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10권 발해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3. 예술
  • 3) 음악과 무용

3) 음악과 무용

 발해의 중앙 관청에 禮儀와 祭祀를 관장하던 太常寺가 있다. 이곳에서 음악과 무용을 관장하였을 것으로 여겨지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알 길이 없다.482)발해 음악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이 참조된다.
宋芳松,<渤海樂 小考>(≪東洋學≫14, 檀國大, 1984).
宋芳松,<渤海樂의 音樂史學的 再照明-日本 六國史를 중심으로->(≪韓國學報≫53, 一志社, 1988).
다만 정효공주무덤의 서쪽 벽에는 3명의 樂師(樂伎)가 그려져 있어서 발해 악사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발해 음악은 일본 기록에 많이 보인다. 사신으로 갔던 己珍蒙 일행이 740년 정월에 聖武天皇 앞에서 ‘본국의 음악’을 연주한 것이 발해 음악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다.483)≪續日本紀≫권 13, 聖武天皇 天平 12년 정월 정사. 사신 일행이 음악을 연주한 것으로 보아서 일행 중에 악사들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 연주를 계기로 발해 음악이 일본에 처음으로 알려졌을 것이다. 발해 음악이 일본 조정에 전해져 최초로 연주된 것은 749년에 東大寺에서 개최된 법회에서 大唐樂·吳樂과 함께 渤海樂이 연주되었을 때이다. 이 무렵에 발해 음악이 정식으로 일본 궁중 음악의 하나에 속하게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 뒤로 일본 조정에서는 발해 음악을 직접 배워올 필요성을 느끼게 됨에 따라 유학생 內雄을 파견하여 音聲(음악)을 배워오도록 하였는데,484)≪續日本紀≫권 32, 光仁天皇 寶龜 4년 6월 병진. 이 사람은 763년에 귀국한 高內弓과 같은 인물로 추측된다.485)≪續日本紀≫권 24, 淳仁天皇 天平寶字 7년 10월 을해. 이로부터 발해 음악은 일본 궁중음악에 포함되어 발해 사신들을 접대할 때에 수시로 연주되었다. 발해 사신을 위해서 763년에 東國樂을 연주하고, 772년에 ‘세 가지 음악’을 연주하였고, 777년에는 발해 사신들이 ‘본국의 음악’을 연주하였다. 그렇지만 기록에는 제대로 나타나 있지 않지만, 발해 사신들이 파견되었을 때마다 아마 발해 음악이 연주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731년 7월에 雅樂寮의 雜樂生 인원수를 정할 때에 백제·고려·신라 음악은 있으나 발해 음악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고 809년 3월에도 역시 그러하였던 사실로 보아, 아악료에 있던 高麗樂師와 樂生들이 발해 음악을 연주한 것으로 짐작된다. 일본 平安시대 중기에 외래 음악을 개편할 때에 중국과 인도 계통의 음악을 左方의 樂, 삼국과 발해 음악을 右方의 樂으로 편제하여 앞의 것을 唐樂, 뒤의 것을 高麗樂(狛樂)이라고 불렀는데,486)吉川英史,≪日本音樂の歷史≫(創元社, 1965), 66∼67쪽. 여기서의 고려악은 한반도 계통의 음악을 총칭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861년 3월에 개최된 동대사 법회와 874년 3월에 개최된 貞觀寺 大齋會에서 연주된 고려악이나 863년 5월에 개최된 神泉苑 靈會에서 춘 高麗舞에는 발해 음악과 춤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928년(延長 6)에 太平樂의 답무로서 渤海樂이 연주되었다고 하는데,487)≪歌儛品目≫권 1, 異域樂名. 이것도 역시 이에 속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아울러 지금까지 일본에서 연주되고 있는 雅樂曲에 들어 있는 新靺鞨은 발해에서 전래된 것이라고 한다.488)酒寄雅志,<雅樂“新靺鞨”與渤海國>(≪走向國際化的日本≫國際學術討論會論文集, 天津人民出版社, 1995).

 발해가 멸망한 뒤에 발해 음악은 중국의 宋나라와 金나라에도 이어졌다. 송나라에서는 孝宗 12년(1185) 3월에 발해 음악을 금지하는 조치를 내린 예가 있고, 송나라 陳暘이 지은≪樂書≫胡部에 나오는 靺鞨舞란 것도 발해로부터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또 금나라 때에는 渤海敎坊이 있어서 발해 음악이 제도적으로 계속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발해 악기로는 송나라 때에도 사용된 渤海琴이 있지만 실물은 전해지지 않는다. 정효공주무덤의 서쪽 벽에 그려진 3명의 악사 그림을 보면 각기 보자기에 싼 악기를 들고 있다. 보자기에 들어 있기 때문에 어떠한 악기인지 구체적으로 알기는 어렵지만, 대체적인 외형으로 보아서 앞에서부터 拍板, 箜篌, 琵琶를 들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공후의 경우에는 보자기 밖으로 갈색의 길다란 자루가 나와 있고, 자루 위에는 꽃잎 모양의 매듭이 져 있으며 두 개의 매듭 끈이 아래로 늘어뜨려져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발해 음악은 고구려 음악과 말갈 음악을 모두 흡수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음악이 연주될 때에는 춤과 노래도 함께 따르기 때문에 음악과 무용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따라서 지금까지 설명한 발해 음악에는 노래 및 악기 연주와 함께 춤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이 밖에 발해인들 사이에는 踏鎚라고 하는 춤이 유행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거란의 柳河館 근처에서 발해유민들이 춤을 추는 모습을 묘사한 다음과 같은 기록에 보인다.

발해 풍속에 歲時 때마다 사람들이 모여 노래를 부르며 논다. 먼저 노래와 춤을 잘 하는 사람을 여러 명 앞에 내세우고 그 뒤를 남녀가 따르면서 서로 화답하여 노래부르며 빙빙 돌고 구르고 하는데 이를 踏鎚라 한다(≪契丹國志≫권 24, 王沂公行程錄).

 이는 발해에서 일반인들 사이에 춤추고 노래부르는 일종의 집단 무용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宋基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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