 이 부분은 ‘곳곳에 있는 촌리는 대부분 말갈부락이며, 그 말갈부락의 백성은 말갈이 많고 토인이 적다’는 의미가 된다(金鍾圓, 앞의 글, 217쪽). 즉 ‘말갈부락’에는 말갈인만이 아니라 소수의 토인(고구려인)도 거주하고 있었다.

 수령은 국가에 대하여 관할지역 농업 생산물의 租나 특산물의 공납, 築城·造陵 등에 필요한 力役의 동원을 담당하였고, 지역주민을 근간으로 한 군대조직의 지휘관이기도 하였다. 한편으로는 큰 세력을 가진 수령은 대외사절의 일원으로 등장하는 경우도 있었다. 결국 발해에서는 고구려인 마을뿐만 아니라 말갈부락에도 토인 즉 고구려인을 촌장으로 임명하는 직접지배형태가 널리 행해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302)盧泰敦,<渤海 建國의 背景>(≪大丘史學≫19, 1981), 15쪽.
또한 수령을 통한 촌락지배는 신라가 村主를 통하여 촌락을 지배해 나가던 방식과도 유사한 점을 찾을 수가 있다(李基白·李基東, 앞의 책, 3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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