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10권 발해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3. 사회·경제구조
  • 2) 경제구조
  • (2) 대외무역

(2) 대외무역

 발해는 당, 일본, 그리고 신라와 무역을 하였는데, 이런 무역은 왕실, 귀족간의 官方貿易이 중심이었고, 간혹 사신과 민간인에 의해 이루어진 일정 범위내의 민간무역도 있었다. 발해는 국내의 불리한 자연지리적 조건으로 말미암아 대외무역의 발전에 힘을 쏟아, 이 분야에서는 중국 동북지역의 역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적극성을 띠어 매우 융성하였다.343)日野開三郞, 앞의 글, 376쪽..

 ≪신당서≫발해전에는 발해의 대외교통로로 日本道·新羅道·朝貢道·營州道 그리고 契丹道가 언급되어 있다. 일본도는 발해의 수도였던 상경 용천부에서 동경 용원부를 지나 동남쪽의 오늘날 Pos’yet灣의 Kraskin에 도달하여 일본으로 향하는 길이며, 신라도는 동경 용원부를 출발하여 남해부를 경유하여 신라의 井泉郡에 이르는 길이었다. 조공도와 영주도는 모두 중국으로 가는 통로로서 전자는 서경 압록부를 지나 해로로 당에 이르고, 후자는 육로로 長嶺府를 통과하여 당의 동북지방 거점인 영주에 이르는 길이며, 거란도는 부여부를 지난다고 하였다. 이 중에서도 발해와 교류가 빈번했던 나라는 당과 일본 그리고 신라였다.

 발해와 당과의 교역은 713년 대조영이 아들을 당에 보내어 市場에서 교역할 수 있도록 요구하여 당 현종의 허락을 얻으면서 시작되었다. 발해가 중국으로 수출한 상품은 담비·호랑이·표범·곰·말곰·토끼·쥐 등의 가죽, 인삼·우황·白附子·사향·꿀 등의 약재, 고래·마른 문어·매·말·양·布·綢·紬·구리 등이었다. 당에서 발해에 들여온 물품에는 帛·錦·綿·絹과 금·은으로 만든 그릇 등이 있었다.344)王承禮 저·宋基豪 역, 앞의 책, 139쪽 참조. 특히 발해의 名馬는 登州와 靑州에서 많이 거래되었고, 836년에는 발해가 구리를 운반하여 등주에서 판 일도 있었다.345)당나라 登州府(지금의 산동성 봉래현)의 성 남쪽에는 新羅館과 함께 渤海館도 있었는데, 이곳에서는 외교상의 왕래와 무역의 필요에 따라 발해 사신을 접대하고 무역업무를 처리하였다(圓仁,≪入唐求法巡禮行記≫권 2, 開城 5년 3월 2일).

 일본과의 경제교류는 주로 왕실간의 公貿易의 형태로 이루어졌지만 민간무역도 일부 있었다. 양국 왕실간에 의례적인 예물교환의 형식으로 진행되는 공무역 이외에, 사신이 개인의 명의로 선물을 주고받는 형식의 무역, 사신단이 使館에서 일본측 관리들과 개인 상인을 상대로 하여 진행하는 사무역 등이 있었다.346)박영해,<발해의 대외관계에 대하여>(≪력사과학론문집≫12,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1987), 216쪽. 양국간에는 발해의 상인들이 직접 일본에 가서 진행한 사무역도 있었는데, 예를 들면≪續日本紀≫에는 天平 18년(746) 발해인과 鐵利國人 1,100명이 일본의 出羽國에 상륙하여 교역활동을 한 일이 기록되어 있다. 일본이 발해에 수출한 것에는 絹·綿·絁·綾·錦·布·襭羅·白羅·실·황금·수은·석유·水精念珠, 檳榔扇이 있었으며, 발해가 일본에 보낸 것에는 담비 가죽·호랑이 가죽·표범 가죽·인삼·꿀 등의 토산물347)王承禮 저·宋基豪 역, 앞의 책, 140쪽 참조.과 함께 당의 물품도 일부 포함되어 있었다.348)예를 들면 바다거북의 껍데기인 대모로 만든 술잔이 있다(東野治之,<日唐間における渤海の中繼貿易>,≪日本歷史≫438, 1984 ; 임상선 편역, 앞의 책, 273∼274쪽).

 한편 남쪽의 신라와도 견직물 등의 분야에서 일정한 경제교류가 있었는데, 양국간의 교류로는 남경 남해부에서 신라의 동북경으로 들어가는 길이 주요 노선이었지만 민간상인들이 많이 이용한 것은 서경 압록부의 桓州에서 만포를 거쳐 신라의 서북경으로 들어가는 길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349)日野開三郞, 앞의 글, 376쪽.

<林相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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