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10권 발해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4. 발해사 인식의 변천
  • 3) 주요 연구 주제

3) 주요 연구 주제

 이상으로 각국의 발해사 인식과 연구 동향을 살펴 보았다. 전체적으로 개괄해 보면 발해사 연구는 1980년대에 본격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80년대 이후에 발표된 글이 전체의 71%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연구에서 중심을 이루어 온 주제는 발해사의 歸屬문제, 지리고증, 대외관계, 고고학적 조사와 연구, 내부 사회의 여러 양상들, 유민 활동 등이다.531)발해사 연구 성과를 주제별로 개관한 것들로는 다음의 연구가 있다.
景愛,<戰前東北歷史地理硏究述評>(≪學習與探索≫1981­4).
諸爲,<國內渤海史硏究近況介紹>(≪學習與探索≫1982­5).
孫秀仁,<新中國時期渤海考古學的進展>(≪黑龍江文物叢刊≫1982­2).
王成國,<近年來國內硏究渤海史槪況>(≪中國史硏究動態≫1982­10).
丹化沙,<渤海歷史地理硏究情況述略>(≪黑龍江文物叢刊≫1983­1).
송기호,<발해사 연구의 몇가지 문제점>(≪韓國古代史論≫, 한길사, 1988).
宋基豪,<발해 城址의 조사와 연구>(≪韓國史論≫19, 國史編纂委員會, 1989).
鄭永振,<최근년간 중국동북지역에서의 발해유적 조사 발굴과 발해사 연구동향>(≪韓國上古史學報≫9, 1992).
전체 글을 대략적으로 분류해 보면, 고고학 분야가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고, 그 다음이 대외관계 분야이다. 이어서 종족구성, 지방사회, 경제·정치제도, 문화 등과 같은 내부구조 해명이 있고, 그 다음으로 지리고증, 유민, 귀속문제, 번역물, 연구사 정리 등이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주제들 가운데에서 가장 관심을 기울여 온 부분이 발해사의 귀속 문제이지만, 전적으로 이것만 다룬 글은 그렇게 많지 않다. 그러나 大祚榮의 出自나 발해의 종족 구성, 대외관계, 문화 성격 등 다른 여러 방면의 연구도 직·간접적으로 이와 관련되어 있다. 이것은 발해사를 어떻게 바라보느냐 하는 인식문제와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까지 감안한다면 제일 큰 비중을 차지하는 주제가 되며, 발해사 연구의 방향을 결정하는 핵심이 되고 있다.

 금세기에 들어 각국에서 진행된 논의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진다. 하나는 高句麗 계승국가로 보는 관점이고, 다른 하나는 靺鞨系 국가로 보는 관점이다. 이러한 차이는 과거의 역사적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기보다는 현재의 국가적 이해 관계에 따른 것이다. 그리고 지배층을 중심으로 보려는 전통적 역사관과 피지배층을 중심으로 보려는 마르크스주의 역사관에서 비롯된 면도 있다. 이에 따라 개인적 차원에서보다는 국가별로 견해가 갈라지는 특성이 있다. 전자는 주로 남·북한과 일본에서 보는 시각이며, 후자는 중국과 러시아에서 견지하는 시각으로 정리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그룹 안에서도 관점들이 조금씩 다르다. 똑같이 고구려 계승국가로 보지만, 북한에서는 영토·주민·문화 등 모든 면에서 고구려를 계승하였다고 하여 고구려 일변도로 기울고 있어서 그만큼 경직성을 띠고 있다. 반면에 남한에서는 고구려 계승국가로 보아야 한다는 당위성에 동의하면서 南北國時代라는 명칭을 사용하자는 논의가 진행되고 있지만, 다른 가능성들에 대해서도 유연성을 가지고 있다. 일본에서는 이보다 강도는 약하지만, 國書에 나타나는 고구려 계승의식, 지방제도면에서 고구려와 발해의 연속성을 추적함으로써 고구려계 국가로 파악하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도 미묘한 입장 차이가 드러난다. 똑같이 말갈계 국가로 보더라도 말갈족의 귀속문제에서 시각이 갈라지고 있다. 중국에서는 말갈족을 중국에 속하는 소수민족의 하나로 보는 데에 반해서, 러시아에서는 러시아 원동 소수민족의 하나로 보려 하고 있다. 따라서 발해사를 각기 자기 역사의 일부로 다루려 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중국에서는 발해가 粟末靺鞨族을 주체로 한 정권이며, 심지어는 독립국이 아닌 당나라의 일개 지방정권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 두 가지 사실이 연구의 기본 전제가 되어 있을 정도이다. 근래에는 고구려도 중국사의 일부이기 때문에 말갈계 국가이건 고구려계 국가이건 간에 중국사의 일부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532)孫進己의 주장이 대표적이다.

 따라서 한국과 중국 그리고 러시아가 모두 발해를 자기 역사 속으로 끌어들이려는 의도를 가지고 연구에 임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글들을 보면 이러한 주장들이 아직도 실증적 토대 위에서 설득력있게 전개되어 온 것이 아니라는 데에 문제점이 있다.

 그 예로서 중국에서 1970년대부터 제기된 것으로 발해가 당나라 지방국가였다는 설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 주장은 발해인들이 賓貢科에 응시하였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허구에 불과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빈공과란 신라인이나 발해인과 같은 외국인을 위해서 특별히 설치한 것이기 때문이다. 발해는 대외적으로 당나라로부터 冊封을 받았고 당나라에 朝貢하였으므로 기본적으로는 당나라 중심의 국제질서에 편입되어 있었던 왕국이었다. 그러면서도 내부적으로는 皇帝國의 면모를 원용하였던 사실이 확인되고 있다. 따라서 발해는 대외적으로 당나라에 臣屬하면서도 내부적으로 황제국의 질서를 일부 유지하려 한 二重體制를 취하고 있었던 엄연한 독립국이었다.

 그러면서 발해는 고구려 계승의식을 강하게 지니고 있었던 나라였다. 고고학 자료를 분석해 보면 고구려·말갈·당나라 문화 요소 등이 서로 융합된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렇지만 이것은 역사적 계승성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발해인의 생활문화의 다양성을 반영하는 것일 뿐이다. 발해인들의 의식은 바로 문헌에서 드러난다. 이러한 문헌 자료에서는 지속적으로 고구려 계승의식만이 나타날 뿐이다.

 건국 집단의 구성이나 지배 집단의 姓氏 구성에서 고구려 계통의 사람들이 주도권을 쥐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文王대에는 일본과의 외교에서 고구려의 天孫意識을 원용한 사실이 드러나고, 그의 후반기에는 고구려 계승국이라는 의미로서 고려국을 표방하였다. 康王대에도 고구려 계승의식이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특히 이 때에 강왕 자신이 스스로 이러한 의식을 드러낸 것은 발해인의 입장을 밝히고 있어서 주목된다. 그리고 872년에 일본에서 발해 사신을 접대하면서 고구려 계통의 사람을 내세웠다는 점을 볼 때에 마지막까지 고구려 계승의식이 지속되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따라서 발해사의 고구려 계승성은 자명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발해사는 한국사의 일부이다.

<宋基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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