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1. 중대에서 하대로
  • 1) 기로에 선 중대 전제왕권

1) 기로에 선 중대 전제왕권

 ≪三國史記≫의 찬자는 新羅本紀에 대한 기술을 끝맺으면서 신라 사람들이 자신의 역사를 上·中·下의 3代로 시대구분했다는 설을 싣고 있다. 이에 의하면 천년왕국인 신라의 전 역사 가운데 삼국을 통일하기까지의 최초 700여 년간이 상대에 속하며, 이에 후속하는 260여 년간의 통일기는 다시 중대와 하대로 나뉜다.

 그런데 중대와 하대는 惠恭王 말년(780)의 정변을 경계로 하고 있다. 이 정변에 의해서 太宗武烈王의 후손인 혜공왕은 거듭되는 내란 끝에 마침내 피살되어 새로운 왕통이 등장하게 되었다. 하지만 중대와 하대의 구분은 단순히 왕통의 변화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신라 국가의 運祚에 치명적인 낙인을 찍은 큰 사건이었다. 뒤에서 보게 되듯이 하대는 신라가 삼국통일의 여세를 몰아 정력적으로 이룩한 고도로 중앙집권화된 정치·사회체제가 동요하기 시작하고 이에 수반하여 중대 문화의 황금시대가 이윽고 쇠퇴의 길로 접어드는 그 자체 거대한 변혁을 의미하고 있다.

 주지하듯이 중대는 654년 金春秋가 眞德女王의 뒤를 이어 태종무열왕으로 즉위함으로써 개막되었다. 그가 즉위할 무렵 신라는 치열해진 삼국항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힘겨운 국가보위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善德女王 11년(642) 백제와 고구려에 의한 대공세가 있은 뒤로부터 신라는 줄곧 군사적인 위기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동왕 16년 정월에는 上大等 毗曇에 의한 내란이 일어나 관군과 반란군이 도성 안에서 서로 격돌하기까지 했었다. 무열왕은 이 같은 국가적인 위기 국면을 타개하기 위하여 지금까지의 수세에서 일약 공세로 전환했다. 바야흐로 지금까지의 국가보위전쟁은 삼국통일전쟁으로 대전환을 맞게 되었다.

 신라는 무열왕과 그 아들 文武王 양대에 걸쳐서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끝에 가서는 연합군으로 끌어들인 唐軍을 한반도에서 몰아냄으로써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룩했다. 이 때가 바로 문무왕 16년(676)이었다. 이제 진정 三韓은 一家가 되었으며, 太平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어도 小康이라고 말할 수 있는 형편이 되었다. 신라는 이 때부터 혜공왕 16년(780)의 파국이 도래할 때까지 1백여 년간 국제평화와 안녕, 그리고 일찍이 누려보지 못한 정치적 안정과 번영을 누렸다.

 중대의 정치적 안정을 확고하게 보장하고 있었던 것은 다름아닌 왕권이었다. 사실 이 시기에 들어와 왕권은 크게 강화되었다. 상대등 비담을 대표자로 하여 일어난 眞骨귀족세력의 반란을 실질적으로 진압한 김춘추·金庾信 일파는 자신들이 옹립한 진덕여왕 때에 야심적인 정치개혁을 단행했다. 그것이 바로 진덕여왕 5년(651)의 관제개혁이었다. 이 때 종래 왕실의 家臣的 성격이 농후했던 稟主를 執事部로 개편하여 王政의 기밀사무를 맡게 한 것은 매우 주목되는 사실이다. 이에 따라 그 장관인 中侍(景德王 때 侍中으로 개칭함)는 병렬적으로 할거하고 있는 중앙의 제1급 행정관서인 여러 部·府를 유기적으로 통제하게 됨으로써 국가권력은 집사부를 통하여 국왕에 一元的으로 귀속하게 되었다. 더욱이 중시에게는 행정상의 失策뿐 아니라 국토를 기습적으로 강타한 천재지변의 발생에 대해서까지도 왕을 대신하여 책임을 지게 함으로써 왕권의 안전판과도 같은 구실을 맡게 하였다.001)李基白,<新羅 執事部의 成立>(≪震檀學報≫25·26·27, 1964 ;≪新羅政治社會史硏究≫, 一潮閣, 1974, 151∼153·164∼167쪽).

 현재 학계에서는 중대를 흔히 專制王權의 시대라고 부르고 있다.002)李基白,≪韓國史新論≫新修版(一潮閣, 1990), 107∼108쪽.
전제왕권이 다만 中代에만 국한되어 나타난 현상이 아니라, 中古말(즉 上代말부터 下代의 귀족연립정치에서도 지속된 정치형태였음을 강조하는 어떤 논자는이 전제왕권이란 왕의 一人독재라기 보다는 오히려 관료제도의 뒷받침을 받으면서 소수의 귀족·외척세력의 정치적 지지와 타협 아래 존속될 수 있는 체제였다는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는 申瀅植,<統一新羅 專制王權의 性格>(≪統一新羅史硏究≫, 三知院, 1990) 참조.
신라가 이 시대에 들어와 일종의 전제왕권을 구축할 수 있었던 요인으로는 첫째로 태종무열왕·문무왕 부자의 집념과 노력에 의해 통일의 대업이 달성됨으로 해서 무열왕 계통의 권위가 크게 상승된 점, 둘째로 삼국통일을 전후한 시기에 왕권 강화에 沮害되는 일부 유력한 진골귀족을 성공적으로 제거한 점, 셋째로 통일전쟁 기간 중에 결속을 강화한 지방세력과의 유대를 한층 긴밀하게 함으로써 국가권력의 지지기반이 王京 6部로부터 전국적으로 확대된 점, 넷째로 앞서 지적했듯이 집사부를 중심으로 하여 권력을 집중시키는 한편 儒敎政治理念을 도입하여 국왕에 대한 충성도가 높은 관료제도를 발전시킨 점등을 들 수 있다.

 그렇지만 이같은 전제적 왕권에도 근본적인 한계가 있었다. 중대의 권력구조가 骨品體制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이었다. 골품체제는 기본적으로 진골귀족 萬能의 정치·사회적 체제였으며 국왕이라고 하더라도 진골의 신분을 결코 초월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사실 진골귀족들의 국왕에 대한 對等性의 의식은 中古시대 이래 매우 뿌리 깊은 것이었다. 그런 까닭으로 삼국통일 뒤에도 진골귀족들은 자기들 위에 군림하는 전제군주가 아니라 자기들의 특권을 보장하는 대표자로서의 국왕을 요구했다. 그런데 국가의 역량이 한층 증대된 통일기에 들어와 역대 국왕은 권력집중을 통한 전제정치의 기반을 다지기 시작했고, 이는 필연적으로 진골귀족에 대한 통제를 강화함으로써만 달성할 수 있었다. 이처럼 그 자체 골품체제에 기반을 두면서 그 체제의 기본원리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데에 중대 왕권이 당면한 정치적 딜레마가 도사리고 있었다.

 한편 삼국통일 후 약 1세기간은 국내적으로 안정되고 국제적으로도 평화가 깃든 시대였다. 그리하여 국민들은 오랜만에 전쟁의 공포에서 벗어나 안정과 평화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안일한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사회적 모순이 차츰 쌓여 간 것도 사실이다. 통일 전 1백 년간에 걸쳐 가혹한 생존전쟁을 치르는 동안 농민층은 매우 피폐해졌고, 이에 따라 사회의 分化작용이 소리없이 진행되었다. 사실 농민들은 국가보위전쟁과 삼국통일전쟁의 役軍으로서 그토록 장기간에 걸쳐 국가에 봉사했으며, 또한 중대의 번영을 떠받치는 사실상의 주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생활의 진보는 이에 뒤따르지 못했으며, 오히려 唐制를 모방한 律令政治가 강화됨에 따라서 조세와 課役에 한층 더 시달리게 되어 피폐한 모습을 나타내게 되었다. 더욱이 농민의 궁핍에 기생하는 高利貸자본이 발달하고 성덕왕 때에 장기간 전국을 휩쓴 大災害로 말미암아 조정의 적극적인 구호 노력에도 불구하고 농민층은 광범위하게 몰락해 갔다. 삼국통일 시기를 전후하여 일부 사람들 사이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아미타 淨土신앙이 8세기 중엽 무렵에 이르러 민중 사이에 공감을 얻어 널리 유행한 것도 이같은 사회상을 배경으로 나타난 현상이었다.003)李基白,<淨土信仰의 諸樣相>(≪新羅思想史硏究≫, 一潮閣, 1986) 참조. 다만 아미타신앙을 계층간의 대립이라는 측면에서 파악하려는 경향에 반대하는 어떤 논자는 신라 중대의 정토사상 및 아미타신앙은 厭世的 성격보다는 현실긍정적인 성격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는 金英美,<新羅 中代의 阿彌陀信仰>(≪新羅佛敎思想史硏究≫, 民族社, 199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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