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10권 발해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3. 사회·경제구조
  • 2) 경제구조
  • (1) 경제생활

(1) 경제생활

 발해의 사회 발전수준과 더불어 경제적 발전도 지역에 따라 일정하지 않았다. 서부와 남부는 주로 농업지구였고, 동부의 핵심지대는 농업과 어업, 수렵, 목축이 서로 결합된 지구였다. 북부의 거주민들은 주로 어업, 수렵 및 목축에 종사하였고, 농업도 일부지역에서 어느 정도 발달하고 있었다.

 ≪신당서≫발해전에는 발해의 중요한 특산물을 다음과 같이 열거하고 있다.

귀하게 여기는 것에는 太白山의 토끼, 南海府의 昆布, 柵城府의 된장, 扶餘府의 사슴, 鄚頡府의 돼지, 率賓府의 말, 顯州의 布, 沃州의 綿, 龍州의 紬, 位城의 鐵, 盧城의 쌀, 湄沱湖의 붕어가 있고, 과일에는 丸都의 오얏, 樂游의 배가 있다(≪新唐書≫권 219, 列傳 144, 北狄 渤海).

 이러한 특산물은 半農半獵의 산업형태에 있던 주민들에게 부과된 부담으로서 국가재정에 충당되는 외에 대외무역에서도 일정한 역할을 하였으며, 이것을 관할하는 관청으로는 仁部 이외에 司藏寺, 大農寺 등이 있었다. 또한 이것을 보면 발해의 농업·수공업·어업·수렵업·목축업이 모두 상당히 발전되었고, 경제 각 분야가 비교적 고르게 갖추어진 것을 알 수 있다.

 농업지역은 주로 서부의 松嫩平原·松花江 유역의 부여부·막힐부·장령부·涑州, 서남부의 압록부, 남부의 남해부, 그리고 牧丹江·渾春河·목릉하 유역의 발해 핵심지구인 上京·中京·東京 및 솔빈부에 분포하였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기후가 찬 지대가 많았기 때문에 벼농사보다는 밭작물인 보리·조·콩 등이 많이 재배되었다. 철기가 농업생산에 보편적으로 이용되어 敦化 敖東城과 寧安 상경 용천부 유적지에서 쇠로 만든 보습·낫·가래 등의 농기구가 출토되었다. 고구려의 옛 땅이었던 지역에서는 일찍이 3세기에 이미 牛耕이 광범위하게 실시되었으므로 발해 당시에도 같은 방법으로 농경이 이루어지고 있었을 것이다.316)王承禮 저·宋基豪 역, 앞의 책, 129∼130쪽 참조. 한편 상경성 일대에서 출토된 세발달린 솥은 높이 20cm, 아가리 직경이 17cm로 발해인들이 음식물을 끊일 때 철기를 널리 이용하였다는 것을 전해준다.317)부경만, 관금천, 왕림안, 황림계 저·방학봉 역,<발해국의 서울 상경성의 문화유산에 대하여>(≪발해사연구≫3, 연변대학출판사, 1992), 240쪽.

 농작물 중에서 평원과 산간 및 半山間의 건조한 지역에는 주로 가뭄에 강한 조·보리·기장·콩을 심었다. 柵城에는 大豆로 만든 된장이 유명하였다. 盧城은 쌀의 산지로서 현재도 유명하다. 벼는 水稻와 旱稻의 두 종류가 있으며 재래의 만주 稻作은 한도의 경우가 많았다. 발해의 벼산지는 기후 때문에 노성을 중심으로 한 일부지역에 국한되었을 것이다.318)李龍範, 앞의 책(1976), 144쪽. 이 밖에 발해에서 유명한 과일로는 丸都의 오얏과 樂游의 배가 있었다.319)낙유는 발해의 지명으로서 기록에 보이지 않으므로 樂浪의 오기가 아닐까 생각된다(駒井和愛,<渤海の五京とその名産>,≪史觀≫81, 1945 ;≪中國都城·渤海硏究≫, 雄山閣, 1977, 207쪽).

 발해의 수공업은 국가 수요를 위한 관청수공업과 함께 전업적 수공업자와 농민들의 가내 수공업으로 이루어진 민간수공업도 존재하였다. 6부 중에 수공업과 관련된 부서는 智部와 信部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지부는 무관들의 인사행정과 지도·말·수레 및 무기들을 취급하였고, 신부는 산림·하천과 호수·수산자원과 둔전·토목축사업을 담당하였다. 한편 지방의 중요 군관구들에서도 무기를 자체 생산·수리하기 위한 무기수공업장을 조직 운영한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신부는 고려시기의 工曹와 같은 기능을 담당하였으며 말기에 工部로 불렸다. 이 밖에 국왕의 의복, 수레와 관련된 일을 취급하는 관청으로서 殿中寺도 있었다.320)홍희유,≪조선중세수공업사연구≫(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79), 69∼81쪽 참조.

 현주는 유명한 마포 생산지였다. 이곳은 옛 옥저의 땅으로서 貊布는≪三國志≫東夷傳에도 옥저의 특산물의 하나로 기록되어 있으며, 현주에서 고급 細布가 발달한 것은 이곳이 일시 발해 지배계급이 거주했던 수도였던 시기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321)日野開三郞,<國際交流史上より見た滿鮮の絹織物>(≪朝鮮學報≫48·63·82, 1968
·1972·1977 ;≪日野開三郞 東洋史論集≫9 北東アジア國際交流史の硏究(上), 三一書房, 1984, 374쪽).
발해가 後唐에 조공품으로 보낸 세포, 또는 말갈족이 거란과 교역한 細白布는 모두 이 ‘현주의 포’와 같은 것일 것이다.322)李龍範, 앞의 책, 143쪽. 현재 돈화 육정산고분군, 화룡 북대고분군, 그리고 용두산고분군에서 발해시대의 마포가 발견되었는데, 이 천은 길쌈이 엄밀하고 고르며 아직도 광택이 나는 은백색을 띠고 있었다.323)박윤무,<룡두산발해구역내의 룡호무덤떼에 대한 고찰과 발굴>(≪발해사연구≫4, 연변대학출판사, 1993), 10∼11쪽.

 발해의 남부와 동부에서는 멧누에를 길러 고치로부터 실을 뽑아 솜(綿)을 만들어 각종 綢와 紬를 짰다. 그 중에서도 남경 남해부의 沃州는 유명한 풀솜 생산지였다. 풀솜은 뽕나무에 나는 멧누에의 고치에서 실이 되지 않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명주 비단이 생산되는 모든 곳에서는 모두 이 풀솜이 생산되었지만 옥주의 풀솜이 가장 질이 좋았던 것 같다.324)옥주의 ‘綿’은 목화솜이 아니다(방학봉,<발해 ‘현주의 천’과 ‘옥주의 면’에 대한 연구>,≪발해사 연구≫, 정음사, 1989, 44∼46쪽). 또한 상경 용천부의 龍州는 솜실로 짠 주가 유명하였다.≪後漢書≫동이전에 濊俗에 綿布를 만든다고 한 면포는 바로 紬이다. 종래 발해 때에 흑수말갈이 당에 魚牙紬, 朝霞紬를 바쳤다는 기록을 근거로 발해 북부에서 주가 생산되었을 것으로 해석하였지만, 이것은 신라의 명산으로 추정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용주에서 주가 생산된 것은 이곳에 모인 발해의 지배계급의 강한 수요에 연유한 것이지만, 주원료인 綿이 옥주에서의 생산량으로는 부족하여 외국으로부터의 수입에도 힘을 쏟았다. 그리하여 원료를 자체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외부에 의존함에 따라 품종이나 수량에 큰 제약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325)日野開三郞, 앞의 글, 370∼375쪽. 발해가 생산하는 絲織品은 수량이나 채색 종류가 많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물품들은 국가가 통제하는 관청에서 만들어져 왕실 귀족에게 제공되었다. 즉 발해가 옥주의 면을 원료로 하는 관영 직조공장을 두고 있었던 것은 발해 멸망 후 요나라에서 발해인이 궁정에 직물을 공급하는 綾錦院에 소속되어 있는 사실을326)≪遼史≫권 37, 志 7, 地理 1, 祖州.
遼의 능금원에 소속되어 있는 발해인이 발해의 龍州에 있던 관영공장 織紬職人의 후예라는 주장도 있다(日野開三郞, 앞의 글, 383쪽).
통해서도 미루어 알 수 있다. 현재 정효공주무덤의 벽화 중에 侍者는 당시의 아름다운 명주(綢) 옷을 몸에 걸치고 있다.

 발해의 벽돌과 기와 및 도자기는 대체로 早期와 晩期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조기의 그것은 바탕흙이 거칠고 예술장식이 적은데, 돈화 六頂山의 것이 대표적이다. 만기에는 상경 용천부에서 출토된 것이 대표적이며, 바탕흙이 견실하고 고우며 안료의 색은 순청색이 많다.327)王承禮 저·宋基豪 역, 앞의 책, 132쪽. 발해의 도자기 생산에서 주목되는 것은 유약을 바르는 기술이 널리 보급된 사실과 함께 사기그릇이 새로이 생산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유약바른 도기로서는 세 가지 유약을 배합하여 구어낸 이른바 ‘渤海三彩’가 유명하고,328)1988년 7월 화룡현 북대 발해묘지에서 출토된 삼채병과 종지는 중국에서도 유일하게 완전한 형태의 삼채기물로서 국보로도 손색이 없다고 한다. 이 가운데 삼채종지는 아가리 지름이 11.6cm, 밑굽 지름은 6.1cm이고, 그릇 두께는 0.5cm, 그릇 높이는 5.4cm인데, 그릇 안팎에 초록색·연한 황색·미황색·흰색 등의 유약을 발랐으며 물결무늬·구름무늬, 혹은 갈마든 풀잎무늬 등이 나타나며 변화가 다양하고 아름답다고 한다(정영진,<1988년도에 발굴한 북대발해무덤 및 3채그릇>,≪발해사연구≫2, 연변대학출판사, 1991, 1∼10쪽). 사기그릇 가운데 831년 당나라에 수출된 순자색 자배기는 새털같이 가벼워 뛰어난 발해 도자기술을 알 수 있게 해준다.329)홍희유, 앞의 책, 78∼79쪽. 또한 “咸和”라는 글씨가 쓰인 絞釉葫蘆甁은 병의 높이가 24.5cm로 흰 바탕에 흐르는 구름이 에워싸고 있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330)李汝寬 著·井垣春雄 譯,≪中國靑花瓷器の源流≫(雄山閣, 1982)
韓國古代社會硏究所 編,≪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Ⅲ(1992), 484∼485쪽.
한편 궁전이나 절의 건축에 쓰인 기와는 별도의 부서 또는 부족이나 개인에 의해 제조되어 공납되었으며,331)중경 현덕부지인 서고성자와 동경 용원부지인 반납성자에서 동일한 인장을 찍은 기와가 출토되는 것도 일정한 곳에 위치한 製瓦場에서 수요에 응한 결과로 생각된다(三上次男,<渤海の押字瓦とその歷史的性格>,≪和田博士古稀記念 東洋史論叢≫, 講談社, 1961 ; 임상선 편역, 앞의 책, 168∼169쪽). 오늘날의 연해주지역에서는 발해와 신라의 문화교류를 짐작하게 하는 봉황연화무늬 기와도 출토되어 관심을 끌고 있다.332)문명대,<코르사코프카 불교사원지 발굴>(≪러시아 연해주 발해유적≫, 대륙연구소, 1994), 73∼102쪽.

 발해에서 생산된 광물로서 잘 알려진 것으로는 철·동·금·은 등이 있다. 발해인들은 철을 제련하는데 능숙하였다. 돈화·화룡·영안·동녕 등의 발해 유적지와 무덤에서 많은 수량의 철기가 출토되었는데, 이들 중에는 生鐵로 주조한 것이 있는가 하면, 熟鐵로 단조한 것도 있다. 중경 현덕부 鐵州 관할의 位城이 유명한 철 생산지였고,333)중경 현덕부가 위치한 두만강 남쪽은 조선시대에도 沙鐵의 생산지로≪世宗實錄地理志≫나≪東國輿地勝覽≫에 적혀 있을 뿐 아니라 江北은 지금도 天寶山 같은 鑛源을 가지고 있다(李龍範, 앞의 책, 144∼145쪽). 이 밖에≪요사≫食貨志에는 철리부의 廣州도 철이 많이 생산되었다고 전한다. 그리하여 遼는 발해를 멸망시킨 뒤 발해의 冶鐵 匠人들을 거란 영토내로 대거 이주시켰다. 한편 영안 상경 유적지, 돈화 육정산, 동녕 대성자, 집안 등지에서는 대량의 구리제품이 출토되었다. 구리는 생활용구와 각종의 장식품을 만드는데 비교적 널리 사용되었다. 특히 말탄사람 모형은 높이가 5.2cm에 지나지 않지만 말과 장식 및 사람 등을 섬세한 수법으로 나타낸 것으로서 발해인의 높은 주조기술을 잘 보여 주고 있다.334)홍희유, 앞의 책, 77쪽. 814년 발해 사신 高禮進이 당에 금불상과 은불상 각 1개씩을 가져간 것이나 836년 발해가 熟銅을 登州까지 운반하여 唐과 무역한 사실을 통하여 발해의 구리 생산과 구리 제련기술이 일정한 수준에 도달하였음을 알 수 있다.335)≪冊府元龜≫권 972, 外臣部, 朝貢 5.
≪冊府元龜≫권 999, 外臣部, 互市.
또한 화룡 북대지, 영안 상경 유적지, 돈화 육정산 등의 지역에서 출토된 금으로 만든 허리띠·장식물·팔찌·귀걸이 및 대량의 도금한 물건들, 은으로 만든 비녀 등에서도 발해의 금·은 생산의 면모를 살필 수 있다.336)王承禮 저·宋基豪 역, 앞의 책, 137∼138쪽.

 목축과 어업, 수렵업도 발해 경제생활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였는데, 특히 동부와 북부에서 더욱 그러하였다. 돼지는 고기는 식용으로, 가죽은 옷을 해입는데 이용되었는데 막힐부에서 생산되는 것이 가장 유명하였다. 말은 발해에서 사육된 가축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전국적으로 사육되었고, 그 중에서도 솔빈부의 말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730년 발해는 당에 조공하면서 말 30필을 바쳤고, 그 후 오래지 않아 다시 말 30필을 바쳤다. 淄靑節度使 李正己는 山東을 할거하면서 매년 발해와 말을 교역하여 많은 수입을 올렸으며 이는 발해쪽에서도 중요한 수입원이 되었다.

 한편 오늘날의 경박호에서 나는 붕어는 특산품으로 이름높았으며,≪송막기문≫에는 붉은 색을 띤 큰 바다게인 螃蟹도 아주 맛있는 식품이라고 기록되어 있다.337)魏國忠·朱國忱,<論渤海經濟>(≪學習與探索≫1982­2 ; 김정배·유재신 편,≪발해국사≫(1), 정음사, 1988, 18∼19쪽).

 그리고 동부와 북부의 반산간지역과 산간지역 및 강과 호숫가의 말갈인들은 주로 어업이나 수렵에 종사하였다. 수렵에서 주로 잡은 날짐승들로는 매·꿩이 있었고, 짐승들로는 담비·사슴·호랑이·표범·곰·말곰·멧돼지·銀鼠·靑鼠·흰토끼·사향노루 등이 있었다. 태백산의 특산물이라는 ‘토’는 종래 일반적으로 ‘흰토끼’로 알려져 왔지만, 최근 약재로 중요하게 쓰이는 茯苓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주목된다.338)조철부는≪신당서≫권 219, 列傳 144, 北狄 渤海傳에 발해 산물로서 기록된 14가지 산물들이 일정한 원칙을 따르고 있다는 전제하에, 만약 ‘태백산의 토’가 토끼라면 응당 부여의 사슴앞에 놓여야 하나 정작 식물과 나란히 배열되어 있으므로 이것은 식물이 옳으며, 그 중에서도 ‘태백산의 토’는 아마 복령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하였다(조철부 저·김영국 역,<발해국 력사의 세가지 문제에 대하여>,≪발해사연구≫4, 연변대학출판사, 1993, 192∼206쪽). 부여의 사슴도 널리 알려졌으며, 녹용과 사향은 진귀한 약재로 이용되었다.

 현재 발해에서의 화폐 사용 여부에 대해서는 이론이 없지 않으나339)발해의 화폐 사용 여부에 대해서는 다음의 연구가 있다.
왕림안 저·리춘호 역,<발해국의 화폐문제에 대하여>(≪발해사연구≫2, 연변대학출판사, 1991), 302∼309쪽.
왕림안 저·최태길 역,<발해국 화폐문제에 대한 중국학자들의 연구>(≪발해사연구≫4, 연변대학출판사, 1993), 73∼98쪽.
,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화폐와 물물교환이 병행되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발해에서 사용한 화폐로는 당이나 일본의 것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발해 독자의 화폐가 있어 자체적으로 주조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짐작되며, 변방의 낙후된 지역에서는 여전히 물물교환의 단계에 머물러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340)李殿福·孫玉良, 앞의 책, 97∼99쪽. 한편 발해가 생산이나 교환, 또는 건축 등에 사용한 도량형의 표준과 進位制는 대체로 고구려의 것과 유사하였다. 상경 용천부지에 있는 石燈의 크기를 관찰한 결과 발해자 1자는 35cm 내외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또한 10진법에 의해 운영되고 정연한 단위자 체계를 갖추고 있었던 점에서도 고구려와 유사한 점을 발견할 수가 있다.341)장상렬,<발해의 건축>(력사편집부 편,≪발해사연구론문집≫1,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1992), 266∼283쪽 참조.
이와 달리 발해의 도량형은 당의 제도와 같아서 大尺은 29.5cm, 小尺은 24.5784cm이고 1步는 5尺, 1里는 360보로서 오늘날의 531m에 해당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방학봉,<발해의 도량형에 대하여>,≪발해사연구≫2, 연변대학출판사, 1991, 164∼168쪽).
특히 상경성 부근에서는 쇠로 만든 저울돌이 발견되어 당시에 저울이 사용되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342)저울돌은 높이 7cm의 반구형으로서 밑부분은 평탄하고 지름은 6.5cm이며, 무게는 2근이고 꼭대기에는 높이 0.8cm의 가락지가 있다(부경만 등 저·방학봉 역, 앞의 글, 2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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