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10권 발해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4. 발해사 인식의 변천
  • 2) 국외의 발해사 인식과 연구

2) 국외의 발해사 인식과 연구

 이상으로 근년에까지 한국에서 전개되어 온 발해사 인식과 연구 경향을 살펴 보았다. 이제 국외로 눈을 돌려 보겠다. 중국에서의 발해사 인식은≪舊唐書≫渤海靺鞨傳과≪新唐書≫渤海傳을 기본으로 하여 전개되었다.≪唐會要≫·≪冊府元龜≫·≪五代會要≫·≪資治通鑑≫등은 전자를 따르고 있고,≪玉海≫·≪文獻通考≫·≪金史≫등은 후자를 따르고 있다. 그런데 두 역사서에서는 발해사의 성격을 명확히 규정하지 못한 채 靺鞨的 요소와 高句麗的 요소가 동시에 언급되고 있다. 그리고 그 이후의 문헌들도 이러한 서술을 답습함으로써 새로운 역사인식이 별로 형성되지 못하였다.

 발해사 연구는 19세기에 曹廷杰, 景方昶 등이 지리고증을 하면서 단초를 열었다. 그러나 전문적 연구는 금세기초에 들어와서 비롯되었다.518)대표적인 연구자로는 唐宴, 黃維翰, 金毓黻 등이 있다. 특히 발해에 관한 거의 모든 문헌들을 망라하고 고증도 정밀하게 한 연구도 나와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중국학자들의 발해사 연구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고 있다.519)金毓黻,≪渤海國志長編≫(華文書局, 1934). 해방 이후 1970년대 중반까지는 발해사 연구의 소강기였다. 이 기간에 貞惠公主무덤, 河南屯무덤과 같이 중요한 유적이 조사되기는 하였지만, 체계적이지 못하고 우발적인 것이었다.

 문화혁명이 끝나고 개혁·개방정책이 실시되는 1970년대말부터 모든 학문 분야에서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고, 발해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1980년 이후에 발표된 글이 616편에 달하여 전체의 90%를 차지하는 것만 보아도 이를 짐작할 수 있다.520)주요 연구자로서는 王承禮·魏國忠·劉曉東·孫玉良·陳顯昌·朱國忱·張泰湘·鄭英德·孫進己·孫秀仁·王俠 등이 있고, 이 밖에 張高·王成國·羅繼祖·宋德胤·丹化沙도 여러 편의 글을 발표하였다. 조선족 학자로서 方學鳳·鄭永振·金香 등이 있다. 그리고 林樹山 등은 러시아 논문을 지속적으로 번역하여 소개하는 데에 공헌하고 있다.

 전반적으로 볼 때 중요한 연구 주제로는 발해사의 귀속문제·대외관계·지리고증 등이 있고, 그에 못지 않게 고고학적 연구도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521)西川宏,<中國における渤海考古學の成果と課題>(≪靑丘學術論集≫3, 1993). 특히 성터·무덤·절터·窯址 등을 조사·발굴한 고고학 자료는 발해사의 실체를 규명하는 데에 크게 기여하고 있으며, 80년대 이후에 조사된 대표적 유적으로 貞孝公主무덤·三陵屯 2호무덤·北大고분군·東淸고분군·上京城 등을 들 수 있다.

 일본에서의 발해사 연구는 특이한 점이 있다.522)鈴木靖民,<日本における戰後の渤海史硏究-硏究の動向と課題->(≪발해의 민족형성과 연구사≫, 발해사 국제학술회의 발표요지, 1993).
酒寄雅志,<近代日本と渤海史硏究>(위의 책).
한국이나 중국·러시아에서는 자기 역사의 일부로서 발해사를 다루고 있지만 일본에서는 그렇지 않다. 그런데도 수적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앞에서 언급한 일본의 대외관계사라는 측면 외에도 일제시대에 만주를 지배하였던 경험 때문이다. 이에 따라 근년보다도 오히려 일제시대에 발해사 연구가 활발하였음이 통계 자료로도 확인된다.

 과거≪續日本紀≫를 비롯한 일본의 역사서들은 발해를 고구려계 국가로 보았다. 발해에 대한 실증적 연구는 19세기말에 시작되었고, 일제시대에 들어와 만주 침략과 연계되면서 주로 지리고증과 고고학적 조사에 연구의 중점이 두어졌다. 고고학 성과로서 東京城(上京城)·西古城·八連城(半拉城) 등을 조사하여 발해의 주요 수도들을 확인하였던 점은 주목할 만하다.523)이 시기에는 鳥山喜一·三上次男·駒井和愛·齋藤優·和田淸·津田左右吉 등과 같은 연구자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그러나 해방이 되고 나서 1960년대까지는 소강 상태였다. 연구 내용에서 볼 때에 일제시대 연구의 연장선상에 있었으며, 앞 시기의 연구자들이 그대로 활동하던 시기였다524)이들과 함께 日野開三郞, 新妻利久등이 활동하였다..

 1970년대 이르러 전후 세대로 구성된 새로운 연구자들이 등장하였다. 이시기에 와서는 고고학 자료를 직접 접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문헌사가 중심을 이루게 되었다.525)일본사 전공자로서 石井正敏·鈴木靖民·酒寄雅志 등이 있고, 한국사 내지 중국사 전공자로서 古畑徹·河上洋·李成市·浜田耕策 등이 있다. 이 밖에 小嶋芳孝와 西川宏 등의 연구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이에 따라 연구의 내용이 과거와는 달라졌으며, 일본의 대외관계와 정치사 및 발해의 사회구조를 밝히는 데에 중점이 두어졌다. 발해사회 가운데에서도 首領制를 중심으로 하는 지방사회의 구조를 해명하는 데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마지막으로 러시아를 보겠다.526)小島武男,<ロシヤに於ける渤海硏究者及び文獻について>(≪史學≫10­1, 三田史學會, 東京, 1930).
林樹山·姚鳳,<蘇聯對渤海國的硏究>(≪中國史硏究動態≫1981­12).
薛虹,<蘇聯的渤海史硏究-兼評蘇聯對渤海國的硏究->(≪中國史硏究動態≫1983­1).
T. A. Vasil'eva,<우리나라 문헌을 통해서 본 연해주 발해 유적 연구사>(≪소련원동 중세 고고학의 새로운 자료≫, 소련과학원 원동지부 원동민족 역사학·고고학·민족학연구소, 블라디보스톡, 1989).
宋基豪,<沿海州의 渤海遺蹟 硏究 動向>(≪韓國民族史의 再照明≫, 제5회 韓國民族史 국제학술심포지엄, 1992).
에. 붸. 샤브꾸노프,<러시아에서의 발해사 연구>(≪발해의 민족 형성과 연구사≫, 발해사 국제학술회의 발표요지, 1993).
러시아에서 발해사에 관한 관심은 19세기에 활동한 연구자들에게서 이미 나타나고 있다.527)비추린(N. Ia. Bichurin) 등이 있다. 그로부터 20세기 전반까지는 연해주의 발해유적들에 대해 산발적인 조사가 진행됨으로써 향후의 연구에 기초자료를 제공해 주었다. 발해사 연구가 체계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이다.528)이 때부터 아클라드니코프(A. P. Okladnikov)와 그의 제자인 샤브꾸노프(E. V. Shavkunov)가 연구를 주도하였다. 특히 샤브꾸노프는 전체 연구의 30% 정도를 차지하고 있으며, 지금까지 볼딘(V. I. Boldin), 셰메니첸코(L. E. Semenichenko), 이블리예프(A. L. Ivliev) 등의 연구자들을 배출한 대표적인 연구자이다.

 1958년에 코프이토(Kopyto)절터를 발굴하면서 연해주에서 체계적 발굴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1960년대에는 샤이가(Shaiga)성터에 대한 조사가 중심을 이루면서 금나라의 유적에 관심이 집중되어 상대적으로 발해유적에 관심이 덜 기울여졌다. 이후 발해유적에 대한 조사와 연구가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부터이다.

 그 사이에 성터와 주거지들이 다수 발견됨으로써 상당한 자료가 축적되었고,529)연해주 유적 목록 및 참고문헌은 다음 책에 망라되어 있다.
A. G. Striuchenko 등 공저,≪연해주의 역사유적 및 문화유적-자료 집성-≫2, 고고유적편(러시아과학원 원동지부 원동민족 역사학·고고학·민족학연구소, 1991).
이를 토대로 고고학적으로 다양한 접근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러시아측 연구의 특색이다. 이 때문에 지금까지 발표된 논문들을 분석해보면 고고학에 관한 것이 70% 이상에 달한다. 연구자들은 대부분 블라디보스톡에 있는 ‘러시아과학원 원동지부 원동민족 역사학·고고학·민족학연구소’에 소속되어 있다.530)볼딘, 셰메니첸코, 디야코바(O. V. D'iakova), 이블리예프 등이 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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