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10권 발해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3. 예술
  • 1) 건축
  • (2) 사원과 탑

(2) 사원과 탑

 발해에는 불교 신앙이 광범위하게 유포되어 있었으므로, 사원도 많이 조성되었다. 발해시대의 절터는 대체로 40여 곳이 확인되었다.433)宋基豪,<渤海佛敎의 展開過程과 몇 가지 特徵>(≪伽山李智冠스님華甲紀念論叢 韓國佛敎文化思想史≫上, 1992), 713∼714쪽.
박룡연,<고고학방면으로부터 본 발해의 불교문화>(≪발해사연구≫4, 연변대학출판사, 1993), 239∼242쪽.
에.붸. 샤브꾸노프, 앞의 글(1994), 48쪽.
첫 도읍지가 있던 敦化지역에서 廟屯절터 1개, 上京의 성 안팎에서 10여 개, 中京지역에서 高産절터·龍海절터·仲坪절터 등 13개, 東京지역에서 馬滴達절터·新生절터 등 9개, 南京지역에서 梧梅里절터·開心寺절터의 2개, 연해주지역에서 아브리코스(Abrikos)절터·코프이토(Kopyto)절터 등 5개가 조사·발굴되었다. 이 밖에도 西古城과 大城子古城 등에도 사원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가운데에서 대표적인 절터를 몇 개 들어보겠다. 상경성에서 발견된 절터는 성밖에서 발견된 2개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성 안에 자리잡고 있는데, 도성의 중앙대로를 중심으로 좌우대칭에 가깝게 배치되어 있다. 1933년과 이듬해 이 곳에서 6개의 절터를 발견하고 4개를 발굴하였다.434)東亞考古學會,≪東京城-渤海國上京龍泉府址の發掘調査-≫(東方考古學叢刊 甲種 第五冊, 1939), 31∼38쪽. 그리고 1963년과 이듬해에 중국과 북한학자들이 공동으로 도합 9개의 절터를 조사하였고,435)조중공동고고학발굴대,≪중국 동북지방의 유적 발굴 보고(1963∼1965)≫(사회과학원출판사, 1966), 179∼181쪽과 194∼198쪽.
≪東京城≫보고서의 절터 편호와 이 책의 편호가 서로 달라 혼동하기 쉬운데, 각각의 대응표는 다음과 같다. 이 글에서는 뒤의 것을 따랐다.
  ≪東京城≫  ≪유적 발굴 보고≫
   1호 절터     2호 절터
   2호 절터     6호 절터
   3호 절터     3호 절터
   4호 절터     5호 절터
그 뒤에 몇 군데의 절터를 추가로 확인하였다.

 상경성 1호 절터를 보면 본전과 좌우의 곁채가 회랑으로 연결된 구조를 하고 있다. 이렇게 본전 좌우에 곁채를 두고 있는 것은 기후가 추운 곳에서 승려들의 動線을 최대한 짧게 하고, 외부 동선을 내부로 끌어들이기 위한 공간 구성으로 여겨진다.436)이병건,<발해시대 사찰건축 연구>(建國大 建築工學科 碩士學位論文, 1991), 22쪽. 본채는 우리 나라의 일반 사찰과 마찬가지로 안칸과 바깥칸으로 구분되면서 안칸에 凹자형의 불단이 만들어져 있는데 불단에는 9개의 불상을 안치하였던 받침돌이 있다. 본채의 주변에서 綠釉를 칠한 치미와 8개의 귀면와가 발견되어 본전의 건물 양식이 팔작집이었음을 반영하고 있다.

 현지에서 南大廟로 불리는 상경성 2호 절터에는 청나라 때에 지은 興隆寺가 들어서 있어서 구체적인 구조를 알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 곳에는 발해 석등이 남아 있고, 석등 뒤의 三聖殿 안에는 발해시대의 석불이 전해지고 있어서 중요하다.

 상경성 9호 절터는 외성의 북쪽 벽 밖에서 발견되었다. 이 곳에서는 본전만 발굴되었는데 역시 안칸과 바깥칸으로 구분되면서 凹자형 불단이 만들어져 있다. 불단 위에는 5개의 불상 받침돌이 있다. 이 절터에서도 귀면와 8개와 치미 등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1호 절터의 본전과 마찬가지로 팔작집 구조를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중경이 있던 서고성 부근의 東南山에도 발해시기의 것으로 보이는 절터가 있는데 이 절터도 안칸과 바깥칸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和龍縣 德化鄕 高産村에서도 단일 건물로 된 8각형 정자 모양의 절터가 발견되었다.437)何明,<吉林和龍高産渤海寺廟址>(≪北方文物≫1985­4).

 함경남도 신포시 오매리 절골유적에서 발견된 건축지는 고구려 문화층과 발해 문화층으로 나뉘어져 있다.438)장상렬, 앞의 글(1992), 256∼257쪽. 그리고 발해시대의 건물들은 두 차례에 걸쳐 축조된 것이다. 절골 절터유적으로 불리고 있는 1차 건물들은 동서 중심축을 따라 배치되어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그렇지만 2차 건물들로는 몇 개의 온돌장치만이 알려졌을 뿐이다. 절터유적에 속하는 것으로는 북쪽 1호 건물지와 금산 건물지가 대표적이다. 앞의 것은 동쪽의 본채와 서쪽의 부속건물로 이루어졌는데 온돌장치가 시설되어 있었다. 뒤의 것은 이 유적에서 조금 떨어진 금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는데, 온돌장치와 함께 무기류가 발견되어 초소 역할을 하였던 곳으로 추정되고 있다.

 연해주에서 발굴된 코프이토절터와 아브리코스절터는 크로우노브카(Krou-

 novka)강을 사이에 두고 좌우에 솟아 있는 얕은 야산에 각각 위치하고 있다.439)연해주의 절터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 정리되어 있다.
에.붸. 샤브꾸노프 엮음·송기호·정석배 옮김, 앞의 책, 123∼138쪽.
강의 오른쪽에 있는 코프이토절터는 산 정상 부근에 있는데, 건물은 거의 직사각형 평면을 띠고 있다. 절 밖에는 건물에 바짝 붙여서 판석으로 쌓은 낮은 벽이 돌려져 있다. 완만한 경사를 이루는 북쪽과 동쪽에는 낮은 돌담으로 둘러싸인 정원이 조성되어 있고, 북서쪽 모퉁이에 입구가 있었다.

 강의 왼쪽에 있는 아브리코스절터는 산의 북쪽 경사면에 형성된 낮은 대지 위에 있다. 두 절의 거리는 500m∼700m 정도 떨어져 있다. 건물터는 한 변이 7m인 정사각형으로 정면은 북서쪽을 바라보고 있다. 주춧돌은 5개씩 5열로 모두 25개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절 주위에는 돌담이 돌려져 있었다.

 크라스키노성터 안에서 발견된 절터는 건물터의 크기가 12m×11m로서 정면은 남쪽을 향하고 있다. 이 곳에는 주춧돌이 6개씩 5열로 배치되어 모두 30개가 놓여 있었다. 1994년에는 이 절터에서 탑자리가 조사되기도 하였다.

 이상의 분포 상황에서 알 수 있듯이 발해 절터는 통치의 중심지였던 5경에 집중되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원 중에는 왕실이나 귀족의 무덤에 딸린 절도 있는데, 龍海절터는 貞孝公主무덤 아래에 위치하고 있고, 馬滴達절터도 마적달塔墓 부근에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절터에 대한 정밀조사가 진행되지 않아서 이들 절터의 절대연대를 확정하기가 어렵다. 다만 최근에 조사된 함경북도 명천군 開心寺절터에서는 宣王 9년(826)에 세워졌다는 명문이 발견되었다고 한다.440)리준걸,<함경남북도 일대의 발해 유적 유물에 대한 조사 보고>(≪조선고고연구≫1986­1), 34쪽. 그리고 아브리코스사원은 이미 폐기된 코프이토사원의 기와를 가져다가 다시 사용하여 건축한 것이 확인됨으로써 두 절의 선후 관계가 밝혀졌다.441)E.V. Shavkunov 著·宋基豪 譯,<沿海州의 발해 문화 유적>(≪白山學報≫30·31, 1985), 462쪽.

 한편 탑자리도 여러 군데에서 발견되었다. 잘 알려진 것으로는 정효공주 무덤탑, 馬滴達塔, 靈光塔의 3개가 있다. 이 밖에 八連城 제1절터, 上京城 안의 土臺子, 東寧縣 大城子고성, 신포시 오매리 절골, 크라스키노절터 등에서도 탑자리가 발견되었다.

 탑 가운데에는 영광탑만이 제대로 남아 있다. 이 탑은 길림성 長白朝鮮族自治縣 縣城 서북쪽의 塔山 정상에 있다. 5층의 벽돌탑으로서 제일 아래층의 높이가 약 2.8m, 둘레가 12.4m이고 전체 높이는 13m 정도이다. 탑의 내부는 상하로 통하도록 되어 있다. 마적달탑은 7층의 벽돌탑이었지만 1921년에 무너졌다고 한다. 정효공주무덤탑도 역시 벽돌탑이었다. 그런데 이 탑들은 승려의 舍利를 안치하는 탑이 아니라 일반인의 시신을 매장한 墓塔의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탑 아래에 玄室을 만들고, 그 곳에 시신을 안치한 것이다. 그리고 정효공주무덤의 예로 보아 이 탑의 주인공들은 불교와 밀접한 왕실 내지 귀족들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사리탑도 발견되었다. 팔련성 제1절터에서 사리장치의 일부로 보이는 心礎石이 발견된 적이 있다. 대성자고성에서는 1972년에 금동제 사리함이 발견되었는데, 그 안의 작은 銀盒에 6顆의 사리가 들어 있었다. 상경성 토대자에서도 1975년에 은합에서 시작하여 石函까지 모두 7겹으로 싸여 있는 사리함이 발견되었다. 이 중에서 漆匣은 가는 銀絲로 꽃무늬가 상감되어 있고, 은합에는 구름무늬와 四天王像이 새겨져 있었으며, 마지막 함에는 유리병 속에 사리 5과가 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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