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10권 발해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4.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 국내의 발해사 인식과 연구

1) 국내의 발해사 인식과 연구

 먼저 국내에서 발해사 인식이 어떻게 변천되어 왔는가를 살펴보겠다.490)국내에서의 발해사 인식을 通時代的으로 개관한 것으로 다음의 연구가 있다.
石井正敏,<朝鮮における渤海觀の變遷-新羅∼李朝->(≪朝鮮史硏究會論文集≫15, 1978).
한규철,<고려에서 독립운동기까지의 발해사 인식>(≪역사비평≫18, 1992).
크게 보면 신라시대에서 고려시대까지는 발해를 兩面的으로 認識해 왔다. 그러나 조선 초기에는 한국사에서 제외하였다가 후기에 와서 발해의 역사를 재발견하는 커다란 전환이 있었다. 이 때에 발해에 대한 인식과 연구가 높은 수준에 도달하였지만 미완성인 채로 중단되었다. 일제강점기에 발해사에 대한 관심이 다시 고조되었으나 구체적 연구로 이어지지 못하였고, 실증적 연구는 1960년대부터 시작되어 80년대부터 급속히 증가하였다. 이러한 흐름을 보면 비록 시대적 배경은 다르다고 할지라도 한국에서 북방 영토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던 시기에 발해에 대한 인식과 연구도 고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제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면서 그 흐름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겠다. 신라인들은 발해를 高句麗系 국가로 인식하였는가 하면 靺鞨系 국가로도 인식하였다.491)宋基豪,<발해에 대한 신라의 양면적 인식과 그 배경>(≪韓國史論≫19, 서울大, 1988). 이러한 인식은 崔致遠의 글 속에서도 뒤섞여 나타나고 있다. 그는 “옛날의 고구려가 지금의 발해가 되었다”492)≪孤雲集≫권 1, 新羅王與唐江西高大夫湘狀 및 與禮部裵尙書瓚狀.고 하였고, “고구려 殘孽들이 모여서 발해를 세웠다”493)≪孤雲集≫권 1, 上太師侍中狀.고 하였다. 여기에는 신라인 자신들이 멸망시킨 고구려의 잔당이 세웠다고 하여 발해를 낮추어 보려는 의도가 담겨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이들이 발해를 고구려 계승국가로 인정하고 있었던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반면에 그가 지은 다른 글에서 “발해는 말갈족이 번성하여 세운 나라”494)≪孤雲集≫권 1, 謝不許北國居上表.라고 하여, 다른 한편으로는 발해가 말갈계 국가임을 천명하는 모순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양면적 인식은 비록 명확하게 드러나는 것은 아니지만≪三國史記≫나≪三國遺事≫에도 반영되어 있다. 두 사서에는 발해를 靺鞨渤海, 渤海靺鞨, 靺鞨, 狄國, 北狄 등으로 표현하여 적대감을 나타낸 곳이 있는가 하면, 北國이나 渤海로 표현하여 다소 중립적 표현을 사용한 곳도 있어서 역시 발해를 대하는 태도에 편차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발해가 존재하던 당시에 이미 신라인들이 양면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이유는 몇 가지 역사적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첫째는 발해사회의 이중적 구조이다. 발해사회는 크게 고구려인과 말갈인들로 구성되어 있었음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둘째는 발해의 건국자인 大祚榮의 출신이 모호하다는 점이다. 아마 그는 말갈인의 혈통을 가지고 고구려 장수의 직책에 있었던 靺鞨系 高句麗人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셋째는 양국 사이의 외교관계를 들 수 있다. 발해에는 두 가지로 인식할 수 있는 요소들이 내재되어 있었지만 신라인들이 어느 쪽을 택하느냐 하는 것은 두 나라가 적대적인 때였느냐 우호적인 때였느냐 하는 외교적 상황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후삼국 통일을 기반으로 성립된 高麗는 기본적으로 신라 계승의식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으나, 때로는 같은 고구려 계승국가라는 점에서 발해가 주목되기도 하였다.495)趙仁成,<高麗 初·中期의 歷史繼承意識과 渤海史 認識>(≪李基白先生古稀紀念韓國史學論叢≫上, 一潮閣, 1994). 고려 초기에 발해유민을 지속적으로 받아들였고, 934년에는 발해 세자 大光顯을 왕족으로 우대하였다. 이로부터 고려는 발해를 ‘婚姻한 나라’ 또는 ‘親戚의 나라’라고 부르는 동질의식을 가지게 되었다.496)≪資治通鑑≫권 285, 後晋紀 6, 齊王 下, 開運 2년 10월. 그리고 936년에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은 서역 승려를 後晋에 보내어 거란을 함께 쳐서 사로잡혀 있던 발해 왕을 구출하자고 제의하였고, 太祖 25년(942)에는 고려에 온 거란 사신을 붙잡아 유배시키기도 하였다.

 고려 중기에도 尹彦頤의 表文이나≪高麗圖經≫에서처럼 발해에 대한 관심이 표명되었다. 윤언이가 고려 인종에게 稱帝建元할 것을 청하자, 金富軾은 금나라를 격노시켜 고려를 치는 빌미를 마련하는 일이라고 매도하였다. 이에 대해서 그는 다만 임금을 높이고자 하는 일이며, 신라와 발해가 연호를 사용하였지만 중국이 군사를 동원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였다.497)≪高麗史≫권 96, 列傳 9, 尹瓘 附 尹彦頤. 여기에서 그는 발해를 신라와 함께 중국과는 다른 존재로 파악하였음을 보여준다. 徐兢이 1124년에 지은≪고려도경≫도 비록 중국인이 쓴 것이지만 당시 고려인의 역사인식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498)李佑成,<南北國時代와 崔致遠>(≪韓國의 歷史像≫, 創作과批評社, 1983), 150쪽.
韓永愚,<高麗圖經에 나타난 徐兢의 韓國史體系>(≪奎章閣≫7, 서울大, 1983).
이 책에서는 발해를 고구려의 계승국가로 다루었다. 그러나 고려 중기인 인종 23년(1145)에 金富軾이 지은≪삼국사기≫에는 발해를 서술 대상에서 제외하는 신라 중심의 역사인식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그러다가 후기에 들어서면서 발해에 대한 관심이 점차 고조되어,≪삼국유사≫나≪帝王韻紀≫에서와 같이 발해사가 한국사의 한 부분으로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하였다. 一然이 忠烈王 7년(1281)경 찬술한≪삼국유사≫는 신라 중심의 역사서로서 王曆篇에는 발해가 배려되어 있지 않지만, 본문에는 靺鞨渤海條가 설정되어 있다. 이러한 불완전성은 李承休가 충렬왕 13년(1287)에 지은≪제왕운기≫에서 해소되었으니, 여기서는 발해사가 분명히 한국사의 한 줄기로 파악되어 있다. 이 밖에 일연이 충렬왕 4년(1278)에 지은≪歷代年表≫499)蔡尙植,<至元 15年 仁興寺刊 歷代年表와 三國遺事>(≪高麗後期佛敎史硏究≫, 一潮閣, 1991), 165∼166쪽.나 14세기에 나온 鄭夢周의≪圃隱集≫에도 발해에 대한 언급이 있지만, 한편으로는 13세기 후반과 14세기 전반에 활동했던 崔瀣의≪拙藁千百≫에서처럼 신라 계승의식을 고수하는 흐름도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초기에 두 가지 흐름이 하나로 정리되면서 발해사가 배제되어 주변국의 역사로 전락하였지만, 그 후에 점차 인식이 바뀌면서 발해사를 재발견하게 되는 과정을 겪었다.500)李萬烈,<朝鮮後期의 渤海史認識>(≪韓㳓劤博士停年紀念 史學論叢≫, 지식산업사, 1981).
宋基豪,<조선시대 史書에 나타난 발해관>(≪韓國史硏究≫72, 1991).
김혁철,<실학자들의 발해력사관>(≪발해사연구론문집≫1,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1992).
대체로 이 과정은 세 단계를 거쳐 이루어졌다.

 첫째 단계는 成宗 15년(1484)에 간행된≪東國通鑑≫의 역사인식으로서, 여기서는 발해사를 한국사의 일부로 인정하지 않고 단지 신라에 이웃하였던 역사로 파악하였다. 고려 태조가 거란에 대해 행한 정책을 두고 “거란이 발해에 신의를 저버린 것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기에 발해를 위하여 보복을 한다고 하는가”501)≪東國通鑑≫권 13, 고려 태조 25년 史論.라는 史論을 달아 비판하였는데 바로 이 책이 반영하고 있는 역사의식이라고 하겠다. 그러면서도 이 책에는 발해사가 간단히 언급되어 있는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우리와 이웃하였던 인접국가의 역사로서 다루어진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15·6세기를 지나 17세기까지 근간을 이루고 있었으며≪東國史略≫(朴祥, 16세기초)을 비록하여≪東史纂要≫(吳澐, 1606),≪東史補遺≫(趙挺, 1646),≪東國通鑑提綱≫(洪汝河, 1672),≪東國歷代總目≫(洪萬宗, 1705) 등에 거의 그대로 계승되었다. 그리고 정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新增東國輿地勝覽≫(1530),≪歷代紀年≫(鄭逑, 17세기초),≪東史會綱≫(林象德, 1711),≪同文廣考≫(李敦仲, 18세기 후반) 등도 이러한 계열에 속한다. 따라서 조선 후기에 새로이 나타나는 발해사 인식은 이러한 기존의 인식을 수정하면서 극복해 나가는 과정이었다.

 이러한 과정이 시작되는 둘째 단계는 전기와 후기로 다시 나누어 볼 수 있다. 전기에는 고구려 영토를 계승하였던 나라로 발해를 인식하였으니,≪東國地理誌≫(韓百謙, 1615)가 그 선구를 이루었다. 한백겸이 이 책을 저술한 동기 중의 하나가 조선이 왜 약한 나라가 되어 끊임없이 외적의 침입을 받게 되었는가 하는 역사적 원인을 찾는 데에 있었다. 이에 따라 그는 그 원인을 고구려 영토의 상실에서 찾게 되었고, 이러한 관심 속에서 발해가 고구려 영토를 계승한 나라임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결과 발해가 신라에 부속된 역사가 아니라 고구려에 부속된 역사로 파악되어 발해사가 처음으로 고구려 역사 뒤에 붙여져서 설명되었다. 이러한 인식은≪東事≫(許穆, 1667),≪星湖僿說≫(李瀷, 1720년대∼1750년대),≪東史綱目≫(安鼎福, 1754∼1759) 등으로 계승되었다.

 그러나 전기에는 발해사가 우리 역사의 일부인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부정적 시각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후기에 들어와 발해가 고구려 영토를 계승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건국자도 고구려유민이었다는 인식이 등장하면서 발해사를 적극적으로 한국사의 일부로 다루게 되었다. 이러한 인식에는≪疆界考≫(申景濬, 1756)가 그 선구를 이루었다. 신경준은 新羅古記나 최치원의 글을 인용하여 乞四比羽는 말갈인이고 乞乞仲象은 고구려인이라 하였다. 또 고구려가 망한 지 10년 후에 대씨가 고구려유민을 불러일으켜 옛 땅을 회복하였고, 바다를 건너 당나라의 刺史를 죽임으로써 前王(고구려왕)의 치욕을 설욕하였으며, 忽汗州를 평양성이라 부른 것은 옛 도읍지를 못잊어 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특히 고구려왕을 前王이라 표현한 것은 발해가 고구려 계승국가임을 분명히 한 것으로 매우 주목된다.

 그의 역사인식은≪東國文獻備考≫(신경준, 1770)의<輿地考>를 집필하면서 더욱 구체화되었다. 그는 여기서 발해와 定安國을 扶餘·東沃沮·報德國 등과 함께 고구려 속국으로 다루었다. 여기서 속국이란 말은 服屬國과 繼承國의 이중적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발해가 고구려 계승국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서 대조영은 고구려 옛 장수로서 그 유민에서 일어나 전왕의 땅을 모두 회복하였으니, 그는 曠世의 호걸이라고도 하였다. 이와 같은 신경준의 발해사 인식은≪紀年兒覽≫(李萬運, 1778),≪靑莊館全書≫(李德懋, 18세기 후반),≪燃藜室記述≫(李肯翊, 1797),≪大東掌攷≫(洪敬謨, 憲宗代) 등으로 이어졌다.

 마지막으로 셋째 단계에서는 앞 단계에서 주로 고구려 계승국에 초점을 맞추어 발해사를 인식하던 태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발해를 통일신라와 대등하였던 독립국으로 다루거나 발해가 신라보다 우위에 있었다고 인식하게 된다. 이 때에 두 가지 흐름이 나타나는데, 하나는 삼국이나 통일신라와 대등하게 世家, 世紀 등으로 취급하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南北國時代를 설정하는 경우이다.

 전자는≪東史≫(李種徽, 18세기 후반)에서 출발하였다. 이 책은 비록 완성된 형태는 아니지만 紀傳體의 형식으로 발해사를 서술한 최초의 역사서에 해당한다. 그 편목을 보면 삼국 이전의 역사는 本紀로 처리하였지만 삼국은 본기에 서술되지 않았으며, 부여·발해·가야의 역사가 세가로 다루어졌다. 따라서 여기서는 발해를 신라와 대등한 수준으로 인식하지 않았고, 종래와 같이 삼국보다 한 단계 아래인 부여·가야 등과 동등한 수준으로 이해하였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발해사를 고구려의 속국으로 인식하던 단계에서 나아가 독립된 나라의 역사로 서술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매우 크다고 하겠다.

 더구나 이종휘는 우리 나라 땅이 발해시기에 최대 판도를 이루었다가 고려 이후에 축소되었다고 하면서, 우리 나라가 약한 나라로 전락한 것이 발해의 땅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따라 우리가 찾고자 하는 대상이 고구려 옛 땅에서 발해 옛 땅으로 바뀌었다. 이것은 앞 시대에 한백겸·이익·신경준 등이 우리 나라가 약한 나라가 된 이유를 고구려 영토의 상실 때문으로 보고 발해의 건국을 가리켜 ‘고구려 영토를 잃었다’고 표현하였던 것과는 크게 다르다. 이들이 발해사에 많은 관심을 기울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는 신라측 입장을 견지함으로써 이러한 설명이 나오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강한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고구려 땅을 되찾아야 한다는 高句麗故土 회복의식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종휘는 이와 달리 발해 땅을 되찾아야 한다는 渤海故土 회복의식을 표명함으로써 발해사 인식면에서 커다란 전환점을 이루었다.

 이종휘의 이러한 발해사 인식은≪東史世家≫(洪奭周, 1820년대)에서 더욱 강화되어 나타났다. 홍석주는 발해사를 신라·고구려·백제의 역사와 함께 世家로 다루어 삼국과 발해를 동등하게 보았다.≪海東繹史≫(韓致奫, 1814)와≪海東繹史續≫(韓鎭書, 1823)도 역시 이러한 부류에 속한다. 한치윤은 발해사를 世紀로 다루어 신라사와 동등하게 취급하였고, 한진서도<古今疆域圖>에서 삼국과 함께 발해를 그 대상으로 삼았다. 丁若鏞은 체계적인 역사서를 쓰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발해사 인식을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는 과거시험에서 발해의 땅을 회복하여야 한다는 의식을 이미 피력한 바 있다. 그의 발해사 인식이 구체화된 것은≪疆域考≫(1811, 1833)에서이다. 그는 한백겸의 설을 따라 한강을 경계로 하여 북쪽에는 고조선·4군·고구려·발해로 이어졌고, 남쪽에는 삼한이 백제·신라·가야로 이어진 것으로 파악함으로써, 북방 계열과 남방 계열의 역사를 거의 동등하게 다룬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한편 후자는≪渤海考≫(柳得恭, 1784)가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유득공은 서문에서 고려가 발해를 신라와 동등하게 다루어 남북국사를 썼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하여 당시로서는 상당히 혁신적 의식을 담았다. 이러한 의식은≪大東地志≫(金正浩, 1864년경)로 이어졌다. 김정호는 단군조선에서 고려까지의 역사를 다룬<方輿總志>에서 발해사를 독립된 항목으로 다루었으며,<渤海國>에서는 삼한-삼국(신라·가야·백제)-삼국(고구려·신라·백제)-남북국(신라·발해)으로 이어지는 독특한 고대사 체계를 제시하였다.

 이상의 두 흐름은 상호 보완적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흐름이 한 사람에게서 동시에 나타나지 못하고 각기 독립적이었다는 것은 이 당시 발해사 인식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장차 이 두 부류가 하나로 융합되어 고대사 체계가 완성되었어야 했는데, 19세기 초반을 지나면서 더 이상의 진전이 이루어지지 못한 채 중단되어 버렸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조선 후기의 발해사 인식은 미완의 형태로 끝나버림으로써 다음 세기로 과제가 넘겨지게 되었다.

 조선 후기에 한껏 고조된 발해사 인식은 비로소 발해사에 대한 실증적 연구를 낳게 하였다. 발해사에 대한 관심이 주로 영토적인 데에서 출발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연구는 자연히 地理考證으로 나타났다. 발해의 지리에 대해서는 이미≪동국지리지≫에서부터 독자적인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여≪동사회강≫·≪동사강목≫등으로 이어졌지만, 19세기초에 정약용·한치윤·한진서에 이르러서 탁월한 업적이 나오게 되었다. 특히≪해동역사속≫에 실린 지리고증은 후에 徐相雨를 통하여 중국에 소개되어≪渤海疆域考≫(서상우 輯, 1925)라는 이름으로 그 곳에서 간행됨으로써 중국 학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지리고증의 주요 논점은 建國地 및 5京·15府의 위치, 발해의 서쪽 및 남쪽 경계문제였다. 건국지에 대해서는 太白山과 東牟山이 과연 어디인가 하는 점이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敦化市 부근의 額敦山으로 비정한 정약용의 견해가 탁견으로 현재의 통설에 가장 가깝다. 5경·15부의 위치 비정은≪遼史≫地理志나 이를 토대로 만들어진 明·淸시대의 문헌들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는 점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이 책들은 발해가 마치 遼東지방에 있었던 것처럼 서술하였는데, 그러한 오류가 왜 발생하였는가를 규명하고 이들의 원래 위치를 역시 현재의 통설과 거의 비슷하게 비정한 것이≪강역고≫와≪해동역사속≫이다.

 그리고 서쪽 경계문제와 관련해서는 요동지방이 과연 발해의 영토였는가 하는 점이었다. 또 남쪽 경계문제와 관련해서는 세 가지가 거론되었다. 첫째는 대동강 북쪽에서 압록강 남쪽까지가 과연 발해의 땅이었는가 하는 것이고, 둘째는 신라와의 경계를 이룬 泥河가 어디인가 하는 것이며, 셋째는≪新唐書≫에 弁韓이 발해 땅이 되었다고 한 것이 옳은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이상과 같은 지리고증에서 비교적 과학적인 연구 결과를 남길 수 있었다.

 이렇게 발해사에 대한 인식의 차원을 넘어서 본격적인 학문연구의 대상으로 끌어올린 것은 중국을 비롯한 주변의 어느 나라보다도 시기적으로 앞선다. 특히 이들이≪遼史≫地理志의 기록에 오류가 많다는 것을 깨닫고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를 밝힌 것은 당시 중국과 조선을 통틀어 처음으로, 발해의 지리고증에 획기적 전기를 마련하였다. 따라서 발해사 연구는 조선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실증적 연구는 19세기 중반 이후에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이상에서 본 것처럼 조선시대의 渤海觀은 15·6세기까지의 인식이 17세기 초반, 18세기 중·후반, 19세기 초반을 경계로 획을 그으면서 변화하다가 19세기 중반부터 퇴조해 버렸다. 각 시기마다 변화를 가져오게 된 직접적 계기는 대체로 다음과 같다. 17세기 초반의 경우 16세기말에서 17세기초에 걸친 여러 차례의 外亂 때문이었으며, 18세기 중·후반은 18세기 초반에 세워졌던 定界碑를 둘러싼 북방영토 문제 때문이었다. 특히 이 시기에 들어와 종래의 高句麗故土 회복의식이 渤海故土 회복의식으로 전환된 것은 발해사를 적극적으로 우리 역사로 인식한 결과로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발해사 인식은 19세기 중반 이후부터 장기간 침체 상태를 면치 못하였다. 개화기의 교과서들은 三韓正統論의 영향을 크게 받아 삼국통일을 강조함으로써 발해사 인식은 크게 축소되었다. 이에 따라 발해사를 아예 언급하지 않거나 신라사에 덧붙여 간단히 언급하는 수준에 머물렀다.502)김영하,<한말·일제시기의 신라·발해사론>(≪한국고대사연구회 회보≫24, 1992), 7∼9쪽. 다만≪歷史輯略≫(1905)을 편찬하면서 발해사를 비교적 상세히 서술하였던 金澤榮이 나중에 일본측의 발해 사료를 많이 인용하여≪韓國歷代小史≫(1922)를 다시 간행한 것이 돋보인다.

 한동안 침체되었던 발해사 인식이 다시 크게 고양된 것은 일제강점기 때의 일이다. 특히 민족주의 역사학자들을 중심으로 독립운동과 연계되면서 滿洲지역의 北方史에 커다란 관심을 보이게 되었는데,503)韓永愚,≪韓國民族主義歷史學≫(一潮閣, 1994). 이러한 모습은 朴殷植·申采浩·張道斌·權悳圭 등에서 찾을 수 있다.

 박은식은≪渤海太祖建國誌≫(1911)를 발표하였으나 지금은 전해지지 않아서 그의 발해사 인식을 파악할 길이 없다. 신채호의 발해사 인식은≪讀史新論≫(1908)과≪朝鮮上古史≫(1931) 總論에 잘 나타나 있다. 그의 발해사 인식은 유득공과 이종휘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는 삼국통일의 역사적 의미를 격하시키고 발해를 단군·부여·고구려의 정통을 계승한 국가로 파악하여 ‘兩國時代’를 설정하였다. 그러나 이를 뒷받침할 만한 실증적 연구와 역사 서술로 이어지지 못하고 史論에 그치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삼국통일 평가와 발해사 인식은 훗날 북한의 역사인식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신채호에게서 영향을 받아 국사 개설에서 남북국시대를 설정하는 예들도 보인다. 장도빈은≪國史≫(1916·1946)에서 ‘南北國’을 설정하였고, 권덕규의≪朝鮮留記≫(1924)와 黃義敦의<上古時代>(1943)504)黃義敦,<上古時代>(≪半島史話と樂土滿洲≫, 新京 ; 滿鮮學海社, 1943).에서 각기 ‘南北朝’를 설정하였다.

 한편으로 大倧敎 계통에서는 남방사보다 북방사를 높이 평가하여 만주에서 일어난 단군조선·부여·고구려·발해 등을 중시하였으며, 발해 수도 東京城 부근에 1933년 渤海農場을 세워 운영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민족정신을 앙양한다는 목적의식에 사로잡혀 북방사를 지나치게 과장하는 면도 있었다.

 일제강점기에는 발해에 대한 높은 관심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실증적 연구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고, 다만 장도빈의 연구가 눈에 뜨일 뿐이다. 그는 일제강점기에≪渤海太祖≫(1926)를 발표하였고, 해방 후에도≪大韓歷史≫(1959),≪國史槪論≫(1959)에서 발해사를 지속적으로 비중있게 다루었다. 이러한 작업에는 신채호의 영향이 컸으며, 이와 함께 그가 망명지에서 유적을 직접 답사하였던 경험도 크게 작용하였다. 그는 1912년 경에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한 뒤에 우수리이스크(송왕령)지역의 성터를 답사하여 이곳을 고구려 柵城 또는 발해 東京 소재지로 추정하였다. 이것은 현재의 통설과는 다르지만, 한국인 학자로서는 처음으로 연해주 유적을 답사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는 매우 큰 것이다.505)宋基豪,<沿海州의 渤海遺蹟 硏究 動向>(≪韓國民族史의 再照明≫, 제5회 韓國民族史 국제학술심포지엄, 1992), 32쪽.

 해방이 되면서 발해사 연구는 남·북한에서 각기 개별적으로 재개되었다. 남한에서는 1960년대부터 발해사 연구가 다시 시작되었는데, 60년대에 발표된 글들에서는 기왕의 연구 성과를 정리하면서 한국사와의 연결 가능성을 모색하였고, 발해 왕실을 고구려 桂婁部와 연결시켜 보기도 하였다. 그리고 70년대에 이르러 발해의 社會構成과 遺民史의 연구에 상당한 진척을 보았지만, 오히려 발해사를 한국사에 넣는 데에 주저하였던 면도 보인다.506)李龍範,≪中世東北亞細亞史硏究≫(亞細亞文化社, 1976), 27∼29쪽. 이 당시의 연구에는 과거 일본인들의 연구 성과가 주요한 토대가 되었다.

 그러다가 1980년대에 들어서 다수의 학자들이 참여하였다.507)宋基豪·韓圭哲·盧泰敦·金渭顯·徐炳國·崔茂藏 등이 참여하였고 林相先과 金恩國 등이 뒤를 잇고 있다. 그리고 근년에는 일련의 석사논문들이 발표됨으로써 연구 인력이 점차 확대되어 가고 있으며, 이에 따라 연구 분야도 다양화되었다. 역사학 분야에서 대외관계·유민·사회구성 등에 관한 연구가 진척되었으며, 중국측의 고고학 자료도 직접 이용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문학·음악·회화·조각·복식·건축 등의 인접학문으로까지 연구 범위가 확대되었다.508)문학사에 趙東一·金武植, 음악사에 宋芳松, 미술사에 安輝濬, 불상연구에 車玉信·宋基豪·全虎兌, 사찰건축에 이병건, 복식사에 金玟志 등이 있다.

 아울러 이러한 성과들은 발해사가 한국사에서 어떠한 자리를 차지하여야 하는가 하는 南北國時代論이 더욱더 심층적으로 논의될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509)1991년 11월 30일에 한국고대사연구회 주관으로 ‘南北時代論의 기초적 검토’라는 토론회가 개최되었고, 이 때에 발표된 논문들이 이러한 논의를 대표하는 것이다. 그 내용은≪한국고대사연구회 회보≫24(1992) 참조. 근년에 들어서 많은 개설서에서 남북국시대라는 용어를 채택하는 경향이 늘어나면서 발해사의 비중이 점차 높아져 가고 있다. 그렇지만 발해사는 한국사에서 아직도 확고한 자리를 잡지 못한 채로 있다. 이것은 삼국통일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한국사에서 과연 신라와 발해를 동등하게 다룰 수 있겠는가 하는 점들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앞으로도 이 문제들을 둘러싸고 논쟁이 지속적으로 벌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북한에서의 발해사 연구510)송기호,<北韓의 渤海史·統一新羅史 硏究>(歷史學會 編,≪北韓의 古代史硏究≫, 一潮閣, 1991).
한규철,<북한의 발해사 연구>(≪북한의 고대사 연구와 성과≫, 대륙연구소 출판부, 1994).
도 1960년대에 시작되었다. 1962년에 발표된 글에서 발해가 모든 면에서 고구려를 계승하였다는 명제를 제시한 것이 최초의 본격적인 연구였다.511)박시형,<발해사 연구를 위하여>(≪력사과학≫1962­1). 문헌연구를 통한 이러한 주장은 고고학적으로 뒷받침함으로써 더욱 강화되었다.512)주영헌,≪발해문화≫(사회과학출판사, 1971). 이러한 연구들은 발해사 연구의 방향을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연구사적으로 커다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연구를 통해서 발해사를 한국사와 연결시킬 수 있는 기본틀을 마련하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70년대초까지 문헌과 고고학의 두 방면에서 연구의 기본틀이 마련됨으로써, 그 후의 연구들은 이들의 주장을 보강하는 차원에 머물고 있는 실정이다. 이 당시의 연구에는 문헌사에서 정약용과 金毓黻의 업적을 많이 수용하였고, 고고학 자료는 60년대 전반에 중국학자들과 공동으로 만주지역을 조사한 것이 바탕이 되었다.

 북한에서는 다른 연구와 마찬가지로 발해사 연구도 1970년대에 침체를 보이다가 80년대 들어서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80년대 후반에는 발해사 연구 기구와 인력이 대폭 확충되어 연구 성과도 더욱 늘어났다.513)문헌학자로서 張國鍾·蔡泰亨·孫永鍾·김혁철·玄明浩 등과 고고학자로서 金宗赫·리준걸·金志哲 등이 80년대에 들어서 새로 가세하였다. 이 밖에 발해 건축사에 관한 논문이 60년대 이래 발표되어 주목을 받았다.514)이 방면에는 장상렬이 발표한 논문들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80년대에 주체사상이 유일사상으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으면서 고구려 계승의식, 그리고 고려에의 계승성에만 너무 집착하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이 방면의 연구는 아주 중요한 것이지만 여기에만 매달림으로써 논증에 무리를 범하고 있고, 발해사의 다른 측면에 대해서도 거의 무시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그리고 최근에는 사료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연구의 실증성에서 심각한 문제점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후대에 엮어진≪陜溪太氏族譜≫의<渤海國王世畧史>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사료로 이용하고 있고, 심지어는 발해가 고려를 계승하였다는 근거로 삼기도 하였다.515)박영해,<발해의 대외관계에 대하여>(≪력사과학론문집≫12,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1987), 197쪽.
채태형,<「협계태씨족보」에 실린 발해사관계 사료에 대하여>(≪발해사연구론문집≫1,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1992).
김성호,<발해와 후기신라의 관계>(위의 책).
그리고≪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을 비판없이 받아들여 ‘고려 후국’을 설정하고 성천에서 신의주로 도읍을 옮겼다고 주장하는 것도 볼 수 있다.516)장국종,<발해의 ‘고려후국’의 존립과 그 수도에 대하여>(≪력사과학≫1992­2).

 이와 연관되는 것이지만 또 하나의 경향으로서 과거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연구 수준으로 회귀하려 하는 점이 눈에 뜨인다. 檀君陵을 둘러싼 논의에서도 이미 드러났듯이 금세기 들어와서의 과학적 연구 성과들을 포기하고 전근대 사학의 수준으로 되돌아가려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근래에 와서 실학자들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고, 심지어는 실학자들의 견해를 비판없이 그대로 수용하여 입론의 근거로 삼는 모습을 보이곤 한다.

 고고학에서는 만주의 자료에 대한 접근이 어려워지면서 1980년대 들어와 함경도지역에서 발해 유적을 찾는 작업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517)리준걸,<함경남북도 일대의 발해 유적 유물에 대한 조사 보고>(≪조선고고연구≫1986­1).
박진욱,<최근년간 우리 나라 동해안일대에서 발굴된 발해유적들과 그 성격에 대하여>(≪연변대학조선학국제학술토론회론문집≫, 1989).
그 결과 상당수의 유적들을 새로이 확인하였고, 문헌사보다는 이와 같은 새로운 고고학 자료들이 우리들에게는 더 유용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데, 咸鏡南道 新浦市 梧梅里절터는 특히 주목되는 유적이다. 그러나 조사보고서가 너무 간략하여 유적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얻기가 어렵고, 고구려의 계승성을 설명하려는 데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고구려 유적과 구별되는 편년 기준을 명확히 제시하지 않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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