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10권 발해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3. 예술
  • 2) 미술
  • (2) 공예

(2) 공예

 발해의 공예품으로는 조각, 도자기, 기와·벽돌, 금속 세공품 등이 있다.462)발해 공예 전반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이 참조된다.
주영헌,<발해의 공예>(≪고고민속≫1967­1).
조대일,<발해의 공예>(≪발해사연구론문집≫1,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1992).
조각품으로서 불상·석등·石獅子像 등이 대표적인데, 불상은 불교 항목에서 다루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상경성 2호 절터에는 현무암으로 만든 높이 6m의 거대한 석등이 지금도 원래의 위치에 남아 있다. 이 석등은 上·下臺石, 竿柱, 火舍石, 屋蓋石, 相輪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다. 하대석과 화사석은 8각형이고 간주는 배가 부른 둥근 기둥 모양이다. 상륜부에는 寶輪, 寶蓋, 寶珠가 잘 남아 있다. 옥개석과 화사석에는 목조건축 양식이 잘 표현되어 있어서 당시의 건물 형태를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상·하대석에 새겨진 연꽃은 부조가 강하여 힘찬 느낌을 준다. 하대석의 基臺面에는 眼象이 뚜렷하게 부조되어 있다.

 돌사자상으로 대표적인 것은 정혜공주무덤의 연도에서 출토된 것이다.463)王承禮, 앞의 글, 205쪽. 화강암으로 만든 것으로 두 마리가 출토되었다. 하나는 높이 64cm로서 머리는 치켜들고 눈을 부릅뜨고 있으며 입을 벌리고 혀를 말고 있다. 가슴을 불쑥 앞으로 내밀어서 강한 힘을 느끼게 한다. 앞다리는 가슴 앞에서 버티어 세우고 뒷다리는 구부려서 받침돌 위에 쭈그리고 앉아 있으며, 목 갈기는 둥글게 말고 있다. 당나라의 돌사자보다 크기가 아주 작지만 강한 힘을 표현한 조각수법이 돋보인다. 다른 하나는 높이 60cm로서 자세는 거의 같으나 크기가 약간 작고 입은 반쯤 벌리고 있는데 조각수법이 조금 뒤떨어진다.

 1958년 돈화지방을 지표조사할 때에도 돌사자상 하나를 습득하였는데 그 모습은 이들과 거의 같다고 한다.464)李殿福·孫玉良,≪渤海國≫(文物出版社, 1987), 130쪽. 그리고 육정산 6호분을 발굴할 때에도 돌사자의 귀 부분이 출토되었다. 1988년에 三靈屯(三陵屯) 1호 무덤을 정리하면서 무덤 위에서 화강암으로 만든 돌사자상 하나를 또 발견하였다. 일부가 손상되었으나 남아 있는 높이가 39cm이고 위의 사자들과는 달리 뒷다리를 펴고 서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465)왕림안·황림계 저·방학봉 역,<새로 발견한 발해시기의 돌사자>(≪발해사연구≫3, 연변대학출판사, 1992).

 상경성 제1궁전지(보고서의 제2궁전지)에서도 섬록암 또는 현무암으로 만든 7마리의 돌사자상 머리가 출토되었는데,466)東亞考古學會, 앞의 책, 62∼64쪽. 머리 뒤쪽은 기단에 끼울 수 있도록 방추형 모양으로 깎았고 이곳에 고정시키기 위한 구멍이 나 있다. 이들은 입이 귀 밑까지 찢어지면서 이빨을 드러내고 있고 눈망울이 크게 표현되어 있지만 다소 형식화된 느낌을 준다. 상경성과 팔련성에서 각각 綠釉를 바른 사자상 머리도 출토되었다.467)齋藤甚兵衛,≪半拉城-渤海の遺蹟調査-≫(琿春縣公署, 1942), 34쪽.
주영헌, 앞의 책, 142∼144쪽.

 조각품에 속하는 것으로는 이 밖에 龜趺·그릇 다리·墓誌石 등이 있다. 현무암으로 만든 귀부는 1976년에 상경성 궁성에서 남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발견되었다.468)왕림안 저·방학봉 역,<발해 상경귀부에 관한 두가지 문제>(≪발해사연구≫4, 연변대학출판사, 1993). 몸은 거북이이고 머리는 용의 형태를 띠고 있으며 30cm 높이의 받침대 위에 올려져 있었다. 전체 길이는 206cm이고 몸통 길이는 131cm이다. 또한 상경성에서 출토된 그릇의 다리에 짐승 머리가 조각된 것도 있다. 그것은 높이가 8cm에 불과하지만 길게 내민 혀가 바닥에 닿고 머리로 그릇의 몸을 떠받들도록 되어 있는데 발해 예술품의 하나로 삼을 수 있다.

 정혜공주와 정효공주 묘지석은 모두 화강암으로 만든 것으로서 위가 뾰족하고 아래가 네모진 圭形이다. 앞 면에는 楷書體로 묘지문이 음각되어 있다. 정혜공주의 경우에는 비문 주위에 唐草文을 두르고 윗부분에 구름무늬를 새겨 넣었으나, 정효공주의 경우에는 주위에 선을 음각하는 데에 그쳤다.

 발해시대에 사용되었던 그릇으로 陶器와 磁器가 있다. 도기에는 유약을 바른 것과 바르지 않은 것이 있는데 발해인들이 주로 사용한 것은 유약을 바르지 않은 도기이다. 도기는 크게 육정산고분군에서 출토된 초기의 것과 상경성·서고성·팔련성·和龍 北大고분군 등지에서 출토된 중·후기의 것으로 구분된다.469)이보다 자세한 시기구분을 하려는 시도도 있다.
김태순 저·마성길 역,<발해 질그릇의 시기획분에 대하여>(≪발해사연구≫3, 연변대학출판사, 1992).
초기에 만들어진 도기들은 바탕흙이 거칠고 모래가 많이 섞여 있으며, 홍갈색·회갈색·황갈색이 많고 색깔이 고르지 못하다. 그리고 손으로 빚은 것이 대부분이다. 도기 형태로는 작은 접시(碟)·사발(碗)·바리(鉢)·배 깊은 단지(長腹罐)·배 부른 단지(鼓腹罐)·목 긴 병(長頸甁) 등이 있다. 이 중에서도 입술이 두 겹이고 배가 깊은 단지(重脣長腹罐)가 발해 초기의 전형적인 그릇으로서, 말갈의 전통을 강하게 지니고 있다.

 중·후기에 만들어진 도기들에는 바탕흙에 모래가 섞인 것이 줄어들고 물레를 사용한 것이 많아지며 회색이 주류를 이룬다. 유약을 바른 도기도 이 때에 출현한다. 회색 도기는 다시 泥質의 흑회색 도기와 모래가 섞인 회갈색 도기의 두 가지로 나뉜다. 앞의 것은 물레로 만든 것으로서 구운 온도가 높아서 단단하고 표면을 갈아서 빛이 나는데, 표면에 銀을 입힌 것도 있다. 회갈색 도기는 상대적으로 거칠며 구운 온도가 낮다. 손으로 빚은 것이 많고 바탕흙에 가는 모래가 섞여 있다. 이 시기에 들어서면 도기 형태들이 다양해지는데, 작은 접시·사발·바리·단지(罐)·독(甕)·시루·그릇 뚜껑·다리가 달린 그릇·벼루 등등이 있다. 이들 그릇에는 줄·그물·새끼줄·마름모·물결·忍冬·寶相花 등과 같은 다양한 문양들을 누르고·찍고·새기고·덧붙여서 장식하였고, 일부에는 中·信·禳見·章 등과 같은 글자들을 새기거나 찍었다.

 이 가운데에서 아가리를 구름무늬와 인동무늬로 표현한 흑회색의 큰 접시(盤)는 길이 86cm, 너비 64cm, 높이 10cm 크기로서 뛰어난 예술적 감각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입이 나팔꽃처럼 활짝 벌어지고 목이 긴 병은 높이가 39.7cm로서 몸통에 두 개의 손잡이가 달려 있고 입과 목에 띠가 돌려져 있는데, 고구려 유적에서 특징적으로 발견되는 四耳壺의 전통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유약을 바른 도기는 구운 온도가 높고 바탕이 희고 단단하다. 유약으로 三彩를 즐겨 사용하였는데, 삼채로서 노란색·갈색·녹색·자색 등이 사용되었다. 이러한 삼채를 생활 용기로 많이 사용한 것은 통일신라보다 더 적극적이었다. 유약을 바른 도기에는 큰 접시·단지·분·병·사발·세 발 달린 그릇·벼루·그릇 뚜껑 등이 있다. 이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1988년에 화룡 북대고분군 7호 무덤에서 출토된 삼채 병과 삼채 사발이다.470)정영진,<1988년에 발굴한 북대발해무덤 및 3채그릇>(≪발해사연구≫2, 연변대학출판사, 1991).
延邊博物館·和龍縣文物管理所,<吉林省和龍縣北大渤海墓葬>(≪文物≫1994­1).
이들은 거의 완전한 형태로 발굴되었다. 삼채 병은 높이가 18.1cm로서 고령토로 된 흰 바탕흙을 물레를 사용하여 성형하였고, 삼채 사발은 높이가 5.4cm, 입 지름이 11.6cm되는 크기로서, 고령토와 노란 진흙을 섞어 물레를 사용하여 만들었다. 조사 결과 이들은 당나라에서 유입된 것이 아니라 발해에서 독자적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밝혀졌다.

 磁器는 수량이 아주 적고 그마저 조각난 상태로 발견되었다. 상경성에서 출토된 것으로 白磁 사발과 紫色 단지가 있다. 이러한 발해 자기는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471)金元龍·安輝濬,<渤海의 美術>(≪新版 韓國美術史≫, 서울大 出版部, 1993), 207쪽. 외국에 소장되어 있는 것으로 絞釉 호리병(葫蘆甁)도 있다. 이 병은 높이가 24.5cm로 갈색 교유를 흐르는 구름이 에워싸듯이 생동감 있게 발랐다.472)李汝寬 著·井垣春雄 譯,<渤海絞釉葫蘆酒甁>(≪中國靑花瓷器の源流≫, 雄山閣, 1982). 위에는 도금한 구리 뚜껑을 덮었고 바닥에는 먹으로 ‘咸和’라는 발해 연호가 쓰여 있어서 9세기 중반에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발해 그릇은 중국에도 알려져 있었는데 당나라 蘇鶚이 지은≪杜陽雜編≫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전해진다.

武宗皇帝 會昌 원년(841)에…발해가 馬瑙樻와 紫瓷盆을 바쳤는데, 마노궤는 사방이 3척으로 꼭두서니처럼 짙은 붉은 색이었고, 공교하게 만든 것이 어디에도 비할 바가 없어, 神仙에 관한 책을 담아 장막 옆에 두었다. 자자분은 半斛 정도 들어갈 크기로 안팎이 투명하고 그 색은 純紫色이었다. 두께가 한치 정도 되어 이를 들어보면 마치 기러기 깃털을 드는 것 같았다. 임금이 이 그릇의 빛깔이 고결한 것을 좋아하여 仙臺秘府에 두어 약과 음식을 담도록 하였다. 후에 왕의 才人이 玉環을 던지다가 잘못하여 그릇을 조금 깼더니, 임금이 오랫동안 탄식하였다(≪杜陽雜編≫권 下).

 이 기록을 통해서 발해의 도자기 생산기술이 상당하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발해에서 제작된 그릇의 우수성은 일본측 기록에도 보인다. 일본 조정은 876년말에 도착한 楊中遠 일행을 入京시키지 않고 이듬해 6월에 出雲國에서 귀국시키면서 발해에서 보내온 노리개와 玳瑁 술잔을 되돌려 보냈는데, 이를 본 通事 春日宅成이 과거에 당나라에 갔을 때에도 이렇게 진기한 것을 보지 못하였다고 평을 하였다.473)≪日本三代實錄≫권 31, 陽成天皇 元慶 원년 6월 25일.

 이상의 도기에는 대체로 3가지 전통이 엿보인다. 첫째는 말갈 전통을 담고 있는 것으로서 입술이 두 겹이고 몸통이 긴 단지가 대표적이다. 이러한 계통의 단지에는 일반적으로 톱날같은 隆起文이 돌려져 있다. 둘째는 고구려 풍격을 지닌 것으로서 상경성에서 발견된 입이 나팔꽃처럼 벌어지고 몸통에 가로띠 손잡이가 달린 병이 여기에 속한다. 마지막으로 화룡 북대무덤에서 발견된 삼채 그릇들은 唐三彩를 본받은 것들이다.

 다음으로 기와와 벽돌 생산을 살펴보자. 발해 기와에는 암키와·수키와·치미·귀면와·기둥밑 장식기와(柱礎裝飾瓦) 등이 있다. 이들 기와에는 유약을 바른 것과 바르지 않은 것이 있는데 유약은 녹유를 바른 것이 대부분이고 紫色 유약을 바른 것도 일부 있다. 유약을 바르지 않은 것은 대부분이 회색이다. 암키와의 겉에는 새끼줄무늬·그물무늬·마름모꼴무늬 등이 장식되어 있고, 안쪽에는 布目무늬가 많으며, 가장자리에는 손가락으로 누른 무늬나 連珠紋 또는 톱날무늬가 특징적으로 나타난다.474)嚴長錄·楊再林,<延邊地區高句麗渤海時期的紋飾板瓦初探>(≪博物館硏究≫1988­2).

 수키와는 막새 기와(瓦當)가 대표적이다. 수막새의 문양으로는 연꽃잎무늬가 주종을 이룬다는 점에서 고구려 계승성을 강하게 나타내고 있다. 그렇지만 세부적인 면에서는 고구려 막새 기와에서 보이지 않는 문양들도 나타나고 있다. 연꽃잎은 대체로 양식화되어 있는데 4잎에서 8잎 사이로서 6잎 짜리가 기본을 이루고 있다.475)李殿福, 앞의 글(1989), 272∼275쪽.
류병흥,<발해유적에서 드러난 기와막새무늬에 대한 고찰>(≪조선고고연구≫1992­4).
연꽃잎 사이에는 十자무늬·구슬무늬·V자형 무늬·삼각무늬·고사리무늬·꽃망울무늬·文字 등이 자리잡고 있는 경우가 많으며, 연해주 코르사코브카(Korsakovka)절터에서 출토된 것처럼 봉황새를 부조해 넣은 예도 있다.476)E.V. Shavkunov 著·宋基豪 譯,<不死鳥문양이 있는 발해의 막새기와>(≪美術資料≫50, 국립중앙박물관, 1992).
문명대,<코르사코프카 불교사원지 발굴조사>(≪러시아 연해주 발해유적≫, 대륙연구소, 1994), 72∼80쪽.

 발해 기와에는 문자를 찍거나 새긴 것이 다수 발견되어 주목된다.477)孫秀仁,<唐代渤海的文字和文字瓦>(≪黑龍江古代文物≫, 黑龍江人民出版社, 1979).
李强,<論渤海文字>(≪學習與探索≫1982­5).
韓國古代社會硏究所 編,≪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Ⅲ(駕洛國史蹟開發硏究院, 1992), 473∼480쪽.
이들은 주로 상경성·팔련성·서고성에서 출토된 것들로서, 숫자는 400개 정도에 달하고 문자의 종류는 250종 이상이 된다. 발해 주변국에서는 이렇게 많은 문자 기와가 발견되지 않고 있어서 발해문화의 한 특색을 이루고 있다. 문자는 한 글자가 대부분이지만 두 글자 이상 되는 것도 있다. 문자의 종류에는 一·三·九 등과 같은 숫자, 乙·丙·卯 등과 같은 干支, 王·尹·金·高 등과 같은 성씨, 昌·福·計·卯仁·俳刀 등과 같은 이름이 있는데, 이들은 기와 제작과 관련된 사항들을 적은 것으로 보인다. 절반에 가까운 글자는 한자로 되어 있고, 나머지 절반은 정식 한자가 아니라 別體字나 판독이 잘 되지 않는 글자이다. 이를 근거로 하여 종래에는 이들을 발해의 고유 문자로 보는 견해가 있었으나, 다른 자료가 발견되지 않는 한 이것만을 토대로 발해에 고유 문자가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건물에 장식적 효과를 더해 주는 기와에는 치미·귀면와·기둥밑 장식기와 등이 있다. 치미는 지붕 용마루 양 끝에 올려 놓은 새 모양의 기와로서 吉祥과 辟邪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들은 상경성·서고성·연해주 아브리코스절터 등에서 발견되었다. 상경성 제1절터에서 출토된 것은 길이 97cm, 높이 87cm의 크기로서 표면에 옅은 녹유를 칠하였다. 두 날개 부분에 각각 16개의 깃털을 표현하고, 몸통에는 인동무늬로 돋을새김을 하였으며, 날개와 몸통 사이에는 5개의 작은 구슬무늬를 꽃잎처럼 장식하였다. 제9절터에서 출토된 것은 길이 91cm, 높이 91.5cm로서 짙은 녹유를 칠하였는데, 몸통에 무늬가 없고 세부적인 면에서 다른 부분이 있지만 기본 형태는 대체로 제1절터의 것과 동일하다. 아브리코스절터에서 출토된 것은 길이 75cm, 높이 80cm로서 유약을 바르지 않았다. 기본 형태는 상경성에서 출토된 것들과 통하지만 머리 부분에 龍을 새겨 넣은 것이 특색을 이룬다. 연해주 하산구역에서 발견된 佛板에 불상이 안치된 목조 건물이 나타나는데, 기와골이 잘 표현된 지붕의 양 끝에 치미가 표현되어 있다. 여기서는 송곳니를 드러내고 있는 용으로 표현되어 있어서 아브리코스절터에서 출토된 것과 서로 통하는 면이 있다.

 귀면와는 내림마루나 귀마루 끝에 달던 것으로서 악귀를 쫓으려는 벽사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기와는 상경성·서고성 등지에서 발견되었다. 상경성에서는 제1절터와 제9절터 그리고 제1궁전지와 제3궁전지 등에서 출토되었다. 복원된 것들을 보면 여러 가지 녹유를 발랐고 크기가 길이 33∼43cm, 높이 23∼27cm 정도이다. 기본 형태는 커다란 눈망울을 부라리고 있고, 입을 크게 벌려서 길다란 혓바닥과 툭 튀어 나온 이빨이 드러나 있다. 코는 입 위에 뭉툭하게 드러나 있고, 귀는 큰 고리처럼 표현되어 있으며, 뒤쪽으로 뿔처럼 생긴 갈기가 돋아 있다. 전체적으로 귀신을 쫓으려는 사나운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지만, 안압지에서 출토된 통일신라 귀면와보다는 덜 세련되고 덜 양식화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기둥밑 장식기와는 발해에서 독특하게 발견되는 것이다. 커다란 고리 모양을 하여 기둥과 주춧돌이 만나는 부분을 씌워서 기둥을 장식하면서 비가 들이쳐 기둥이 썪는 것을 방지하였다. 이 기와는 몇 개의 조각으로 나뉘어 조립식으로 되어 있다. 겉에 연꽃잎을 새기기도 하였고, 녹유를 바른 것이 많다.

 발해시대에 기와나 벽돌을 굽던 가마터가 발견된 사실은 앞에서 이미 언급하였다. 발해인들은 무덤이나 건축에 사용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벽돌을 만들었다. 특히 바닥에 깔기 위해서 만든 방형이나 장방형 벽돌에는 보상화무늬·인동무늬가 화려하게 장식된 것이 있는데, 통일신라에서 발견되는 것들과 아주 유사하다. 이 밖에 상경성 성문 자리에서는 鬼面을 새긴 벽돌이 발견된 예가 있고, 정효공주무덤과 마적달무덤에서는 문자가 새겨진 벽돌도 출토되었다.

 금속 공예품에는 쇠나 구리 또는 은이나 금으로 만든 것들이 많다. 중경 관할의 鐵州에 속하였던 位城縣(지금의 茂山 지방)은 철의 생산지로 유명하였다. 발해가 멸망한 뒤에는 거란이 冶鐵 장인들을 중심지로 강제 이주시켜 이용하였는데 이에 관해서는 송나라 王曾이 지은 글에 다음과 같이 보인다.

芹菜嶺을 지나 70리를 가면 柳河館에 이르는데, 그 옆에 柳河가 흐른다. 서북쪽에는 冶鐵하는 곳이 있어 발해인들이 많이 사는데, 유하에서 모래와 돌을 걸러서 제련하여 철을 만든다(≪契丹國志≫권 24, 王沂公行程錄).

 814년에는 발해 사신이 당나라에 금과 은으로 만든 불상을 바쳤고,478)≪冊府元龜≫권 972, 外臣部, 朝貢 5, 元和 9년 정월. 836년에는 발해에서 당나라의 허락을 얻어서 登州에 熟銅을 가져가 교역하였다.479)≪冊府元龜≫권 999, 外臣部, 互市 開成 원년 6월. 연해주 아누치노(Anuchino)구역에 있는 노보고르데예브카(Novogordeevka)산성은 조사 결과 발해시대에 커다란 수공업 중심지였음이 밝혀졌다. 이 곳에서는 흙으로 구운 거푸집·도가니·주물용 국자·쇳물 찌꺼기(슬래그)·送風管 등이 발견되었는데, 도가니에는 청동 주물이 늘어붙어 있었다.

 금속 공예품에는 쇠로 만든 것이 제일 많다. 여기에는 그릇·가위·자물쇠·삽·낫 등과 같은 일상 용품들, 투구·창·화살촉 등과 같은 무기들, 風鐸과 같이 절에서 사용되던 것들이 있다. 구리로 만든 제품에는 불상·거울·못·팔찌 등으로 도금한 것도 많다. 순금으로 만든 것에는 허리띠·귀걸이 등이 있다.

 금속 공예품으로 특징적인 것이 허리띠이다. 허리띠는 여러 곳에서 출토되었는데, 和龍 河南屯에서는 순금제 허리띠와 귀걸이·팔찌·꽃장식 등이 발견되었고, 화룡 북대 2·9·28호 무덤 등에서 비교적 완전한 형태의 청동 허리띠가 발견되었다. 특히 하남둔에서 발견된 순금 세공품은 금 알갱이를 촘촘하게 붙인 鏤金 수법이 뛰어나다. 허리띠에서 특징적인 것은 띠꾸미개(銙板)이다. 발해 유적에서 발견되는 띠꾸미개에는 주변국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D자형·사각형 외에도 작은 구멍이 많이 뚫린 것이 있다. 이러한 종류는 종래에 연해주 일대에서 많이 발견되었지만, 근래에 들어 만주지역에서도 종종 출토되고 있는데 발해 띠꾸미개의 특색을 이루고 있다.

 연해주 크라스키노성터 부근의 강가에서 발견된 靑銅俑은 발해인의 얼굴과 의상을 자세히 보여주고 있다.480)김민지,<발해의 복식에 관한 연구(II)-러시아 연해주에서 발견된 청동용(靑銅俑)을 중심으로->(≪韓國服飾學會誌≫22, 1994). 이 인물은 두 갈래로 상투를 틀고 둥근 깃의 저고리와 길이가 발등까지 내려오는 긴 치마를 입고 있다. 布帛으로 만든 띠를 가슴 아래에서 매어 길게 늘어뜨렸고, 그 위에는 종아리까지 내려오는 袍를 입었다. 포 위에는 雲肩을 걸쳤고 발 끝이 올라가 둘로 갈라진 형태의 신을 신었으며, 손에는 원통같은 물건을 들고 있다. 이를 보고한 러시아 학자는 관리의 모습으로 보았으나, 전체적으로는 여성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청동으로 만든 騎馬人物像은 상경성에서 2개, 연해주 우수리이스크에서 1개가 출토되었으며, 대단히 양식화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연해주의 노보고르데예브카성터 등에서는 아주 작은 소형 장식물들이 다수 출토되고 있다.

 1975년에 상경성 土臺子에서 발견된 사리함에 새겨진 四天王像도 주목된다.481)丹化沙,<黑龍江省寧安縣出土的舍利函>(≪文物資料叢刊≫2, 1978). 방형의 銀盒 4면에 양각한 것으로 선이 가늘고 유려하게 표현되어 있다. 사천왕의 머리에는 頭光이 나타나 있고 몸에는 戰袍를 입고 손으로는 持物을 들고 있으며 발로는 마귀를 두 마리씩 밟고 있다. 천왕의 좌우에는 각각 두 명의 권속을 거느리고 있다. 여러 겹으로 된 이 사리함에는 銀絲로 상감하여 인동무늬를 표현한 漆匣도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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