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2. 귀족사회의 분열과 왕위쟁탈전
  • 1) 왕실가족에 의한 권력독점

1) 왕실가족에 의한 권력독점

 앞에서 보았듯이 하대는 중대 전제왕권에 반감을 품은 내물왕 계통의 汎眞骨귀족 연합세력에 의해 개막되었다. 또한 여기에는 金周元과 같은 태종무열왕 계통의 일부 왕족도 가담했다. 혜공왕대의 대란 때에 전국의 96角干이 서로 무기를 들고 싸웠다고 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이미 중대 말기에 정계에 진출하고 있던 진골귀족의 수효는 상당한 수준에 이르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그 12代祖가 내물왕이라고 자처하는 원성왕 계통이 등장하면서 진골귀족의 족적인 기반은 한층 더 확대되었다. 이처럼 양적으로 확대된 진골귀족들에게 권력을 적절히 배분하는 것이 하대 왕권이 직면한 제1차적 과제였다.

 원성왕은 즉위와 동시에 장남 仁謙을 태자로 책봉하여 왕위계승권자로 확정시켰다. 그러나 동왕 7년(791) 정월에 태자가 죽자 그 이듬해 8월 차남인 義英을 다시금 태자로 삼았다. 그런데 의영마저 동왕 10년 2월에 죽고 말았다. 그러자 왕은 인겸의 장남인 俊邕을 그 이듬해 정월 태자로 책봉했다. 왕에게는 셋째 아들 禮英이 있었으나 준옹을 책봉할 당시 살아있었는지 어떤지는 확실하지 않다. 원성왕이 재위 14년(798) 12월 29일 죽자 결국 장손인 준옹이 즉위하여 昭聖王이 되었다. 그러나 소성왕은 오래 재위하지 못했다. 왕은 재위 1년 반 만인 800년 6월에 죽었다. 이에 태자인 淸明이 즉위하여 哀莊王이 되었다. 당시 왕은 13세였고 따라서 숙부인 兵部令 彦昇이 섭정으로 취임했다.

 하대의 권력구조와 정치과정을 볼 때 무엇보다도 특징적인 현상은 왕실가족에 의해서 정치권력이 송두리째 장악되어 있는 점이다. 그것은 준옹과 언승 형제가 조부인 원성왕 때 띠고 있던 관직을 보면 곧 알 수 있다. 즉 준옹은 아버지 인겸태자가 아직 살아있을 때인 원성왕 5년(789) 唐에 사신으로 다녀와 大阿湌이 되었고, 그 이듬해 波珍湌으로 宰相이 되었으며, 아버지가 죽은 직후인 원성왕 7년 10월에는 侍中이 되었다가 그 이듬해 8월 숙부인 의영이 태자로 책봉될 때 신병으로 물러난 뒤 곧 병부령에 취임했다. 그리고 의영이 죽자 태자에 책봉되었다. 한편 언승은 역시 아버지 인겸태자의 在世時인 원성왕 6년에 대아찬이 되었고 동왕 7년 정월 아버지가 죽은 직후 반란을 일으킨 전 시중 悌恭을 제거한 공로로 迊湌에 승진했으며, 그 뒤 동왕 10년 2월 시중에 취임했다. 그리고 그는 형이 태자로 책봉된 해에는 伊湌으로 재상이 되었고 곧 이어 원성왕 12년 4월에는 병부령에 올랐다.

 앞에서 본 것처럼 언승은 병부령의 자격으로 조카인 애장왕의 즉위와 동시에 섭정이 되었는데, 동왕 2년(801) 2월에는 종전까지 內省의 一局에 지나지 않던 御龍省을 독립시켜 일종 攝政府를 만들고 스스로 그 장관(私臣)에 취임했다. 그는 곧 이어 상대등에 올라 정치의 실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이처럼 원성왕과 그의 후계자들은 태자를 정점으로 하여 매우 좁은 범위의 근친왕족들이 상대등을 비롯하여 병부령·재상·어용성사신·시중 등 요직을 독점하는 권력구조를 만들어냈다. 실로 이러한 요직은 모두 재상제도의 테두리 속에 포괄되는 것으로, 재상제도가 갖는 권력집중의 기능은 이미 원성왕 때에 확립된 것을 알 수 있다.019)木村誠,<新羅の宰相制度>(≪人文學報≫118, 東京都立大, 1977), 25∼33·35∼38쪽. 이는 흔히 전제왕권이라고 불려지고 있는 중대의 권력구조 아래서도 찾아보기 힘든 권력집중 현상이었다. 그러므로 골품제국가의 정치적 모순은 전시대에 비하여 한층 더 격화될 수밖에 없었다.

 애장왕대의 정치는 당연히 섭정을 맡고 있던 숙부 언승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 왕대의 주요 치적으로서는 율령의 개정과 五廟制度의 확립을 들 수 있다. 애장왕 6년(805) 8월 조정은 公式 20여 조를 頒示했는데, 그 구체적인 법규의 내용은 잘 알 수가 없다. 다만 관리의 인사를 담당하는 位和府의 長·次官 직명이 이 해에 종래의 衿荷臣·上堂에서 각기 令·卿이라는 漢式名으로 개정된 것이라든지 또는 四天王寺成典을 비롯한 奉聖寺·感恩寺·奉德寺·奉恩寺成典 등 寺刹 관계 관청의 장·차관직 역시 애장왕 때 위화부의 경우와 같은 명칭으로 바뀐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애장왕 6년을 기하여 漢化政策이 시도된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비록 그 개혁의 규모에 있어서는 경덕왕 18년(759)의 官號개혁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지만 어쨌든 개혁의 기본방향만은 경덕왕 때와 마찬가지로 한화정책을 통해 국왕의 권력집중을 꾀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다음 5묘제도에 있어서는 애장왕 2년 2월 근본적인 개혁이 단행되었다. 즉 종래 永世不變의 廟主로 되어 있던 태종대왕·문무대왕을 5묘에서 탈락시키는 한편 애장왕의 高祖까지의 직계존속을 이에 대치했다. 비록 태종·문무 양 대왕을 위해서는 따로이 二廟를 세웠으나, 어쨌든 이로써 명실상부한 5묘제가 확립된 것이다. 사실 중대 왕통을 단절시킨 선덕왕은 5묘제를 정할 때 태종·문무 양 대왕의 존재 때문에 자신의 직계존속으로는 오로지 아버지만을 太廟에 入祔시켰을 뿐이며, 원성왕도 그 즉위년(785) 2월에 5묘를 다시 정할 때 태종·문무 양 대왕을 여전히 存置시키게 됨으로써 겨우 자기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만을 5묘에 입부시킬 수 있었다.020)邊太燮,<廟制의 変遷을 通하여 본 新羅社會의 發展過程>(≪歷史敎育≫8, 1964), 56∼76쪽.

 이같은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애장왕 2년 완성된 5묘제가 그 뒤 원성왕계 혈족집단에 끼친 영향은 매우 컸다. 왜냐하면 이로써 왕위계승에 있어 直系상속이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인식되었고, 나아가 이러한 직계 존중은 자연히 傍系와의 차별성을 강조하는 결과를 낳게 되어 내물왕계 혹은 태종무열왕계라고 하는 광범위한 씨족 연대의식을 약화시키게 됨은 물론, 원성왕계 내부의 혈족집단 자체를 점차 가족 규모의 작은 단위로 分枝化시킨 요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실로 830년대 후반의 苛烈한 왕위계승쟁탈전의 遠因은 여기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021)李基東,<新羅 下代의 王位繼承과 政治過程>(≪歷史學報≫85, 1980 ;≪新羅骨品制社會와 花郞徒≫, 一潮閣, 1984, 1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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