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10권 발해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 불교와 기타 신앙

1. 불교와 기타 신앙

 발해의 종교는 불교가 중심이었다.350)발해 불교에 대하여는 다음의 글이 있다.
宋基豪,<渤海佛敎의 展開過程과 몇 가지 特徵>(≪伽山李智冠스님華甲紀念論叢韓國佛敎文化思想史≫上, 1992) 참조.
713년 12월에 당나라에 갔던 발해 왕자가 절에서 예배하기를 청한 사실에서351)≪冊府元龜≫권 971, 外臣部, 朝貢 4, 開元 원년 12월. 당시 발해 왕실이 이미 불교에 젖어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이것은 발해인들이 과거 高句麗나 營州에 살던 시절에 이미 불교를 접촉한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松漠紀聞≫에서 발해 초기에는 浮圖氏가 적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초창기에는 유포 범위가 그리 넓지 못하였을 것이다.352)洪皓,≪松漠紀聞≫권 上, 渤海國.

 발해 불교에 대하여 일부에서는 그 원류를 靺鞨族에서 찾고 있지만,353)何明,<淺談唐代渤海的佛敎>(≪博物館硏究≫1983­3), 42쪽.
방학봉,<구국, 중경, 동경을 수도로 한 시기의 발해의 불교에 대한 연구>(≪발해사연구≫, 정음사, 1989), 140쪽.
현재로서는 그럴 정도로 말갈족 사이에 불교가 확산되어 있었다는 기록이 없고 이를 뒷받침할 만한 유적도 없다.354)말갈인의 불교 관계 기사는 설화적인 내용 하나만이≪續高僧傳≫권 25에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河上洋,<東北アジア地域の佛敎-渤海を中心として->(≪大谷大學史學論究≫1, 1987), 63∼64쪽.
따라서 그 뿌리는 고구려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발해의 불상이나 瓦當 등이 고구려 것과 거의 동일하다는 사실이 일차적으로 이를 증명해 준다.

 발해 불교는 과거 고구려 영역이었던 中京·東京지역과 그렇지 않았던 舊國(첫 도읍지)·上京지역으로 나누어 볼 수 있을 만큼 그 양상이 달랐다. 뒤에 다시 다루지만 이러한 차이는 두 지역에서 유행하는 불상양식과 이에 따른 신앙형태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고구려 영역에서 벗어나 있던 구국과 상경지역에는 발해가 건국되면서 불교가 새로 유입되었다. 반면에 중경이나 동경지역은 삼국통일전쟁에서 별로 피해를 보지 않았던 곳이었으므로 발해에 편입된 뒤에도 단절없이 고구려 이래의 사회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으며, 종교활동도 역시 그러하였을 것이다. 그러한 사례로 함경남도 新浦市의 梧梅里 절골유적을 들 수 있다. 이 곳에서 발견된 건물자리에서는 고구려 문화층과 발해 문화층이 함께 나타나는데, 발해 문화층에서 고구려 金銅板이 발견되었다고 한다.355)박진욱,<최근년간 우리 나라 동해안일대에서 발굴된 발해유적들과 그 성격에 대하여>(≪연변대학조선학국제학술토론회론문집≫, 1989), 292쪽.
조선유적유물도감 편찬위원회,≪조선유적유물도감≫4 고구려편(외국문종합출판사, 1990), 281쪽.
이 사실은 고구려 때에 만들어진 것이 발해 시기까지 그대로 전승된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二佛竝坐像이 동경지역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되는 것도 고구려 후기 이래로 그 전통이 고수된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한다.356)三上次男,<半拉城出土の二佛並座像とその歷史的意義-高句麗と渤海を結ぶもの->(≪朝鮮學報≫49, 1968 ;≪高句麗と渤海≫, 吉川弘文館, 1990, 154∼155쪽).

 발해 불교가 발전기를 맞이한 것은 文王 때이다. 이는 우선 불교식으로 지은 그의 尊號인 “大興寶曆孝感金輪聖法大王”에서 엿볼 수 있다. 여기서 ‘대흥’과 ‘보력’은 당시의 연호이고, ‘효감’은 효행과 관련된 유교적 용어이며, ‘금륜’과 ‘성법’은 불교적 용어이다. 그런데 금륜과 성법은 불교의 轉輪聖王이념에서 유래된 것이고, 직접적으로는 당나라 則天武后의 존호를 모방한 것이다. 따라서 그가 측천무후를 본받아 불교를 진흥시키면서 무력이 아닌 佛法으로 세상을 통치하고자 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357)전륜성왕의 이념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이 참고된다.
판카즈,<新羅 ‘中古’期의 轉輪聖王 理念-印度 Asoka王과 新羅 眞興王의 政治理念의 비교->(서울大 國史學科 碩士學位論文, 1994).

 다음으로 貞孝公主무덤에서도 불교적 요소를 엿볼 수 있다. 지하에 무덤을 만들고 그 위에 벽돌로 탑을 쌓았는데, 이것은 무덤 위에 건물을 짓던 전통이 불교와 습합되면서 탑 양식으로 변모된 것이다. 그리고 무덤 바로 앞에서 건물자리가 발견되고, 산 아래에서 절터가 발견된 것도 주목된다. 그 위치로 보아 절터는 공주의 무덤을 지키던 陵寺로 짐작되며, 건물터는 승려들이 기거하면서 무덤을 지키던 곳으로 추정된다.

 또한 문왕 때에는 귀족층에까지 불교가 널리 유포되어 있었다. 이 사실은 762년에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이듬해 귀국한 王新福 일행이 東大寺에서 禮佛하였음을 보여주는 일본 正倉院 소장의 古文書를 통하여 알 수 있다.358)東京帝國大學,≪大日本古文書≫16(東京帝國大學 文學部 史料編纂掛, 1927), 324∼325쪽.
石井正敏,<渤海の日唐間における中繼的役割について>(≪東方學≫51, 1976), 주 24).

 문왕 때의 불교 진흥정책에 힘입어 9세기에 들어오면 불교도 융성기를 맞이한다. 현재로서는 이 당시의 모습을 전하는 기록이 없지만 승려들의 활동이나 유적과 유물을 통하여 그 편린을 엿볼 수 있다.

 발해의 승려로는 釋仁貞·釋貞素·薩多羅·載雄이 알려져 있다. 이들은 모두 9세기 이후에 활동한 인물들로, 발해의 승려들이 왕성하게 활동한 것이 이 무렵임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이들의 사상을 이해할 만한 자료는 전혀 없고, 다만 발해의 대외관계와 관련하여 활동한 행적이 보일 따름이다.

 석인정(?∼815)은 僖王 때에 활동하였고, 석정소(774∼828)는 희왕부터 宣王 때까지 활동한 인물로서, 모두 일본과의 교류에 큰 역할을 하였다. 특히 석정소는 당나라에서 일본 유학승 靈仙(?∼828)과 교유하였고, 그와 일본조정 사이를 두 번이나 왕복하면서 심부름을 하다가 결국은 중국에서 귀국하는 길에 풍랑을 만나 사망하였다. 그가 영선이 독살된 것을 알고 애도하여 지은 시가 한 편 전해지고 있다.359)圓仁,≪入唐求法巡禮行記≫권 3, 開成 5년 7월 3일. 그리고 살다라는 大虔晃 초기에 당나라 장안에 가서 머물렀는데, 새와 짐승의 말에 능통하였다고 전해지는 설화적 인물이다.360)金毓黻,≪渤海國志長編≫권 11, 士庶列傳. 한편 재웅은 발해가 멸망한 뒤인 927년 3월에 60여 명과 함께 고려로 망명한 인물이다. 이 밖에 대원화상이 선왕 9년(826)에 함경북도 明川郡 七寶山에 있는 開心寺를 창건한 기록이 발견되었다고 하는데,361)리준걸,<함경남북도 일대의 발해 유적 유물에 대한 조사 보고>(≪조선고고연구≫1986­1), 34쪽. 더 이상 자세한 내용을 알 수가 없다.

 발해 불교의 융성은 왕실뿐만 아니라 지배층 전반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고, 일본과의 문화적 교류에도 한 몫을 하였다. 희왕 때인 814년 가을에 일본에 사신으로 갔던 王孝廉(?∼815)은 일본의 弘法大師 空海(774∼835)와 詩文을 주고 받으면서 교유하였고, 접대를 맡았던 領客使 安倍吉人은 발해 사신이 예불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이에 감격해서 시를 짓기도 하였다.362)≪經國集≫권 10, 聞渤海客禮佛感而賦之. 한편 발해 사신이 일본에 불경을 전해준 사실도 있다. 일본 石山寺에 소장되어 있는≪佛頂尊勝陀羅尼經≫의 跋文에 의하면 이 경전은 861년 일본에 사신으로 갔던 李居正이 전해준 것이라고 한다.363)田島公,<海外との交涉>(≪古文書の語る日本史≫2-平安, 筑摩書房, 1991), 256∼258쪽.

 불교의 융성에 따라 많은 사원과 불상이 조성되었을 것이다. 현재까지 확인된 발해 절터는 모두 40여 곳이다. 구국지역에서 1곳, 상경 일대에서 10여 곳, 중경 일대에서 13곳, 동경 일대에서 9곳이 확인되었고, 大城子 성안에서도 절터로 보이는 곳이 조사되었다. 또 러시아 연해주에서 5곳, 함경도 일대에서도 2곳의 절터가 확인되었다.

 탑으로는 정효공주 무덤탑·馬滴達塔·靈光塔이 알려져 있다. 이들은 다 벽돌로 쌓은 것으로 당의 양식을 취하고 있으며, 영광탑만이 거의 온전히 남아 있다. 그런데 이들은 舍利塔이 아니라 무덤탑의 성격을 띠고 있음이 특징이다. 탑 아래에 무덤칸을 만들고 그 곳에 시신을 안치하였다. 따라서 이 탑은 승려가 아니라 왕실 내지 귀족을 위해 축조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무덤탑은 발해 불교의 한 특색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영광탑의 1층 4면 각각의 王·立·國·土라는 벽돌 문양은 王立國土나 國立王土라고 읽을 수 있으므로, 발해 불교가 왕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고 추측하게 한다.364)邵春華,<長白靈光塔>(≪博物館硏究≫1983­1).
吉林省文物志編委會,≪長白朝鮮族自治縣文物志≫(1988), 72쪽.

 그러나 몇 개의 유적에서 사리탑이 있었던 증거도 발견되었다. 八連城 제1절터에서 사리 장치의 일부로 보이는 心礎石이 발견된 바 있다.365)齋藤甚兵衛,≪半拉城-渤海の遺蹟調査-≫(琿春縣公署, 1942), 21쪽. 大城子古城에서는 1972년 金銅製 사리함이 발견되었는데, 그 안의 작은 銀盒에 6顆의 사리가 들어 있었다.366)張太湘,<大城子古城調査記>(≪文物資料叢刊≫4, 1981), 225쪽. 또 상경성 土台子에서도 1975년에 7겹으로 싸여 있는 사리함이 발견되었는데,367)丹化沙,<黑龍江省寧安縣出土的舍利函>(≪文物資料叢刊≫2, 1978). 가운데에 있는 漆匣은 가는 銀絲로 꽃무늬가 상감되어 있고 은합에는 구름무늬와 四天王像이 새겨져 있어서 불교 예술의 수준을 가늠하게 해준다. 마지막 함에는 유리병 속에 사리 5과가 들어 있었다. 이 사리함은 발해 中·晩期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 밖에 黑龍江省 渤海 상경 유적에는 용암으로 만든 높이 6m의 거대한 石燈이 지금도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유물로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불상이다. 이들은 지금까지 1천 개 가까이 발견되었는데, 재료에 따라 石佛·鐵佛·金銅佛·塼佛(泥佛, 陶佛)·塑造佛·漆佛 등으로 나뉜다. 그리고 814년에 발해 사신 高禮進 일행이 당나라에 금불상과 은불상을 각기 하나씩 바친 기록도 보인다.368)≪冊府元龜≫권 972, 外臣部, 朝貢 5, 元和 9년 정월.

 불상 가운데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전불이다. 전불은 틀빼기를 하여 구워 만든 것으로서 상경과 동경에서 대량으로 출토되었고, 연해주의 아브리코스(Abrikos)절터에서도 발견되었다. 불상 아래에는 못이 박혀 있던 원형 구멍이 있어서 벽에 꽂았던 것으로 보인다. 연해주에서 출토되는 금동불상들에는 아래에 구멍 대신에 막대가 달려 있어 역시 같은 용도로 사용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형태의 전불이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발견된 예가 있지만, 발해 것이 둥글고 입체적인 데 비해서 중국이나 일본 것들은 모두 납작한 판 모양으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은 발해 전불은 고구려 元五里절터에서 출토된 것과 비슷한 것이어서 발해의 전불이 고구려 전통을 계승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369)原田淑人,<渤海の佛像>(≪文化≫2­11, 1935 ;≪東亞古文化硏究≫, 1940, 370쪽).

 석불로서는 興隆寺에 안치된 것이 가장 규모가 크고 대표적이지만, 청나라 때에 개조되면서 원래의 모습을 상실하고 말았다.370)丹化沙,<關于興隆寺與渤海大石佛>(≪北方論叢≫1980­6). 현재의 높이는 대좌를 포함하여 3.3m에 이른다. 팔련성의 절터에서도 여러 구의 석불이 발견되었다. 또 일본의 大原美術館에는 碑像形 五尊像이 소장되어 있다. 여기에는 咸和 4년(834)에 趙文休의 어머니 李씨가 아미타불과 관음보살, 大勢至菩薩 등을 조성하였다는 연기가 적혀 있다.371)宋基豪·全虎兌,<咸和四年銘 발해 碑像 검토>(≪西巖趙恒來敎授華甲紀念 韓國史學論叢≫, 亞細亞文化社, 1992).

 불상의 양식면에서 볼 때 상경지역은 觀音像이 주류를 이루고, 서경과 동경지역은 석가모니불과 다보불을 병좌시킨 이불병좌상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전자는 관음신앙과 연관된 것이고, 후자는 法華信仰과 결부된 것이다. 이러한 신앙형태의 지역적 차이는 과거에 고구려 영역이었던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이라는 역사적 배경에서 연유한 것으로 보인다.

 일부 불상에서는 세부적인 면에서 발해 고유의 양식이 눈에 뜨인다. 중요한 것으로서 塼佛思惟觀音菩薩立像과 이불병좌상이 있다. 관음보살입상 중에는 사유상이 포함되어 있는데, 사유상의 경우 생각에 잠긴 모습을 나타내기 위해서 앉아 있는 반가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일반적인 데에 비해서 발해에서는 서있는 모습으로 표현되어 특색을 이루고 있다.372)車玉信,<渤海 佛像에 관한 연구>(梨花女大 美術史學科 碩士學位論文, 1990), 55∼56쪽. 또한 이불병좌상은 왼쪽 부처의 오른손을 오른쪽 부처의 왼손 위에 올려놓고 있으며, 두 불상이 서로 팔을 맞대어 나란히 결가부좌하고 있다. 또한 두 개의 頭光이 서로 겹쳐져 하나의 커다란 擧身光의 광배 속에 함께 들어가 있으며, 양쪽에 협시불이 있는 경우가 있는 것 등도 독특한 것이다.373)駒井和愛,<渤海國の二佛並座石像>(≪學海≫3­4, 1946 ;≪中國都城·渤海硏究≫, 雄山閣, 1977), 173쪽.
車玉信, 위의 글, 69쪽.
이 밖에 거의 모든 불상들이 通肩衣를 하고 있는 것도 하나의 특징이다.

 발해의 불상들은 대부분이 北魏에서 隋나라에 이르는 시기의 양식을 따르고 있고, 이 중에서도 북위 양식이 주를 이루고 있다.374)車玉信, 위의 글, 78쪽. 발해와 같은 시대의 당나라 양식이 거의 눈에 뜨이지 않는 것은 동일한 시기에 통일신라가 당나라 양식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발해의 불상 양식이 같은 시대에 주변국가로부터 받아들인 것이 아니고, 전 시대로부터 이어받은 것임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말갈이나 고구려로부터 계승된 것이 되는 셈인데,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고구려에 그 연원을 두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오랜 기간 왜 고집스럽게 古式을 고수하였는지는 수수께끼라 하지 않을 수 없다.

 926년에 발해가 멸망하자 많은 유민들이 고려로 망명해 왔다. 이러한 유민 가운데에는 載雄과 같은 승려도 포함되어 있는데, 망명 이후의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전혀 남아 있지 않다. 한편 발해 불교는 요동지방에서 명맥이 유지되었다. 928년에 거란이 발해유민들을 요동지방으로 강제 이주시키면서 상경성을 불태웠을 때에 그 곳에 있던 절들은 모두 불에 타버렸다. 이에 따라 遼陽을 중심으로 한 요동지방에 옮겨진 유민들 사이에 불교의 맥이 이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거란이 통치하던 시기의 불교 양상은 전해지는 것이 없고, 2백여 년이 지난 금나라 시기의 것만이 전해지고 있다.375)금나라 때의 불교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이 참고된다.
外山軍治,<金代遼陽の渤海人と佛敎>(≪塚本博士頌壽記念佛敎史學論集≫, 1961).

 우선 금나라에서 활동한 趙崇德에 관한 기록이 있다.376)洪皓,≪松漠紀聞≫권 上, 渤海國. 그는 금나라에서 벼슬을 하였던 발해유민으로서, 벼슬을 그만 둔 뒤 스스로 승려가 되어 큰 절을 짓고 燕京 竹林寺에 있던 慧日을 청하여 住持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그 시기는 대체로 12세기 전반에 해당된다.

 그리고 금나라 蒲路虎(宗雋, ?∼1139)에게 죽임을 당한 발해 승려에 관한 기록이 있다.377)洪皓,≪松漠紀聞≫권 上, 蒲路虎. 그는 원래 술이 과하여 東京留守로 임지에 부임하기 전에 황제로부터 금주령이 내려진 바 있다. 그런데 도중에서 술을 권하는 발해 승려를 만나자 그를 죽였고, 다시 길에서 승려 5명이 輦을 타고 가는 것을 보고 이들마저 죽였다고 한다. 뒤의 승려들도 발해인들일 가능성이 크다.

 한편 張浩(?∼1162)는 요양 출신의 발해인으로 원래의 성은 고구려계의 高씨였다고 한다.378)≪金史≫권 83, 列傳 21, 張浩.
外山軍治,<金代遼陽の張氏と熊岳の王氏について>(≪橋本博士古希記念東洋學論叢≫, 1960).
그는 금나라 태조로부터 세종까지 5대에 걸쳐 벼슬을 하였고, 특히 海陵王 이후로는 재상의 지위에 올라 요양지방의 발해유민으로서는 가장 현달하였던 인물로 부귀영화를 누렸다. 그런데 그의 집안도 불교와 관계가 깊었다. 자신이 磁州의 승려 法寶를 만날 때마다 大臣의 지위에도 불구하고 아랫자리에 앉았다고 하여 1155년 3월에 해릉왕으로부터 杖 20대의 형벌을 받기도 하였다. 또한 그의 형과 여동생도 승려가 되었다고 한다.379)羅福頤,<光祿大夫張行願墓誌>(≪滿洲金石志≫권 3 ;≪石刻史料新編≫1집 23책, 臺北 ; 新文豊出版公司, 1982).

 한편 금나라 초기에는 황실의 后妃에 요양 출신의 발해인들이 적지 않았다. 이들 중에는 睿宗妃로 世宗의 생모였던 貞懿皇后 李씨(?∼1161)와 顯宗妃인 昭聖皇后 劉씨(1139∼1163)처럼 불교에 심취하였던 인물도 있었다. 이씨는 예종이 사망하자 여진의 풍습을 따르지 않고 比丘尼가 되어 고향인 요양에 돌아와 淸安禪寺를 세우고 따로 尼院인 垂慶寺를 세워 그 곳에 머물렀다. 그리고 유씨는 어려서 불교 서적을 아주 좋아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금나라 황실에서 불교를 받아들일 때에 이들의 역할이 컸다는 점이다. 금나라 황실에 불교가 받아들여진 것은 熙宗 때인데, 그는 직접 燕京에 가서 불교가 성행하던 모습을 보고 명승 海慧 등을 알게 되어 불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금나라 황실 안에 있었던 이들 후비들의 역할도 무시할 수 없다고 한다.380)外山軍治, 앞의 글(1961), 499∼500쪽. 따라서 금나라의 불교사에서 발해유민들이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발해 불교의 전개 과정을 살펴보았다. 이제 발해 불교에 나타난 몇 가지 특징에 대해서 정리해 볼 차례이다.

 첫째, 발해 불교의 원류와 성격에 관한 문제이다. 우선 발해 불교의 뿌리는 말갈이나 당나라에 있지 않고 고구려에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현재까지 발견된 불상들이 모두 북위에서 수나라에 이르는 고식을 취하고 있다는 데에서 증명이 된다. 그러므로 발해 불교는 같은 시대에 주변국으로부터 유입된 것이 아니라 고구려로부터 계승된 것이 그 모태를 이루었고, 그것이 끝까지 고수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가장 흔하게 발견되는 塼佛들이 고구려식이고, 사원 건축에 이용된 와당이 고구려식 蓮花文이라는 사실도 이를 증명해 준다.

 물론 고구려 영역이었다가 커다란 변동을 겪지 않고 발해 영역으로 편입되었던 남경과 동경지역에서는 고구려 불교가 발해로 거의 그대로 이어졌으리라는 것은 자명하다. 동경을 중심으로 퍼져 있었던 법화신앙이라든가, 新浦市 梧梅里 절골유적에서 발견된 금동판은 바로 그러한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

 그러나 발해 불교에는 고구려적 요소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당나라로부터 새로 유입된 요소, 그리고 자신의 독창적인 요소가 점차 가미되기 시작하였다. 예컨대 탑은 분명히 당나라 벽돌탑 양식을 채용하고 있으나, 탑의 운용면에서 승려의 사리탑이 아닌 권력자의 무덤탑으로 이용되기도 한 점은 두드러진 예이다. 그리고 불상 양식면에서 사유상이 서있는 모습으로 표현된 것이 있고, 이불병좌상의 세부 양식면에서 중국 것과 다른 점들이 나타나고 있다. 또한 불상들이 통일신라의 경우와 달리 당나라 양식이 아닌 그 이전의 고식을 고수하였다는 점도 발해 불교의 특징이라 하겠다.

 둘째, 신앙의 형태에 관한 문제이다. 비록 어떤 종파가 발해에 전해져 성행하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신앙면에서 볼 때 관음신앙, 법화신앙, 아미타불신앙 그리고 密敎的 요소들이 발견된다. 그리고 이 중에서도 관음신앙과 법화신앙이 발해에서 성행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면서도 지역적으로 구분되어 나타나는 점도 주목된다. 상경지역에는 관음신앙이 중심을 이루었고, 동경지역에는 법화신앙이 중심을 이루었다. 이것은 시기적인 차이의 결과라기보다는 불교 전통의 지역적 차이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셋째, 지배층 특히 왕권과의 관련성 문제이다. 발해 불교 역시 지배층 중심으로 융성하였으며, 특히 왕실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불교 유적이 도성이었던 상경·중경·동경지역에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통하여 유추할 수 있다. 그리고 왕실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는 점은 문왕 때의 전륜성왕 표방이나, 정효공주의 무덤탑 양식과 이 무덤에 능사를 조성한 사실 등에서 알 수 있으며, 그 밖에 영광탑에 도안된 문구도 그러한 사실을 보여준다

 한편 발해에는 불교 이외에도 景敎(네스토리우스교)와 샤머니즘의 흔적도 보인다. 팔련성 제2절터에서 발견된 三尊佛에는 십자가같은 것을 매단 목걸이가 보이고,381)齋藤甚兵衛, 앞의 책, 도판 7­1. 러시아 연해주의 아브리코스절터에서도 경교 십자가가 새겨진 점토판이 발견되었다.382)E.V. Shavkunov 著·宋基豪 譯,<沿海州의 발해 문화 유적>(≪白山學報≫30·31, 1985), 457쪽. 이들은 발해에 경교가 전래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주지만, 아직은 확증하기 어렵다.

 상경성이나 우수리이스크에서 발견된 소형의 騎馬人物像들은 샤머니즘의 신을 표현한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383)E.V. Shavkunov·L.E. Semenichenko 著·宋基豪 譯,<소련 연해주의 발해 문화 연구>(≪韓國史論≫23, 서울大, 1990), 566∼567쪽. 아마 일반인들의 신앙은 이러한 샤머니즘이 중심을 이루었을 것이다.

<宋基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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