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2. 귀족사회의 분열과 왕위쟁탈전
  • 2) 무열왕계의 반발과 김헌창의 난

2) 무열왕계의 반발과 김헌창의 난

 애장왕 때 섭정으로서 정치상의 실권을 쥐고 있던 彦昇은 애장왕 10년(809) 7월 19일 아우인 秀宗과 함께 난을 일으켜 왕을 시해하고 新王으로 즉위했다. 그가 곧 憲德王이다. 왕은 정치적으로 야심이 많았으나 불행하게도 즉위한 지 오래지 않아 극심한 사회경제적 위기에 직면했다. 즉 가뭄과 물난리가 連年 잇따라 발생하여 일찍이 경험한 적이 없는 식량기근을 야기시켰고, 이에 따라 많은 유민이 발생한 것이다. 그러나 조정은 미증유의 재난과 기근을 당하여 거의 속수무책일 따름이었다.

 사실 식량기근은 비단 헌덕왕 때만 있었던 현상은 아니다. 여느 시대와 마찬가지로 신라통일기를 통해서 水災와 旱災는 마치 전염병처럼 만연했다. 그렇지만 국가권력이 강대했던 중대 전반기에는 그래도 이같은 위기를 잘 극복했다. 가령 성덕왕 때는 흉년이 들면 곡식을 풀어 이에 적극적으로 대처할 만한 역량이 있었다. 당시 거듭된 재해로 말미암아 기근이 들자 조정에서는 생계가 어려워진 貧民을 救恤하기 위해 동왕 6년(707) 정초부터 7월말까지 7개월 동안 한 사람에게 粟 3升씩을 지급하여 모두 30만 500石을 방출할 정도였다. 하대 초창기인 원성왕 때만 하더라도 조정은 비록 제한된 범위에서 나마 賑恤策을 쓸 수가 있었다. 즉 동왕 2년(786) 9월 京都에 기근이 들자 粟 33,240石을 내어 賑給했고, 10월에 다시 粟 3만 3천石을 내어 나눠주기도 했다. 그 뒤에도 동왕 5년 정월, 6년 5월, 12년 봄에 漢山州·熊川州 등 지방과 서울에 기근이 들자 粟穀을 내어 구제했다.

 그러던 것이 헌덕왕 때가 되면 사정이 악화될 대로 악화되어 있었다. 왕은 2년(810) 2월 使者를 파견하여 국내의 隄防을 수축하게 하는 등 농업과 관계가 깊은 수리시설에 관심을 기울이기도 했다. 그런데 6년 5월 나라 서쪽지방에 홍수가 나자 왕은 관리를 보내어 수해를 입은 州郡의 인민을 위로하는 한편 1년간 조세와 貢物을 면제하는데 그쳤다. 그 이듬해 8월 서쪽 변경 州郡에 큰 기근이 발생하여 도적떼가 봉기하자 군대를 보내어 討平에 주력할 뿐 적극적인 대책을 세우지 못했다. 동왕 9년(817) 10월에 굶어 죽은 사람이 많이 발생하자 왕은 주군에 명하여 창고의 곡식을 내어 구제케 했다고 하지만 그 성과는 잘 알 수 없다. 다시 11년 3월에 草賊이 곳곳에서 일어나자 조정은 그 진압에 힘을 쏟았을 뿐이다. 12년 봄과 여름이 가물은 결과 겨울에 기근이 발생, 그 이듬해 봄에는 기근에 견디지 못해 자식을 팔아 自活하는 사람이 발생하기까지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구당서≫ 신라전에 의하면 헌덕왕 8년 신라에 기근이 들자 唐의 浙東지방에 건너와 먹을 것을 구한 자가 170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또한 이 시기 일본측의 기록을 보더라도 811년(헌덕왕 3년) 8월부터 824년 5월까지 전후 13회에 걸쳐 모두 826명의 신라인이 일본열도에 漂着 당도한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022)佐伯有淸,<朝鮮系氏族とその後裔たち>(≪古代史の謎を探る≫, 讀賣新聞社, 1973), 197∼198쪽.

 이처럼 사회경제적 형편이 악화되어 만성적인 식량기근이 발생하고 더욱이 헌덕왕 7년과 동왕 11년 두 차례에 걸쳐 초적이 봉기하는 등 민심이 매우 흉흉해진 기회를 이용하여 熊川州都督으로 있던 金憲昌이 대규모의 반란을 일으켰다. 김헌창은 金周元의 아들이었다. 비록 김주원 자신은 선덕왕 6년(785) 원성왕과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경쟁을 벌이다가 실패하여 강릉으로 은퇴했으나 그의 두 아들은 원성왕계의 조정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것은 김주원이 태종무열왕계로서는 이례적으로 혜공왕 말년에 반왕파에 가담하여 혜공왕 16년(780)의 정변에서 큰 공을 세웠기 때문이었다. 사실 하대 왕실은 태종무열왕계를 정치에 참여시킴으로써 정변의 합법성을 보장받으려 한 듯하다. 이에 따라 김헌창의 형으로 짐작되는 宗基는 원성왕 6년(790) 정월부터 이듬해 10월까지 시중직을 역임했고, 그 아들 璋如도 헌덕왕 8년 정월 시중에 취임하여 1년간 재임했다. 김헌창 자신도 헌덕왕 5년 정월 武珍州도독에 취임한 뒤 이듬해 8월 시중으로 영전되었고, 동왕 8년(816) 정월에는 조카인 장여에게 시중직을 넘기고 菁州도독으로 전출되어 장기간 근무하다가 동왕 13년 4월 다시 웅천주도독으로 전보되었다.023)≪三國史記≫권 10, 新羅本紀 10, 애장왕 8년 정월조에 “伊湌 金憲昌(一作貞) 爲侍中”이라 한 것을 근거로 하여 이를 김헌창의 경력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井上秀雄,≪古代朝鮮≫, 日本放送出版協會, 1972, 237쪽 및≪新羅史基礎硏究≫, 東出版, 1974, 388·461쪽), 이는 金憲貞의 경력으로 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된다. 이에 대해서는 李基白,<新羅 下代의 執事省>(≪新羅政治社會史硏究≫, 一潮閣, 1974), 177쪽 및 李基東, 앞의 책, 156쪽, 주 33 참조.

 김헌창은 헌덕왕 14년 3월, 37년 전에 아버지 김주원이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그 대신 원성왕이 즉위한 것은 불법이었다고 하면서 웅천주의 治所를 본부로 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국호를 長安, 연호를 慶雲이라 하여 반란의 기치를 높이 세웠다. 그의 반란군은 최초 武珍·完山·菁·沙伐의 4州 도독과 國(中)原·西原·金官의 3 小京 仕臣 및 그 밖에 여러 군현의 수령을 협박하여 반란세력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그러나 곧 청주도독 向榮이 탈주에 성공하고 完山州長史 崔雄 등이 왕경으로 달려와 반란 사실을 고함에 따라 조정은 곧바로 반란 진압의 태세를 갖추게 되었다.

 당시 조정은 반란에 기민하게 대처했다. 특히 왕의 동생으로 반란이 일어나기 직전 상대등에서 副君으로 승격한 金秀宗의 활약이 컸다. 조정은 一吉湌 張雄을 선발대장으로 파견하여 반란군의 주력을 추적하게 하고 곧 이어 잡찬 衛恭·파진찬 悌凌이 이끄는 本隊를 출동시켰다. 그런 다음 다시 이찬 金均貞·잡찬 金雄元·대아찬 金祐徵(김균정의 아들)으로 하여금 3軍을 통솔, 본격적인 진압에 나서도록 조치했다. 이 때 明基와 安樂 두 화랑도 각기 종군을 신청한 뒤 반란 토벌에 종사했다. 당시 중앙군의 반란 진압상황을 보면 장웅의 선발대는 최초 반란군의 一隊를 道冬峴에서 포착, 이를 격파하고 조금 뒤에 도착한 위공·제릉의 본대와 합류했다. 군 주력은 三年山城(報恩)의 반란군을 격파한 다음 속리산 방면으로 진출하여 반란군의 支隊를 섬멸했다. 한편 3군 주력부대는 반란군의 지대를 星山에서 격파한 뒤 모든 토벌부대와 합세하여 반란세력의 근거지인 熊津으로 향했다. 진압군은 웅진에 도착하여 반란군과 격전을 벌여 크게 이겼고 이어 웅진성 공격에 들어갔다. 성을 포위한 지 10여 일에 성이 함락되기 직전 김헌창이 자살함으로써 반란은 마침내 진압되었다. 이 반란에 연좌되어 죽음을 당한 김헌창의 宗族과 黨與는 모두 239명에 달했다.

 그 뒤 헌덕왕 17년(825) 정월에 김헌창의 아들 梵文이 高達山의 산적 壽神 등 1백여 명과 더불어 또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수도를 平壤(지금의 서울 부근)에 정하려고 북한산성을 공격했으나 漢州도독 聰明이 거느린 군대에 의해서 곧바로 진압되었다. 이처럼 두 차례에 걸친 김헌창 부자의 반란은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것이 앞으로 닥쳐올 사태의 진전에 끼친 영향은 매우 컸다. 첫째로 이 반란은 豪族세력의 지방할거적 경향을 크게 촉진시켰고, 둘째로는 830년대 후반 원성왕계 내부의 왕위계승쟁탈전을 유발하는 한 심리적 요인이 되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