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10권 발해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3. 사회·경제구조
  • 1) 사회구조
  • (3) 사회생활

(3) 사회생활

 발해의 혼인풍습으로≪金史≫에 보이는 搶婚은 발해인 가운데서도 말갈족의 혼인풍습으로서 일종의 약탈혼이라고 할 수 있다.303)≪金史≫권 7, 本紀 7, 世宗 大定 17년.
창혼의 풍속이 모계씨족사회에서 부계씨족사회로 향하던 과도기에 남아 있던 풍속이라는 지적을 보더라도 이것이 고구려인보다는 말갈족에 가까운 혼인형태였던 것이 사실일 것이다(宋德胤,<渤海民俗論>,≪社會科學戰線≫1985­1 ; 崔茂藏 역,≪渤海의 起源과 文化≫, 藝文出版社, 1988, 290∼292쪽).
한편 발해 지배층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고구려계 주민의 혼인에 관해서는 전하는 기록이 없으나 이전의 옛 고구려시대와 별반 차이가 없었을 것으로 생각된다.304)≪新唐書≫권 220, 列傳 145, 東夷 高麗傳에는 “혼인에는 폐백을 쓰지 않고, 받은 자는 수치로 여긴다”고 하였고, 또≪隋書≫권 81, 列傳 46, 東夷 高麗傳에도 “혼인은 남녀가 서로 좋아하면 바로 행하고, 남자의 집에서 돼지와 술을 보낼 뿐 재물로 맞는 禮가 없다. 혹 재물을 받는 자가 있으면 사람들이 모두 이것을 부끄럽게 여긴다”고 하였다. 발해의 가족은 일부일처제가 기본이었다. 그것은 발해인들의 무덤 발굴에서도 확인되며, 문헌상으로도≪松漠紀聞≫에 잘 나타나 있다.

부인은 모두 사납고 妬忌하였다. 大氏와 다른 姓이 결합하여 10자매가 되었는데 번갈아 그 남편을 살피고 則室을 허용하지 않았다. 남편이 다른 여자와 교제하는 것을 들으면 음모를 꾸며 毒으로 총애하는 여인을 죽이려 하였다. 한 남편이 잘못을 범하였으나 부인이 이를 발견하지 못한 경우가 있으면 나머지 9인이 함께 모여 꾸짖었다. 질투와 시기로 서로 다툼이 심하였다. 그러므로 거란, 여진 등 여러 나라에는 모두 女倡이 있고, 그 나라의 良人들이 모두 小婦·侍婢를 거느렸으나 오직 발해만이 이와 같은 것이 없었다(洪皓,≪松漠紀聞≫권 上, 渤海國)305)한편 왕족인 대씨와 자매를 맺은 ‘다른 姓’은 귀족일 것이며, 왕족과 귀족들이 첩을 두지 않은 것은 역사발전법칙에 어긋나는 현상이므로 ‘대씨’는 ‘大氐’의 잘못이라는 주장도 있다(최태길,<“송막기문”의 발해무첩설을 론박함>,≪발해사연구≫4, 연변대학출판사, 1993, 182∼191쪽)..

 또한 발해의 왕족과 귀족의 자제들은 冑子監과 같은 교육기관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특히 여성들의 경우에는 “女師”라는 여성 교사의 개인지도를 받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발해의 儒家思想에 대한 이해의 폭은 당시 중국의 학문수준에 손색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306)방학봉,<정효공주묘지에 반영된 유가사상 연구>(≪발해문화연구≫, 이론과실천, 1991), 91∼108쪽.

 발해의 법률은 발해 멸망 뒤 거란이 그 유민들을 발해법이 아닌 漢法을 적용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당나라와 거의 차이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307)발해의 법률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이 참고가 된다.
島田正郞,<新出土史料による渤海國史の新事實>(≪遼朝史硏究≫, 創文社, 1979), 472∼475쪽
王承禮 저·宋基豪 역, 앞의 책, 78∼79쪽
魏國忠·朱國忱, 앞의 글, 106∼107쪽.
즉 738년 당에서≪三國志≫·≪晋書≫·≪三十六國春秋≫와 함께≪唐禮≫를 베껴왔는데, 이 당례는 바로≪大唐開元禮≫로서 당 현종 때 蕭嵩 등이 현종의 명을 받아 만든 것이었다.≪대당개원례≫는 황제를 중심으로 群臣 百僚와, 아래로는 지방관원에 이르는 모든 범위를 포괄하고 있으며, 무릇 제사·儀典·冠婚·喪葬 등의 의식과 함께, 외국에 대한 조공 수속 및 외교 의례도 명확히 규정하고 있다. 또한 大玄錫초에는 “자주 학생을 보내어 京師의 太學에 나아가 고금의 제도를 배우고 익혔다”는≪新唐書≫발해전의 내용으로 미루어 율령격식의 수입도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겠다.

 발해는 옛 고구려의 전통을 이어받아 말을 타며 활쏘는 것을 좋아하여 수렵활동이 활발하였다. 발해에는 오늘날의 하키와 비슷한 打球의 습속이 있어 일본에 간 발해 사신들이 일본 궁정에서 타구를 하였다는 기록이 일본에 전하고 있다. 또한 오늘날의 폴로와 마찬가지로 말을 타고 공을 치는 격구라는 놀이도 성행하였는데, 이 격구는≪遼史≫蕭孝忠傳에 의하면 발해인들이 무예를 연마하는 일환이기도 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渤海樂은 8세기초 일본과 교류가 시작된 이후 渤海樂師와 樂生들에 의해서 일본의 궁중에 渤海舞와 함께 전해졌고, 일본은 內雄을 발해에 파견하여 “音聲” 즉 발해악을 학습하도록 하였다. 그 뒤 발해악은 일본 궁정 음악의 하나가 되어 항상 연주되었다고 한다. 또한 발해의 왕립음악기관인 太常寺에서 연주된 악기들은 대부분 고구려의 악기들을 계승한 것이었고, 그 대표적인 것이 渤海琴으로 알려진 玄琴으로 추정되고 있다. 발해 멸망 이후에도 발해 무용수들의 후예들인 渤海敎坊은 금나라에서 발해무를 계승하였다.308)宋芳松,<渤海樂 小考>(≪東洋學≫14, 檀國大, 1984) 참조. 이 밖에 발해인들이 즐겼던 놀이로는 오늘날의 우리 나라 풍속에 전하는 강강수월래와 유사한 것으로 추정되는 踏鎚가 있었다.≪契丹國志≫에는 발해의 풍속에는 歲時마다 사람들이 모여 노래를 부르며 노는데, 먼저 노래와 춤을 잘하는 사람들을 여러 명 앞에 내세우고 그 뒤를 士女들이 따르면서 서로 화답하며 노래를 부르며 빙빙 돌고 구르고 하는데 이를 답추라 한다고 하였다.

 발해 관리들의 복식에 관해서는≪신당서≫발해전에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品으로써 차등을 두는데 3秩 이상의 服色은 紫色으로 하고, 牙笏과 金魚를 장식하였다. 5秩 이상은 緋色 옷에 아홀과 銀魚를 장식하였다. 6질과 7질은 엷은 비색, 8질은 녹색옷에 모두 木笏을 사용하였다(≪新唐書≫권 219, 列傳 144, 北狄 渤海).

 이러한 발해의 복식제도는 唐制를 모방한 것으로서 등급에 따라 관복의 색깔과 홀, 패식에 엄격한 구별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정효공주묘의 벽화에는 발해인의 모습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벽화속의 인물은 뺨이 둥글고 입술은 붉으며 얼굴이 크고 살이 쪘다. 머리에는 幞頭나 수건을 쓰고, 靑·紅·紫·白·赭色의 목 둘레가 둥근 袍에 가죽허리띠를 차고, 발에는 가죽신이나 삼으로 엮은 신을 신었다. 이러한 모습은 남자로 분장한 여자들의 묘사에 가까우며, 이것은 唐 則天武后의 男裝 풍습이 발해에 전래된 영향으로 보인다.309)王承禮 저·宋基豪 역, 앞의 책, 249쪽.

 발해인들의 주거도 각양각색이었다. 지배층은 상경성의 궁전에서 보듯이 화려하게 유약을 바른 넓직한 건물에서 살았으며, 왕의 숙소로 쓰였던 곳에서는 온돌시설도 발견되었다.310)상경성 이외에 온돌이 발견된 발해유지로는 흑룡강성 東寧縣 團結遺址, 러시아 연해주의 콘스탄티노프카와 아난예프스카야 유적, 북한의 함남 신포시 오매리 유지 등이 있다(韓圭哲, 앞의 글, 87∼88쪽). 온돌이 ‘ㄱ’자형으로 방의 두 개 벽면을 따라서 설치된 것으로 보아 잠자리에 들 때만 온돌을 이용하고 그 이외의 시간에는 입식생활을 한 것 같다. 일반인의 경우는 러시아의 연해주에서 발견된 주거지를 통하여 그 일단을 알 수 있다. 주거용 건물은 지상에 설치된 가옥과 반지하식 가옥이 있었다. 이들은 모두 선사시대 이래의 전통적인 움집 형태이다. 대체로 직사각형 또는 정사각형으로 그 면적이 지상 가옥의 경우 전기에는 12∼28㎡이다가, 후기에 이르면 50㎡에 이르고, 반지하식 가옥은 조금 작았다. 전기에는 화덕으로 난방을 하다가 후기부터 1∼3개의 고래가 달린 부분적인 온돌 난방이 이루어지고 있었다.311)송기호,≪발해를 찾아서≫(솔, 1993), 63∼64쪽 참조.

 발해인들은 왕이나 왕족, 귀족들은 산에 陵墓를 쓰거나 陵園에 매장하였으나, 일반 평민들은 공동묘지를 이용하였다. 발해 무덤들은 대체로 5가지 형태로 분류할 수 있다.312)李殿福·孫玉良,≪渤海國≫(文物出版社, 1987), 124∼130쪽. 土坑封土墓는 火葬을 하고 목관을 사용하였다. 石壙封土墓는 안에 목관을 두고 위에 봉토를 하였으며, 石棺封土墓는 큰 돌을 천장에 덮었다. 石室封土墓는 봉토가 높고, 천정은 抹角天井으로 된 것도 있고, 큰 돌로 평평하게 덮은 것도 있다. 塼室石頂封土墓는 정효공주무덤과 같이 천정은 판석으로 덮고 그 위에 塔式 건축물이 있기도 하다.313)무덤 위에 건축물을 짓는 것은 왕실귀족들이 자신들의 신분을 나타내는 하나의 형식이었다고 한다(정영진,<발해무덤연구>,≪발해사연구≫1, 연변대학출판사, 1990, 116쪽). 발해 무덤의 형식은 초기에는 이 지역 石棺墓의 전통과 고구려 석실봉토묘의 형식을 계승하였지만, 시기가 지나면서 점차 당의 영향을 받기도 하였다. 매장습속상의 목관장, 화장, 합장,314)발해 무덤의 주요 특징인 多人葬은 혈친관계가 있는 가족뿐 아니라 주인에게 예속된 노비들도 함께 매장한 결과이다. 발해의 다인장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연구가 있다.
송기호, 앞의 글(1984).
엄장록·박룡연,<북대발해무덤연구>(≪발해사연구≫2, 연변대학출판사, 1991).
연변박물관,<동청발해무덤발굴보고>(≪발해사연구≫3, 연변대학출판사, 1992).
2차장은 발해 민족의 복잡한 구성, 계급과 지위의 차이 및 매장습속의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

 발해와 관련된 전설로는 “남자는 智謀가 뛰어나고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용맹스러워 발해인 3명이면 호랑이 한마리를 당한다”는≪송막기문≫의 기록과 새나 짐승과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薩多羅에 대한 것이 있으며,315)洪皓,≪松漠紀聞≫권 上, 渤海國.
金毓黻,≪渤海國志長編≫권 11, 士庶列傳.
이외에도 오늘날의 경박호 주변에 발해 홍라녀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진다고 하나 신빙성이 없다(송덕윤 저·최태길 역,<발해의 속담과 전설>,≪발해사연구≫3, 연변대학출판사, 1992).
이러한 이야기 속에는 발해인의 총명함과 용감한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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