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10권 발해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2. 유학과 한문학
  • 1) 유학

1) 유학

 유학이 발해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기 시작한 것은 文王 때부터일 것이다. 714년에 학생을 파견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건국 초기부터 유학의 영향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유학 교육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이에 따라 유학이 발해사회에 뿌리를 깊이 내리게 된 것은 대체로 문왕의 文治에 힘입은 것으로 여겨진다.

 문왕이 당나라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내부 정비를 추진함에 따라 각종 정치제도·都城구조·무덤양식 등에서 중국적 모습이 드러나게 되었다.392)宋基豪,<발해 文王代의 개혁과 사회변동>(≪韓國古代史硏究≫6, 한국고대사연구회, 1993), 66∼69쪽. 이와 궤를 같이 하면서 문왕은 사상면에서 유학과 불교를 진흥시키는 데에 주력하였는데, 여기서는 유학에 한정하여 살펴보도록 하겠다.

 문왕은 즉위한 다음해인 738년 6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唐禮≫·≪三國志≫·≪晋書≫·≪三十六國春秋≫를 구하고자 하여 玄宗의 허락을 받았다.393)≪唐會要≫권 36, 蕃夷請經史.
≪冊府元龜≫권 999, 外臣部 請求.
≪玉海≫권 153, 朝貢 外夷來朝 唐渤海遣子入侍 참조.
여기서≪당례≫는 유교에 입각한 국가규범인 五禮를 담고 있던≪大唐開元禮≫를 가리키는데, 이것은 종전에 사용하던 貞觀禮와 顯慶禮를 정비하여 蕭嵩 등이 당의 玄宗 開元 20년(732)에 완성한 것이다.394)≪舊唐書≫권 21, 志 1, 禮儀 1. 반포된 지 6년 만에 문왕이 이를 수입하고자 하였던 것으로 보아 유교적 도덕규범과 사회규범을 토대로 발해사회를 이끌어 나아가고자 하였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이러한 서적들은 궁중 도서를 관장하던 文籍院에 소장되었을 것이고, 冑子監에서는 이를 교재로 삼아 교육을 하였을 것이다. 주자감은 당나라의 국자감에 상응하는 교육기관으로서, 이곳에는 책임자로 監長을 두었다.395)監長을 하나의 직책으로 이해하여 당나라 祭酒에 상당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고(鳥山喜一 著·船木勝馬 編,≪渤海史上の諸問題≫, 風間書房, 1968, 77쪽), 監과 長의 두 개 직책으로 이해하여 각기 祭酒와 司業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金毓黻,≪渤海國志長編≫권 15, 職官考, 華文書局, 1934). 冑子란 말은≪書經≫舜典에서 따온 것으로 ‘卿大夫 이상의 맏아들’을 의미한다고 한다. 따라서 명칭만으로도 주자감이 왕족과 귀족의 자제들을 교육시키던 곳임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발해의 여러 제도를 살펴보면 유학과 관련된 명칭들이 다수 보인다. 궁중에서 후궁의 업무를 담당하던 巷伯局의 항백은≪詩經≫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문왕의 尊號인 “大興寶曆孝感金輪聖法大王”에도 불교 용어와 함께 孝感이란 유교적 단어가 들어 있다.

 무엇보다도 忠·仁·義·智·禮·信이라는 유교덕목을 6부의 명칭으로 삼은 것은 독창적인 것으로서 발해사회에 유학이 얼마나 깊숙히 침투해 있었는가를 실증해 주고 있다. 8세기 중반에 일본의 仲麻呂정권이 官號와 官制 등을 개혁하면서 이 6부의 명칭을 모방한 것도 눈여겨 볼 만하다.396)鈴木靖民,≪古代對外關係史の硏究≫(吉川弘文館, 1985), 38쪽.

 발해 지배층에 유학이 깊이 자리잡고 있었던 사실은 貞惠公主와 貞孝公主의 두 墓誌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397)鄒秀玉,<貞孝公主墓志反映出的儒家思想>(≪博物館硏究≫1983­3). 이 묘지는 중국의 유교 경전과 역사서들을 두루 섭렵하여 변려체 문장을 구사하고 있어서 당시 발해 지식인의 소양을 엿보게 한다.398)王承禮,<唐代渤海“貞惠公主墓志”和“貞孝公主墓志”的比較硏究>(≪社會科學戰線≫ 1982­1), 185∼186쪽. 인용된 경전만 하더라도≪尙書≫·≪春秋≫·≪左傳≫·≪詩經≫·≪易經≫·≪禮記≫·≪孟子≫·≪論語≫등이 있다. 유교적인 수사를 사용하여 국왕과 공주의 덕을 기리고 있는 몇 구절을 정효공주묘지에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399)韓國古代社會硏究所 編,≪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Ⅲ(駕洛國史蹟開發硏究院, 1992), 451∼465쪽 참조.

① 무릇 오래 전에 읽었던≪尙書≫를 돌이켜 보건대, 堯임금은 두 딸을 嬀水의 물굽이에 내려보내 舜임금에게 시집보냈고,≪左傳≫을 널리 상세히 보건대 周 天子가 딸을 齊나라에 시집보낼 때에 魯 莊公이 魯館을 지어 그 혼례를 주관하였다. 그러니 부녀자로서 갖추어진 덕이 밝고 밝으면 명예로운 이름이 어찌 후세에 전해지지 않을 것이며, 어머니로서 갖추어진 규범이 아름답고 아름다우면 先人들이 쌓은 은혜가 어찌 무궁하게 전해지지 않으리오.

② 생각건대 高王·武王의 조상들과 아버지 文王은 王道를 일으키고 武功에서 커다란 업적을 남겼다고 능히 말할 수 있으니, 만일 이들이 때를 맞추어 政事를 처리하면 그 밝기가 日月이 내려비치는 것과 같고, 기강을 세워 정권을 장악하면 그 어진 것이 천지가 만물을 포용하는 것과 같았다. 이들이야말로 우·순임금과 짝할 만하고 夏·禹임금과 닮았으며, 商 湯王과 같은 지혜를 배양하고 周 文王과 같은 韜略을 갖추었다.

③ (공주는) 일찍이 女師에게서 가르침을 받아 능히 그와 같아지려 하였고, 매번 漢 班昭를 사모하여 詩書를 좋아하고 禮樂을 즐겼다.…六行을 크게 갖추고 三從을 지켰다. 衛 共伯의 처 共姜의 맹세를 배웠고, 齊 杞梁의 처와 같은 애처러움을 품었다. 父王에게서 은혜받아 스스로 婦德을 품고 살았다(<貞孝公主墓誌幷序>).

 그렇지만 정효공주를 칭송하기 위해서 漢代의 고사를 잘못 인용한 예가 보이고 있고, 첫머리에 “貞孝公主墓誌銘” 또는 “貞孝公主墓銘幷序”라고 해야 할 것을 “貞孝公主墓誌幷序”라고 잘못 표기하고 있어서 미숙하였던 일면을 보여주기도 한다.400)鄒秀玉,<渤海貞孝公主墓志幷序考釋>(≪延邊文物資料匯編≫, 1983), 68쪽·81쪽.

 문왕 이후로 발해사회는 유학이 널리 보급되었고, 지속적인 선진 문화의 유입에 따라 마침내 9세기에는 해동성국으로까지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구체적인 정황을 보여주는 사료는 없다. 다만 다음의 두 가지 사례를 통하여 유학이 발해인에게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가를 가늠해 볼 수 있을 따름이다.

 우선 발해인의 姓名이다. 왕의 이름인 大元義·大言義·大明忠·大仁秀, 공주 이름인 貞惠와 貞孝, 귀족 이름인 大義信·大誠慶·大誠愼·大昭順·大禹謨·謁德·高仁·辛文德·高文信·烏孝愼·李居正·楊成規 등에는 추상적이고 유교적 덕목들인 충·인·의·신·효 등이 포함되어 있다.

 다음은 외국에 오고간 國書이다. 국서는 비록 의례적이고 추상적이며 상투적인 말들로 가득 차있기는 하지만, 각각의 왕에 대한 평가는 어느 정도 실상을 보여주는 면이 있다. 특히 宣王이나 大彛震에 대한 평가는 주목할 만한 것이다. 선왕은 일본으로부터 “信義로 본성을 이루고, 禮儀로 立身하였다”401)≪日本逸史≫권 28, 嵯峨天皇 弘仁 11년 정월 갑오. “세속에는 禮樂을 전하고, 가문에는 衣冠을 이었다”402)≪日本逸史≫권 30, 嵯峨天皇 弘仁 13년 정월 계축. “믿음은 金石과 같이 확고하고 절개는 소나무·대나무처럼 곧다”403)≪日本逸史≫권 34, 淳和天皇 天長 3년 5월 신사.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대이진은 중국으로부터 “대대로 忠貞을 이어받았고, 사람 됨됨이는 仁厚에 바탕을 두었다”404)≪文苑英華≫권 471, 與渤海王大彛震書.는 평가를 받았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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