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1. 중대에서 하대로
  • 3) 하대의 개막과 원성왕계의 성립

3) 하대의 개막과 원성왕계의 성립

 혜공왕 16년 정변의 승리자인 상대등 김양상은 新王으로 즉위했다. 그가 곧 宣德王이었다. 그는 奈勿王의 10세손으로 중대 왕실의 입장에서 보면 傍系혈족에 지나지 않았다. 다만 그의 조부인 元訓이 성덕왕 원년(702) 9월에 집사부中侍에 임명되면서 중대 왕정에 참여하게 되었다.010)李基東,<新羅 下代의 王位繼承과 政治過程>(≪歷史學報≫85, 1980 ;≪新羅骨品制社會와 花郞徒≫, 一潮閣, 1984, 147쪽). 더욱이 그의 아버지 孝方이 성덕왕의 딸과 혼인하면서 주목받는 가문으로 떠올랐다. 김양상은 이같은 가문의 후광에 힘입어 그의 외삼촌인 경덕왕 때 정계에 진출, 이윽고 동왕 23년(764) 정월 阿湌으로 집사부시중에 취임하여 혜공왕 4년(768) 10월까지 비교적 장기간 재임했다. 시중을 지낸 뒤에도 그는 계속 요직에 있었다. 혜공왕 7년 12월에 제작이 완료된 성덕대왕신종의 銘文을 보면 그는 당시 肅正臺(司正府의 개명)와 修城府(京城周作典의 개명)의 장관직(令)을 겸임했다. 앞에서 보았듯이 그는 혜공왕 10년 9월 伊湌으로 상대등이 되어 정치상의 실권을 장악했고, 이를 발판으로 하여 혜공왕 16년의 정변을 주도했다. 혜공왕과 외사촌 관계였던 그가 언제 어떠한 계기로 반왕파로 돌아섰는지는 잘 알 수가 없다.

 신라 中古시대에 확립된 정치적 전통에 비추어 볼 때 상대등은 태자와 같은 정당한 왕위계승자가 없을 경우 왕이 될 수 있는 잠재적인 제1후보자였다.011)李基白,<上大等考>(≪歷史學報≫19, 1962 ; 앞의 책, 1974, 99∼100쪽). 다만 法興王 18년(531)에 상대등직이 설치된 이래 실제로 상대등이 즉위한 예는 없었다. 그런데 김양상은 상대등직에서 왕위에 오른 것이다. 이처럼 하대의 출발 그 자체가 하나의 이변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뒤에서 보게 되듯이 하대를 통해서 태자가 없을 경우 상대등이 즉위하는 것이 거의 일반적인 관례처럼 되고 말았다. 이같은 점만 보더라도 하대라는 시대가 권력구조면에서 중대와 크게 다르고 또한 중고시대와도 달랐던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선덕왕대는 어찌 보면 일종의 과도기와 같은 느낌을 준다. 왕의 재위기간이 만 5년이 채 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가 죽은 뒤 왕통이 바뀌어 결국 一代에 그쳤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그는 내물왕계라고는 하지만 부친이 성덕왕의 사위가 됨으로 해서 중대 말기 정계에서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다. 그러니까 그는 母系로 본다면 결코 중대 왕실을 배반한다거나 더욱이 부정할 처지는 되지 못했다. 그가 재위 5년(784) 4월 왕위를 禪讓하려고 한 것이라든지, 병석에서 내린 遺詔에서 자신은 본래 왕위에 야심이 없었으나 여러 사람들의 추대를 뿌리칠 수 없어 부득이 즉위하게 되었다고 토로한 것은 솔직한 심정에서 우러나온 것으로 짐작된다. 그는 재위 중에 중국의 祀典을 모방하여 社稷壇을 설치했는데, 이는 혜공왕 때 始祖廟에 대신하여 중국식의 5廟제도를 확립하려고 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종래의 神宮에 대체하려 한 것인 듯하다.012)崔光植,≪고대 한국의 국가와 제사≫(한길사, 1994), 205∼209쪽.

 선덕왕이 짧은 재위 기간 중에 시행한 주요 治績으로 주목되는 것은 다름아닌 서북변경지방의 개척사업이었다. 왕은 2년(781) 7월에 신하를 보내어 浿江 이남의 州郡을 安撫했고 그 이듬해 2월에는 친히 漢山州에 巡幸하여 民戶를 浿江鎭에 옮기게 했다. 그런 다음 그 이듬해 정월에는 일찍이 執事侍郞을 역임한 阿湌 金體信을 大谷鎭(황해도 平山)軍主 곧 초대 浿江鎭典 장관(頭上大監)에 임명하여 본격적인 서북변경지방 개척사업에 착수했다. 이 패강진의 개척과 경영은 신라가 성덕왕 34년(735)에 唐으로부터 소위 패강 이남의 땅에 대한 영유를 정식으로 승인받은 직후부터 차츰 추진하기 시작한 북방진출의 일단의 성취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당시 渤海의 영토 확장, 특히 그 남하정책으로 인한 변경 위협에 자극된 바도 적지 않겠으나, 그보다는 오히려 변경개척을 통해서 농경지를 확보함으로써 피폐해진 농민층을 구제하기 위한 사회경제적 동기가 크게 작용한 것으로 생각된다.013)李基東,<新羅 下代의 浿江鎭>(≪韓國學報≫4, 1976 ; 앞의 책, 221쪽).

 선덕왕이 재위 6년 정월 13일 병으로 죽자 상대등직에 있던 金敬信이 즉위하니 곧 원성왕이었다. 그런데 이 왕위계승은 순조롭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三國史記≫ 元聖王本紀와≪三國遺事≫元聖大王條에 의하면 아들이 없는 선덕왕이 죽자 신하들은 처음 김경신보다 서열이 높은 上宰相 金周元을 추대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때 마침 폭우가 내려 閼川이 범람, 그 북쪽에 살고 있던 김주원이 왕궁에 이를 수 없게 되자 다시금 귀족회의가 열려 김경신을 왕으로 추대했다고 한다. 김경신은 비록 현직 상대등이었으나 당시의 공인된 서열로는 次宰相이었을 뿐이다. 김주원은 태종무열왕의 6세손으로 일찍이 혜공왕 13년(777) 10월에 侍中에 취임하여 혜공왕 16년의 정변 때까지 재직했다. 당시는 상대등 김양상(선덕왕)이 실권을 잡고 있었을 때이므로 그는 반왕파와 행동을 같이 했을 터이다. 어쨌든 김주원을 배제한 김경신의 즉위에 모종의 계략 내지 억지가 작용했을 것이 틀림없다.014)李基白, 앞의 책(1974), 119∼120쪽. 김주원이 江陵에서 은퇴생활에 들어간 것이라든지, 뒷날 그의 아들 金憲昌이 부친이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을 이유로 반란을 일으킨 것을 보더라도 이 점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원성왕은 내물왕의 12세손으로 선덕왕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중대 왕실에서 보면 방계혈족이었다. 다만 그의 증조부인 義寬(官)과 조부인 魏文이 중대 초기에 벼슬하면서 진골귀족사회에서 일정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즉 의관은 삼국통일전쟁 기간 중에 장군으로 활약했고 뒤에 그 딸은 신라에 歸服해 온 報德國王 安勝과 혼인했다. 또한 위문은 성덕왕 11년(712) 3월 집사부 中侍에 취임하여 1년 반 가량 재임한 일이 있다.015)李基東, 앞의 책, 151쪽. 하지만 정작 원성왕 개인의 경력으로는 상대등밖에는 달리 알려진 것이 없다. 즉 그는 혜공왕 16년(780) 4월 伊湌으로서 김양상이 거병할 때 적극 가담하여 큰 공을 세웠고, 김양상이 즉위하면서 곧바로 상대등에 임명되었다.

 즉위 당시 이미 고령에 달했던 원성왕은 비록 음험한 성격이기는 했으나 정치적으로는 노련한 인물이었다. 그는 중대 말기부터 귀족들 사이에서 造塔·造寺 등 佛事활동이 성행한 데 주목, 즉위하자마자 政法典(일명 政官)을 정비하여 불교 교단에 대한 국가의 적극적인 통제 의지를 내비쳤다.016)郭丞勳,<新羅 元聖王의 政法典 整備와 그 意義>(≪震檀學報≫80, 1995), 33∼61쪽. 다만 이와는 달리 정법전의 설치를 종래 국가가 직접 불교계에 대해 통제를 가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승려들에 의한 자율적 운영을 인정한 획기적 조치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에 대해서는 朴南守,<사원성전과 불사의 조영체계>(≪新羅手工業史≫, 신서원, 1996) 참조. 하긴 그는 개인적으로는 불교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정치 이데올로기 면에서는 중대의 군주들과 마찬가지로 유교정치를 지향했다. 그가 재위 4년(788) 봄에 讀書三品科를 실시한 것은 그 현저한 例證이다. 독서삼품과는 國學 학생을 대상으로 하여 유교경전의 해독 수준에 따라 이를 上·中·下 세 등급으로 구분하는 제도였다. 이는 일종 국학의 졸업시험과 같은 성격을 띤 것이었는데,017)李基白, 앞의 책(1986), 230쪽. 어쩌면 그 시험성적에 따라서 仕官하는 것을 제도화한 조치가 아니었을까고 생각된다.018)木村誠,<統一新羅の官僚制>(≪東ァジァ世界における日本古代史講座≫6, 學生社, 1981), 148∼152쪽.≪삼국사기≫에 “前日에는 弓術로써 인물을 뽑더니 이 때에 이르러 개혁했다”고 한 것을 보면 그 때까지는 국학 수료자에 대한 확고한 관리 임용규정이 없었던 듯하다. 뒤에 소성왕 원년(799) 3월에 菁州 居老縣(현 巨濟)을 學生祿邑으로 지정한 것은 국학에 녹읍을 지급한 것으로 이해되며 역시 국학 진흥책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李基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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